시대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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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中世
영어: Middle Ages, Medieval Time
이탈리아어: Medioevo
목차
1 개요
넓게는 세계사, 좁게는 유럽 역사에서 고대와 근대의 사이에 놓인 시기. 다만 중세의 다음 시기를 지칭하는데 근대 초기를 대체하여 등장한 개념인 근세가 쓰이기도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세는 유럽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특수한 개념이다. 어찌 보면 번역할 필요 없이 그냥 미들 에이지라고만 해도 될 수준.
2 유럽의 중세
유럽 중세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대체로 476년부터 1453년이나 1492년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담론이 등장하면서는 중세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세의 성격과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략적으로 중세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로마로 시작해서 로마로 끝나는 시대
- 시작
- 끝
이처럼 사실 '중세' 담론이 가장 뚜렷한 유럽 역사에서도 중세의 시작과 끝을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전부터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의 문화는 뒤섞이고 있었고, 중세에 게르만족에 의해 나타났다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주로 프랑스 아날 학파 사학자들의) 최근 연구로 고대 로마에도 존재했었고 그것이 게르만족만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굳이 시작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를 몰아내고 동로마에 서로마 황제의 휘장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본다.
일반적인 중세 유럽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엄밀히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 게르만족의 유입 이후 이슬람교 세력, 노르만족, 마자르족 등으로 대표되는 이민족이 침입해 온다.
- 이로 인한 고대 제국의 붕괴. 이에 따라 상업과 교통이 붕괴하면서, 통일적이었던 고대의 사회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자급자족 체제로 전환된다.
- 이민족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춘 기사 등이 영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상위의 계층에 대해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이라는 자급자족적 단위를 거느리면서 유럽 내에서 분권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 장원의 아래에 고대의 노예나 소농 등이 특정 지역에 묶이면서 만들어진 농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 사상적으로는 크리스트교 질서 아래에서 모든 학문이 포괄되어 움직이면서, 고대의 인문주의가 쇠퇴하는 한편 형이상학적인 신학이 발달한다. 이것은 후에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 교황권이 성장하여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권은 세속권을 상당 부분 겸하거나 제약하기도 하였는데, 카노사의 굴욕이 대표적인 사례다.
- 그러던 것이 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도시의 등장,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의 확립 등으로 그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과 아비뇽 유수 등으로 교황권도 서서히 몰락하고,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문주의가 대두되면서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
-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3 암흑시대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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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초 로마네스크 건축 (제르미니 데 프레) | 12세기 고딕 건축 (샤르트르 대성당) |
9세기 교회 건축과 12세기 교회 건축. 문명이 진보했고, 그 원동력에 기독교가 있다.
대다수의 판타지물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1]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경우도 많고, 서양에서는 판타지 팬이 아니라도 기사, 갑옷, 공성전 등을 좋아하는 밀덕, 역사덕후들이 갖는 중세 로망도 많다. 오히려 이와 대비되게 실제로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식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클리셰 파괴를 위한 클리셰? 그리고 픽션이라도 그런 중세의 현시창 분위기를 더 크게 어필하면 다크 판타지물이 된다. 즉 중세시대와 중세시대 픽션은 환상적인 이미지와 어두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셈인데 어느 방향이든 인기와 인지도는 많고 논란도 많은 메이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암흑시대의 의미는 '기독교의 억압에 의해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둠의 중세시대'로 통용되는데, 여기서 두가지 논의점이 발생한다.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시대인가?2) 퇴보되었다면, 그게 종교(기독교) 때문인가?
일단 결론을 내리자면 둘 다 아니다.[2] --클리셰 파괴를 위한 클리셰 모든 것이 퇴보된 시대도 아니었고, 중세의 기독교는 서로마 멸망 후 혼돈의 카오스인 시대상황에서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중들에게 중세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박혀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라는 역사학적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중세의 이미지는 14~16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존중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 힘이 발흥되어 문화가 만개했던 행복의 시대를 그리스·로마시대라고 생각했으며, 그 유산인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해 그러한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중세를 중간시대, 쓰레기인 추악한 시대라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고전과 당대라는 두 개의 참된 시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기는 그에 의하면 소거(消去) 되어야할 쓰레기였다. 이렇듯 중세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까기 위한 목적으로 페트라르카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중세라는 용어는 그 후에도 여러 인문주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 이때까지는 중세라는 표현은 물론 어떤 특정한 시대를 지칭한다거나 명확한 시대구분 없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분명하게 하기 위한 편의적 사용이었다. 이러한 편의적 사용을 주교이자 교황청의 사서였던 죠반니 안드레아가 고대-중세-근현대라는 3시대 구분법에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시대구분 형태로 자리잡았다. 1469년 교황청 사서 조반니 안드레아는 중세란 표현이 '낡은 사람'들과 '우리시대의 근대인'들의 구분을 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했다.
스위스 출신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부터 중세를 폄하하는 경향이 더 번성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조르조 바사리 같은 르네상스 운동의 주역들로부터 사용된 것이지만, 그 용어를 '시대' 개념으로 정립한 것은 부르크하르트였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를 고대문화의 부활이자 근현대의 출발점이요, 중세와의 급격한 단절로 해석했다. 이런 주장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의 추종자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존 시몬즈는 두 시대를 다음과 같이 확연히 대조시켰다.
중세 시대의 정신 상태는 교의(敎義), 권위, 스콜라주의와 같은 교회의 우상들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침내 인간의 노력을 위한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며, 그 이래로 인간이 여전히 참여하는 진보가 계속되었다. 르네상스의 역사는 인간 정신이 쟁취한 의식적 자유의 역사다.
이렇듯 수백년 동안 까이고 또 까이던 중세는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재평가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게르만계 학자들에 의해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는 연구도 나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
현재에 와서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여기는 견해가 많다. '암흑시대'라는 부정적 의견은, 중립을 선호하는 전문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중립 견해에 따르면 중세는 서양사의 한 시대에 붙인 이름일 뿐이고, 이 시대는 서구문화에 독특하고도 중요한 공헌을 추가했으며, 그 공헌은 공정하고도 편견 없는 연구&평가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에 대해 서술한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참고로 일반 대중들이 종교의 생활규범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secularization)는 19세기의 일이었으며, 공중 차원에서의 세속윤리(secular ethics) 담론의 본격적인 진행은 사실상 현대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사료가 부족하여 시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제한적 의미의 암흑시대는 여전히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으며, 중세 초기(AD 476~1050년경)의 경우에는 여기에 해당하므로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요한 하위징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와는 비교하면서 중세 후기(14-15세기) 프랑스어권을 연구하여 이 시대 프랑스어권은 재생의 시대라기보다 비관주의와 데카당스의 시대를 거쳤다고 보았다.
“중세시대는 겨울이 아니다. 중세는 마치 분명 저물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붉은 석양을 남기는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대였다.” (호이징아 '중세의 가을' 中)
3.1 시대적 배경
기원후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에 두 세기를 지켜온 안정과 평화는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이로 인한 경제파탄에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250년경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공격과 침입은 또다른 위험이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도 전반적으로 열악해졌다. 상류계급의 생활수준은 특히 현저하게 낮아졌다. 경제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노예노동의 부적절한 공급과 역병, 전쟁, 출산율 하락에 기인하는 전반적인 인구감소였다. 경제상황의 악화는 진지한 학문연구에 절대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아버렸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부의 학문과 동부의 학문 사이에 교류가 점차 감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세기 말과 4세기에 로마제국은 행정적으로 동부와 서부로 양분되었으며, 두 지역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서부와 라틴 세계는 더 이상 예전처럼 활기차게 동부의 그리스 세계와 교류 할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때의 이러한 위기로 말미암아 로마 서부 지역은 급격히 황폐화되었다. 이미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는 동부의 그리스, 오리엔트였으며 이들 지역을 속주로 보유한 동로마 제국은 풍요로운 경제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비교적 수월하게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서로마 제국은 경제파탄, 내전, 야만족의 침략 등으로 인해 완전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동서제국 분열 이후의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이 와중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것은 야만족들의 침략이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대부터 시작된 야만족들의 침략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전부터 끊임없이 제국의 국경선을 침략하던 게르만족은 말할 것도 없고 훈족까지 침략해 제국 내부를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의 지원을 얻기도 하고 야만족들과 연합하기도 하는 등 이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이미 흘러간 대세를 다시 바꾸기는 어려웠다. 급기야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토를 차지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5세기 초 서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지방에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수에비족, 고트족, 앵글로색슨족, 반달족 등이 잇달아 침략해 정착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일대만을 다스리는 미약한 정권으로 몰락했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켰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 세계에는 여러 게르만족 국가들이 들어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와의 접촉을 통해 로마화되었지만 로마의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한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초기에는 로마의 기술, 건축, 법과 같은 수준높은 문화가 상당 부분 잊혀지고 서유럽의 문명 수준은 급격히 후퇴했다.
3.2 경제적 측면
일단 유럽의 중세의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는 급증하고 상업이 부활하고[3],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4]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중세시대에 곡물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2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인해 각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농지개량법을 연구하여 보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 이후 2번째로 급격한 기온상승이 일어나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재배가 활발해졌던 것이다.(그린란드에서는 무려 7세기 초까지 밀을 길렀다)[5]. 그래서 중세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1~13세기 사이 유럽인들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중세 후반인 14세기 이후의 사람들보다 영양상태와 체격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다만 상업적인 측면에선 로마 제국 말기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경우 아예 이민족들에 의해 영토가 점차 점령당하다가 결국 망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동로마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혼란기를 넘길 찰나에 이슬람의 발호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이 파급은 서유럽에까지 미쳐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나중엔 바이킹같은 해적들 때문에 더 막장이 되었다.
더구나 서유럽의 경우 별로 좋을게 없었다. 단적으로, 지방 영주들은 지방간 무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무역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경쟁자를 자신의 영토의 특산으로 부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6], 지방간 이동할 통로에 관문을 빽빽히 설치해서 세금을 장난 아니게 때렸다. 이로서 지방간 무역이 수축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도 한몫했다.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도 있지만 로마시대때 부터 꾸준히 사용되어 온 데나리(denarii)의 은 함유량이 점차적으로 떨어지다가 13세기에 들어서는 구리화폐가 되어버렸다. 화폐의 은함유량은 해당 화폐의 신뢰성을 뜻하는 것인데 로마시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신뢰할만했던 것이 종래에는 도저히 은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다.[7] 이것이 결국 상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때문에 이 화폐도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교역이나 급료 지불등 제한적이게 사용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역이나 상업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흔히 무시되던 중세 초기에도 지중해 지역 내의 무역망은 소멸하지는 않았다.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이 있던 아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잠시 교류하기도 했다. 다만, 7세기 이슬람의 이집트 정복에 의해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수입이 중단되고 양피지로 대체된 것은 중세 유럽에서 문자 문화가 거의 소실되다시피 한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다가 중세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이르면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화려하게 부활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도시의 실권을 장악한 상공 엘리트가 '부르주아'로 성장하였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시문화와 학문을 꽃피웠다. 이 시대를 가리키는 어가 바로 '12세기 르네상스'.
세금에 관해서도 창문, 화로, 문짝, 신발, 술, 꿀, 우물, 결혼 등 세금을 때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8] 대개 평민들은 수입의 절반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금으로 걷혔다. 그 중 가장 타격이 컸던 것은 가장이 죽었을 때 영주가 돈을 떼가고, 교회에서 집의 가장 좋은 가축을 한 마리 가져갔다고 하니(사망세), 쟁기끌 소가 없어지거나 하는 사태로인해 몇년 안 있어 집안이 망하여 소작농이 되곤 하니, 평민 전체가 결국 소작농이 되는 경제학적으로 봐서 결코 좋은 상황이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귀족들은 평상시에 세금 따윈 안냈다. 전쟁이나 일어나면 왕들이 귀족들한테 기사들 좀 모아와서 참전하거나, 정모불참가비를 내라고 삥을 뜯는 경우가 아니라면.[9] (그리고 해당 군주가 전투광이라서 틈만 나면 원정비 모으는 놈이 아니라면[10][11](...) 귀족은 세금 같은 거 낼 일이 없었다.) 세금은 평민이 내는 거지! 물론 교회도 그런 거 없다.
귀족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귀족은 각자 자신의 영지의 영주이고 왕은 귀족중의 1인자이며 최고의 영주이기 때문이다. 즉 왕은 가장 강한 영주이지만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것은 자신의 영지내였으며 다른 영주의 영지에 간섭하는 것은 일종의 내정간섭이었다. 세금은 자신이 살고있는 땅의 주인에게 납부하는 것인데 귀족에게 왕은 자신보다 강하고 귀족들의 대표자격인 관계이지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자신의 영지는 왕의 땅이 아니므로 세금을 거둘 권리는 영주인 자신에게만 있으므로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는것이다.
또한 유념해야 할 것은 중세의 사고체계에서 귀족은 어디까지나 '전사'이자 '기사'였다는 점이다. 전투를 통해서 왕에게 봉사하고 농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따라서 귀족이 세금을 안냈다고 말하기보다는, 귀족이 담당한 의무는 참전의 의무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참전하지 않는 기사의 경우 방패세라고 세금을 냈다. 즉, 군역 자체가 바로 세금에 버금가는 의무였던 것이다.
교회도 그런것 없다가 아니라 빈민구제를 비롯한 요즘의 사회복지 부분을 실질적으로 담당한게 중세의 교회다. 세금을 거두고 분배까지 정부가 담당하는 현대국가와 달리 이 시기는 정부의 기능이 궁정과 영주, 교회 사이에 분업화되어있던 시대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3.3 문화적 측면
문화의 부흥에 대해서는 암흑기다 아니다 하는 이견이 많은데, 일단 한가지 확실한 건 중세시대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문화 사이에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전수한 전수자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가 시대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라틴어문학 보존작업인 카롤링거 르네상스 덕분이었다. 인쇄술이 전무했던 탓에 손수 그 많은 책을 베껴가며 보존했는데, 초기에는 카롤링거 왕가에서, 후기에는 수도원들이 이 일을 해냈다. 때문에 중간에 좀 첨삭이 있기도 하였고, 결국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 저본 논쟁도 조금씩 벌어지게 된다.
다만 라틴 문학을 보존하긴 했으나 그리스어 문화는 보존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나중에 레콩키스타를 통해 정복한 톨레툼의 도서관에 있는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적 《번역은 반역인가》를 참고할 것.
또한 이 시기에 단테에서 롤랑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계층을 위한 문학이 발전했으며, 다성음악이 발명되고, 사라질 뻔했던 연극이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연극의 경우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글도 못 읽고 교회에서 얘기해줘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는 우민들을 교육하기 이보다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유랑 연극단들이 지방 곳곳에 퍼져 교리를 전하였고, 실제로 이는 교회의 입지기반을 튼튼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로마네스크 양식 및 고딕 양식도 이 때의 산물. 고딕 양식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건축학에선 고트족과 상관이 없는 작명. "전통적인 건축학 입장에서 보면 꽤 파격적이다."라는 의미에서 "야만인" 고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이때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하게 되어 일시 건축학이 퇴보 되기도 했다. 10~11세기 고딕 양식이 서서히 들어오기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돌만 좀 쌓아올리다가 얼굴 내밀만한 창문 하나 정도 만들고 지붕은 기둥이나 그런 게 지탱해서, 벽의 구성이 자유로워진 게 아닌 두껍고 투박한 벽이 모든 것을 지탱해야 했으니. 또한 로마 건축물이 남은 곳에서 사람들이 돌을 마구마구 빼와서 건축자재로 써서 유적이 많이 소실되기도 했다.[12]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축은 성당이나 일부 성이나 궁전, 공공 건물에만 반영되었고 앞서 상술되듯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했고, 특히 알프스 이북의 경우 아예 제반 기술이 붕괴되었기에 벽돌 만드는 방법마저 실전되었다. 초기 알프스 이북의 경우 사회 인프라 시설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대부분 목재로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성마저 목재로 지어졌다. 이때 가옥은 나무로 된 틀, 욋가지에 흙을 바른 벽, 그리고 짚 등으로 이어진 지붕으로 2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하나는 길이 20~50피트(6.1~15.24m), 폭은 15피트(4.572m)의 가옥과 길이 6m, 폭이 3m인 원형 오두막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은 썩 튼튼한 건물들이 아니었기에 도둑들이 간단하게 벽을 부수고 들어오기도 했고, 단칸방이라 한 가족들이 한방에서 모여서 생활했고, 대체적으로 축사까지 겹쳐있는 형식이라 기르던 가축들과 함께 살기까지 했다.[13]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 내에서 하프 팀버라는 목조골조 사이에 진흙이나 벽돌로 체우는 반목조 양식의 건축술이 등장해 서유럽과 중유럽 등지에서의 가옥양식으로 크게 유행했다. 한편 알프스 이남의 경우 벽돌조의 가옥이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데 북유럽과 중부 유럽의 경우 주로 박공 지붕이 주류였고, 남유럽은 평지붕이 주류였다. 다만 동로마제국과 러시아 지역을 제외하곤 유럽 각지의 도시 주택은 건물 폭이 좁으면서 대신 길이가 긴 이른바 세장형 주택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처럼 일층엔 상업이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층 이후로 전부 생활 공간으로 오늘날의 타운하우스처럼 수직형 공간이었다.
그외에도 각박한 시대인지라 탑처럼 생긴 주택도 유행했는데 탑상 주택, 또는 탑주택이라 불렸고, 서유럽 전반에도 널리 퍼져 있었지만 동유럽의 코카서스 지방에도 탑상 주택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에 이러한 탑상 주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도시로 이주한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과장을 보텐다면 한 도시에 평균 100여개의 탑상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전부 다른 귀족들에게 질세라 경쟁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탑상 주택이 나타날 때가 12세기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 내부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기에 같은 도시, 같은 도시내의 구역을 차지한, 각기 이해관계가 일치한 귀족들이 모여 계약을 맺은 콘소르테리아를 중심으로 한 블록 전체를 둘려싸는 형상으로 크고 작은 탑상 주택을 철책을 두르듯이 집합시켜 방어의 효과를 높였고, 각 탑상주택은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어 발코니에서 공동체의 적에 대한 감시와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중정을 두었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중정 쪽으로 돌출된 회랑을 통해 피신했고, 이밖에도 우무르 부뚜막, 땔감 창고 등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높은 탑을 세워 꼭대기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궁수들을 배치했다.
대체로 탑상 주택의 벽은 두텁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일층은 보통 아치로 된 한두 개 정도의 출입구가 있었고, 각 층마다, 작은 개구부를 한두 개 정도 설치되어 있어 폐쇄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배열고 불규칙한 경우가 많았다. 일층은 금고와 무기를 보관하는 방이 있었고, 이층은 거실 및 식당이 그 상층부에는 침실이 있었다. 부엌은 보통 맨 위층에 자리했는데, 굴둑도 없는 화덕이 설치되어서 요리를 할 때면 온 실내에 연기가 가득 차였다고 한다. 지하에는 와인 창고와 조명용 기름을 만드는 작업장을 두었다. 그외에도 외부에는 상점을 세놓았고, 내부에는 고용인의 주거 공간과 작업장 등을 설치했다.
하지만 탑상 주택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13세기 말 도시 내부가 안정을 되찾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귀족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정치의 참여를 제한시키면서, 사적으로 짓는 탑이나 탑상주택의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지나치게 높아진 이들의 탑을 일정한 높이까지 줄여버렸다. 현대의 탑상주택의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한 체 남아있는 곳으로 블로냐와 산 지니마노다. 탑상 주택의 높이는 최대 90m에 이르렸다고 한다.
식문화에 있어서는 변변치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상당한 양의 요리책들이 저술되기도 했고 영주들도 놀고 먹는 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14] 의외로 요리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종류의 향신료가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후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향신료 열풍의 기폭제가 된다. 다만 술 마시고 깽판 부렸다는 기록이 상당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테이블 매너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5]
물론 서민(농노)들은 그런거 없고 단지 얼마 안 되는 고기[16]를 양배추나 순무 같은 채소들과 함께 수프나 스튜형태로 푹 끓여먹어야만 했다.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국물요리를 좋게 말해서 서민적, 나쁘게 말해서 상놈들이나 먹는 요리 취급(특히 프랑스에서)을 하는 이유가 바로 중세시대의 영향이란 설이 있다.# 요리인류에서 참고할 만한 주장이 나오는데, 이 시기 귀족들은 불 냄새 밴 고기는 평민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이유로 직화구이 고기를 피했다고 한다. 변변찮은 조리도구가 없는 평민층이 고기를 구워 먹게 되면 불로 바로 익혀 먹는 반면 귀족층은 다양한 조리도구를 이용해 여러 방식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귀족층은 고기를 구울 때에는 불에서 1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쇠꼬챙이에 꿴 고기를 두어 그 열로 간접적으로 굽는 방식을 이용했다.
유흥과 여가에 있어 귀족들은 마상창시합이나 매 사냥, 파티를 즐겼던 반면 하층민들은 가끔 가다 있는 순회극단이나 광대들의 공연을 관람하거나 축제에서 놀고 마시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물론 교회에서는 모두 다 방탕하다고 실컷 까댔다. 어쩌라고 성에 있어서도 억압이 심했다는 예를 들어 몽정만 했어도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았다거나 하는 피터 베일리쉬?선입견과 달리 매춘이 묵인되는 등 할 건 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덕성에서의 경직은 실제로는 종교개혁기에 심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장 칼뱅이나 올리버 크롬웰 같은 16세기의 인물들의 행적이 중세에 고스란히 덮어씌워졌다는 것.
3.4 사회적 측면
많은 사람들이 중세하면 마녀사냥을 상상하는데, 정작 '흔히 아는' 마녀사냥은 근세에 벌어진 일이다. [17]
종교재판소에 대한 가장 잔혹한 안내서인 크라머와 슈프렝커의 '마녀들의 망치' 또는 '마녀의 추'는 1486년에 나왔고 르네상스 시기부터 화형과 더불어 마녀들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박해가 이루어졌다.
각종 중세시대 고문 도구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고문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도리어 비교해서 보면 현대 냉전 시대에 더 정교해진 면이 없지 않다.[18]
로마 제국 시대에 탄압받았던 독신주의 여성 신자들이 수녀회를 결성하여 제도화되었고, 여성에 대한 종교적 보호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등 여성 인권은 오히려 로마시대보다 진보했다. 게다가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 보호하는 켈트나 게르만의 전통에 따라 영주의 아내로서 과부가 된 사람은 일부 영주의 영지 지배권이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영주가 여자 농민들의 처녀를 빼앗고는 했다는 '초야권'에 대한 것도 사실상 도시괴담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야권 자체는 존재했으나 세금으로 대신하는게 가능했고 영주들도 '붕가 한 판'보다는 초야권을 빌미로 결혼세 등의 세금을 걷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말하자면 네 아내의 순결을 빼앗기기 싫으면 돈을 내라에 가깝다. 솔직히 농노의 수가 한둘도 아니고 초야권을 시도때도 없이 행세하면 영주도 피곤하지 않겠는가. 너무 많이 사용해서 복상사할지도. 물론 그렇다고 초야권이라는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어찌되었든 영주가 진짜로 원한다면 자기 맘대로 검열삭제할 명분이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경쟁하는 영주와 왕에게 온갖 욕을 다 들어먹으면 된다.자세한 건 초야권 항목 참조.
대체적으로 도시가 아닌 농촌사회가 태반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와 농노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봉건제도와 농노제도는 분명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였지만, 사실 로마시대나 그 이후 근대까지 노예들이 있었다는걸 생각하면 과연 중세가 유달리 민주적으로 퇴보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 미국도 링컨 나올 때까지 노예들을 부리고 있었으니... 노예제는 기계 기술이 노예들의 경제적 효율성을 추월하고, 국민교육이 실시되면서 인권의식을 갖게 되는 이후에나 철폐된다.
사회에서 교회가 가지는 위상이 현대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기에,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상당히 부당한 비판이다. 우선 중세의 교회는 현대의 교회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 현대의 교회는 순수하게 종교 집단의 의미를 지니며 신부, 수사, 수녀, 목사가 종교 이외의 분야에 관여한다는 것은 매우 생고한 광경이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넘어서 교육, 행정, 학문, 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에 가까웠다. 따라서 중세의 교회가 교무금(십일조)을 걷는 것은 '세금을 거두어서 공공 사업에 쓴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는 신부놈들이 돈을 뜯어가네'라고 이해하여서는 안된다.[19] 같은 원리로 '중세의 교회에서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쳤다'는 명제는 '교과서에 천동설이 정설로 적혀있었다' 정도의 의미로 봐야지, '교리적 차원에서 천동설을 진실이라 가르쳤다'로 봐서도 안된다. 국가가 현대와 비슷하게 각종 공공사업 대부분을 떠맡는 모습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모습이다.
3.5 위생적 측면
이런 자료만 보고 중세의 의학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풍조가 보이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례는 십자군 전쟁 당시 샤이자르의 영주였던 우사마가 남긴 기록인데, 동시대의 모든 서양인 의사들이 이런 막장스러운 진료를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일단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의학기술은 중세에도 대부분 보존되어 전해졌다. 상처나 평범한 질병의 치료법, 산파술, 접골기술, 일상적 약재의 조제와 처방 등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문제는 의학의 학문적 요소, 특히 이론적이거나 철학적인 요소는 로마의 붕괴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다.[20]
구호기사단의 병원을 예로 들어보자. 수많은 병든 순례자들이 거쳐 가는 구호 기사단의 병원에서 위 사례와 같은 막장 진료를 내려댔다면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살해당하였을 것이다. 이런 병원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결국, 위 사례는 당대로써도 돌팔이 의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돌팔이 의사를 가지고 중세의 의사를 모두 판단해버리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돌팔이 의사는 현대 사회에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중세에도 현대처럼 개념있는 의사와 돌팔이 의사가 섞여 있었다.[21]
하지만 당시의 이슬람 의학과 비교해도 당시 유럽의 의료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슬픈 건 로마 시절엔 오히려 군의관 시스템을 구축해 병사들의 위생과 마취를 이용한 외과적 수술(!) 심지어 성형도 하는 등 상당한 발전을 이뤘던 상태였는데, 그것이 실전되고 말았다. 돌팔이도 현대와 비교하면 정도와 수의 차이가 확연했다. 옛날 치료법이 다 그렇다지만 지금 보기에는 괴악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이 많아 웬만한 의사보다 검증이라도 조금 된 민간요법이 나았다. 물론 현대에서는 이런 훌륭한(?) 중세의 치료를 받을 수는 없다.
물론 중세의 의료기술이 4원소설이나 4체액설 등에 근거하고, 의사들이 종교적이나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치유법을 찾으려고만 했지, 임상시험이나 그런 거 따위는 없었기는 했다. 사실 중세시대 의사들에게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이나 과학중심의학(Science-Based Medicine)[22]을 기대하는 게 좀 무리이긴 하다. 참고로 EBM은 18세기도 아니고 19세기도 아니고 1980년대에 제안된 개념이다.
중세 의학에서 가장 흔한 형식의 치료는 약물요법이었다. 적절한 약물을 결정하고 약을 짓는 능력은 약효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부분 의료행위자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단일 약재가 처방될 때도 있었고 여러 약재가 혼합 처방될 때도 있었다. 약재의 성분은 대부분이 약초였지만 동물이나 광물이 이용되기도 했다.
중세 의학의 업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병원의 발명이다. '보호시설'이나 '자선시설'을 의미하는 병원은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환자의 치료에 집중하고 전문화된 의료행위를 제공하는 병원은 6세기 무렵 비잔틴 제국에서 출현했다. 비잔틴 제국의 이런 모델은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으로 전파되었으며, 유럽에서는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급속히 확산하였고 유럽 전역의 도시와 마을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을 수준으로 성장했다.
근세(근대 초기, 17~18세기 초)와 비교하면 위생면에서 조금 나았다. 목욕하는 것이 미덕이자 부의 상징이기도 했고[23] 물론 상하수도관을 설치했던 로마와 비교하긴 어렵지만, 로마가 남겨놓은 목욕탕과 목욕문화가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근세보다는 자주 씻었다. 다만, 귀족이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목욕을 즐긴다거나 하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깔끔하기로는 오히려 근대 무렵의 사람들보다 더했다. 문제는 후반에 목욕탕이 문란하게 변하면서 교회의 비난을 받고, 목욕탕을 중심으로 페스트와 매독등의 전염병이 확산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어느정도는 사실인 측면도 있긴 했지만) 이런 풍습이 사라져버렸다. 근대의 사람들이 잘 씻지 않은점은 이 믿음이 근대까지도 지속되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근대라고 중세보다 확 좋아진건 아니었으니까.
주변환경의 경우 진짜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다. 위에 언급된 초기 중세시대의 가옥에서의 언급대로 단칸방에 온가족들이 모여사는 것도 문제였지만 기르는 가축들까지 같이 안에다 들여놓고 생활했기에 위생상으로 최악이었고 로마시대 당시 자랑하던 상·하수도의 체계마저 실전된 상태였다. 그나마 건축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건축자재의 발견으로 집과 축사가 개별화 되었으나 상·하수도는 여전히 전무한 상태로 심지어 도시의 경우 더 심각한 도시 안에서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키웠졌고 오물은 길거리에다가 버렸다.[24] 이때문에 도로는 가축의 변이나 사람들이 버린 온갖 오물로 넘쳐났고 이러한 오물들은 실제로 흑사병이 일어날때 흑사병을 더욱 만연하게 만들었다.
다만 오물을 길거리에 버리는 관습 자체는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Missiles of Mirth(기쁨의 투척물)'라는 완곡법으로 이러한 악습이 묘사된 바가 있으며 아파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로마시대에는 '인술라'라는 공동주택이 있었는데 당시에도 위층까지 상하수도를 끌어올리는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인술라 상층부엔 당연히 하수도가 없었고, 이미 이때부터 오물 투척은 심각한 문제였으므로 Dejecti Effusive Actio라는 법으로 통제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중세에 들어서 하수처리 기술이 아예 실전되었기 때문에 오물을 아무데나 버리는 것이 더더욱 심해진 것은 사실이나 흔히 알고 있는 편견처럼 로마시대때는 아예 없었다가 중세에 가서 갑툭튀한게 아니다(…). (출처1, 출처2)
참고: 중세~근대 초기까지 쓰던 요강, 중세인들은 얼마나 더러웠을까
3.6 교육 및 학문적 측면
모든 엘리트들이 교회로 몰린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신학 이외의 학문이 탄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정도 과장된 이야기이다. 중세 교회는 지금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관대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문들이 신학 위주로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스콜라 학파가 있다.[25] 고대 그리스 철학의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권장되었으나 에피쿠로스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철학자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종종 폄하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의 입장과는 별개로 당시 지식인들의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인 면도 있었다.
한편 일부 교수의 경우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다르다는 이른바 '이중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충돌을 일으키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탄압받게 된다.[26]
서기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는 서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구와 수도원에 초등학교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1200년대 이후에는 공무원 등의 직종이 발전하면서 독해, 산술, 외국어 중심의 속인교육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1340년에는 피렌체의 여성을 포함한 총 인구 중 문맹자의 수가 60%로 감소하게 되었다. 이게 뭐가 대단하냐고 할 수 있는데, 대조적으로 1050년의 문맹률은 99%였으며(…) 그나마 그 1%라는 사람도 그냥 성직자들뿐이었다. 아니, 중세 초창기에는 그 성직자들마저도 글을 제대로 못읽었다. 미사 집전하다 성경 구절에서 막히니 '읽었다고 칩시다!'(...) 라고 말하고 미사를 이어나갔을 정도였으니. 그 시절에 비하면 정말 엄청나게 발전한거다.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등이 생긴 것도 바로 중세의 일이다. 특히 파리에서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마침 당대 최고라고 평가받던 논리학자이자 신학자 그리고 중세에 강림한 아가리 파이터 "피에르 아벨라르"가 교수진의 일원이었기에, 당시 파리 대학의 학구열은 엄청났다.
"파리 대학은 전세계를 위하여 빵을 굽는 오븐과 같다."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300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60여 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1350년에는 독일에만 25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며, 15세기 중반에는 비엔나, 하이델부르크, 쾰른 등지의 대학에 등록한 학생 수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대학생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그리고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의외로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국가가 정립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왕실 내외의 복잡한 법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인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 [27]
당시 대학교에서 그 외에 메이저 학과로 소문난 분야들은 라틴어, 고전문학, 유클리드 등의 그리스 수학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기 위한 커트라인은 최소 12세(!) 이상이었으며, 농민 출신이라 해도 다 받아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의 기회 자체가 상당히 균등하게 주어졌던 것. 다만, 이때의 대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교사들의 길드라는 이미지가 강한 편으로 교수는 장인, 학생의 경우 도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사립 학원.
중세의 대학교는 어두운 면도 갖고 있었는데 바로 학생들 상당수가 개망나니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항목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학생이나 교수나 꽤 막장이었다. 그외에도 학생들의 개망나니짓으로 대학이 위치하던 도시의 시민들과 분쟁이 일어나자 대학과 도시의 행정이 분리되었다.
그 외에도 중세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으며 지구 구형설을 조롱했다는 뿌리깊은 편견 및 고정관념도 있는데, 사실 중세인들은 지구가 명백히 둥글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알리기에리 단테, 로저 베이컨 등 수많은 중세 지식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들의 저술 속에 명백하게 남겨 놓았다. 최초로 플랫 에러를 퍼뜨린 주범(?)은 도리어 19세기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 그가 1828년에 저술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삶과 항해》에서 지구 평면설을 신봉하는 중세인의 이미지가 최초로 그려졌고, "과학의 발전을 탄압하는 반지성적 시대" 로서의 중세의 프레임을 원했던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것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것.
또한 연속성 논쟁 항목에서 보듯이 일부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들은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제로는 중세시대의 연구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기도 한다. 중세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뛰쳐나와 새로 과학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3.7 결론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세계 사학계에서의 대세는 중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세가 정말 좋은 시기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전까지 생각했던것 보다는 괜찮았던 시기라는 정도로 이해하는게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근대로 넘어간다고 하여 중세보다 확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종합하면 중세는 이전의 판단에서 암흑기로 간주했던 것보다는 나은 시대였고 근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살기 좋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문명은 그 때에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정도.
로마 제국 멸망의 포스는 가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수준이다. 보편제국 로마의 붕괴는 가히 우리가 현대에서 상상하는 인류 멸망 시나리오를 방불케한다. 기술, 문화, 교류의 붕괴, 군벌 형성, 해적 창궐 등, 인류 멸망 시나리오가 따로 없다. 실전 되어버린 상/하수도, 무역, 건축, 의료 등등등. [28]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도 보여준다. 중세는 마냥 망했어요인 시대가 아니라, 보편제국의 붕괴 후의 문명을 만들어나간 시대인 것이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조금씩 발전을 추구하려 한 시대가 중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혼란된 질서를 바로잡아 준 곳이 교황청과 로마 가톨릭교회였다.
3.8 기타
중세가 무작정 종교만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중세를 암흑기로만 아는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부당한 교회 지배에는 평민들이 반항하고 비판했으며 민란 등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았고 그 때마다 교회는 구색만이라도 자체 정화를 해야 했다. 교황권이 최전성기인 시기이긴 했지만, 왕권과 영주권을 너무 지나치게 무시한 견해이기도 하다.
비록 교황권이 강하던 시기였던건 맞지만 그 교황권도 교황이 세속적인 간섭을 너무 행한 나머지 줄어들었으며, 줄어든 교황권과 중앙집권화의 약화가 단적으로 나타난 사태가 바로 아비뇽 유수와 대립교황의 발생이다. 교황은 분명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중세세계의 질서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의 군소영주이기도 했다. 즉 중세에 교황권이 무작정 우위에 섰다는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되려 중세시대는 산업 혁명 시기와 비교했을때 노동시간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산업시대부터 가스등이나 전구가 사용되면서 야간에도 일을 하게 있게 된 것. 중세시대에 양초 같은건 비싼 물품이었고, 해 지면 일 못하는건 동서양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대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 먹고 날이 충분히 밝아지자마자 일을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했던 건 사실이지만 일주일에 일하는 날은 6일 정도 뿐이고(!) 휴가도 일요일을 제외하고도 1년에 8주 정도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또 중세 때는 공휴일 개념으로 기독교의 축일(부활대축일, 성탄대축일) 때도 쉬었다고 한다.
3.9 참조 자료
이 항목은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위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공신력 있는 자료들을 몇가지 소개한다. 서적의 경우 도서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네이버 지식 사전
[1]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2]
- 요한 하위징어 『중세의 가을』
- 자크 르 고프 『중세를 찾아서』, 『서양 중세 문명』 등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 에드워드 맥널 번즈 『서양 문명의 역사』
- 마시모 피글라우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中 미신에서 자연철학으로, 자연철학에서 현대과학으로
-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 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
- 페리 앤더슨, 『고대에서 봉건제 국가로의 이행』,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29]
- 『자연과학의 이해』
- 움베르트 에코(기획), 『중세』 시리즈[30]
- 서양 중세사
4 유럽 밖의 중세
'중세'의 비유럽사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유럽이 아닌 지역에 '중세'가 존재하였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는 애초에 시대구분론이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가 형성된 탓이 크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발전한 농노제도라는 경제시스템은 전세계 보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럽이라는 특수한 지역의 특수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하지만 제국주의 진영에서 사회진화론을 밀고,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마르크스의 5단계 발전설을 밀면서 엄청나게 긴 시간동안 이러한 설[31]이 퍼지게 된다.
대체적으로, 유럽 외부의 중세를 설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 고대에 확립되었던 중앙집권국가가 붕괴하거나 이런 관념이 유명무실화된다.
- 이에 따라 고대 제국의 부산물 격으로 성장하게 된 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이 대두되는 한편,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 국경 지대에서 이민족이 유입된다.
- 이로 인해 보편적인 하나의 관념으로 구성된 '세계' 내에서 다수의 국가가 존재하게 된다.
- 고대사회를 지탱했던 종교계에서도 갈등을 겪는데 주로 종파간의 대립이고 이 과정에서 둘은 절충되거나 융합된다.
- 이러한 혼란 속에서는 계층 구조가 혼란할 수밖에 없으므로, 고대의 획일적 계층 구조보다는 비교적 유연한 계층 구조가 형성된다.
- 이러한 중세적 구도는 통일 왕조가 재건되는 한편 권력의 틀을 벗어난 서민 문화가 성장하면서 붕괴하게 된다.
- (단,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와 같은 단계를 설정한 경우에만 해당. 그게 아니라면 얄짤 없이 근대 산업 혁명 이전[32]까지 중세에 포함시키기는 하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부터는 '근세' 등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에 집약적 산업의 발전으로 청대 이후에는 "동양 발 근대도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며 근대도 재정의하려는 시도도 있다. 어디까지나 시도까지만의 영역이지만.)
러시아의 경우, 중세란 표현 자체를 쓰지 않는다. 표트르 대제를 기준으로 그 전을 고대 러시아라고 부른다.
인도의 경우, 굽타 왕조가 에프탈의 침입으로 붕괴된 시기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아 무굴 제국에 의한 통합을 중세의 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중동의 경우 이슬람교의 등장 자체가 워낙 큰 전환점이다보니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9세기 경부터 분권적 질서가 나타났다가, 오스만 제국이 다시 한 번 통일 제국을 재건하게 되며 중세는 대체적으로 끝났다고 본다.
아시아권을 통합해서 등장한 것은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이다. 주로 사회주의[33] 쪽에서 주로 시작한 이 논쟁은 아시아의 특수성과 역사발전 단계이론이라는 단선적 발전사가 조화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다. 여기에 바르가, 칸토르비치, 비트포겔 등의 특수성 긍정론과 레닌의 국가론에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단선적 발전론이 충돌하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후 전개와 자세한 것은 외부링크 참고.
중국은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고, 서민 문화가 성장한 송은 근세로 보고 당나라 말기까지(보다 현대적인 시각) 혹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가 재건된 명대까지를 중세의 끝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후기 11세기에 등장한 장원공령제의 모습이 유럽의 장원제와 상당 부분 흡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시기부터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시대 이전까지를 중세로 파악하는 시각이 강하다.
한국사에서도 중세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학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는 상당한 떡밥이다. 근세를 제외한 3분법의 경우 고려와 개화기 이전의 조선을 합쳐 중세라고 일컫고 4분법의 경우에 임진왜란 이후를 근세로 보아 고려와 조선 전기를 중세로 일컫는 것이 우세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에 의한 암묵적 합의. 고려를 중세로 보는 시각은 대체로 동일하나 조선을 중세로 볼 것인지 근세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떡밥이었으며, 마르크스 사관에 기반한 민중사학에서는 중세의 기원을 신라의 삼국통일과 신문왕의 개혁으로, 심하게는 가야 멸망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34]. 또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하거나 가야 멸망을 중세의 기점으로 볼 경우 유럽의 중세 시기와 잘 일치된다는 것도 중세의 기원을 끌어올리는 여론이 세를 얻어가는 원인이다. 메이저인 서울대학교 쪽에서는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로 보는 경향이고 이에 대항하는 고려대학교 쪽에서는 한국사에서의 중세, 근세 개념을 아예 부정하고 왕조구분법으로 쓴다. 혹은 근세를 임진왜란 이후로 보기도 한다. 연세대학교는 중세를 중세Ⅰ, 중세Ⅱ로 나눠서 중세Ⅰ을 고려 시대, 중세Ⅱ를 조선 전기(임진왜란 전)로 보고 조선 후기(임진왜란 후)를 근대로 구분한다. 굳이 고려를 '중세'로 본다면 골품제를 없애버렸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라와 고려에 차이가 큰 것은 아니다. 신라는 중국적 요소를 흡수했고 우리가 잘 알듯이 그건 '고려'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는 서유럽 식으로 보면 다 이상한 방식이기는 하다. 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서유럽의 시대 구분론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본에서 에도 막부 시대를 설명하려고 '근대적 요소는 있는데 근대는 아니고(...) 그니까 근대의 근에 중세의 세 합해서 근세' 해서 나온 개념이고, 왕조별 구별에 대해서는 현재 부정적인 것이 일반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리 방법을 못찾았는지 근대 이전의 경우에는 고대와 중세라는 표현을 사실상[35] 배제하고 왕조구분론으로 교과서가 구성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사의 경우에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으로 구성된다.
5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양판소들이 대부분 중세같은 시대를 배경으로한다. 이 경우 십중팔구 기사와 마법이 등장한다. 결론은 그냥 중세에다가 뒷산에 용이 살고 이런 잡다한 설정을 조금씩 다르게 집어넣은 것. 그다지 중세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는 것 같다.
5.1 문학
유명한 작품들 위의 5개이다. 그외 다른 작품들은 양판소 다 넣으면 항목 분리해야하니 이정도만 표기바람.
추가바람
5.2 영화
그럼 여기에도 양판소가 있더냐?
5.3 게임
- 미디블2: 토탈 워
- 스트롱홀드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 크루세이더 킹즈
-
페이데이 2 - 문명온라인
- 식물 대 좀비 2
- 마운트 앤 블레이드
- 더 길드 2
- Shoppe Keep
- 엘더스크롤 시리즈[37]
- Anno 1404[38]
- 더 위쳐 시리즈
6 참고 항목
30년전쟁의 경우 에누리 없이 근세에 일어난 사건이다.[39]- ↑ 사실 배경보다는 모티브가 많다. 판타지는 무협물처럼 실제 역사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모티브를 따온 가상세계가 클리셰고, 역사물이 아닌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의 중세가 배경인 경우는 중세기반 가상의 세계보다 꽤 적은 편. 그래도 많은 판타지물이나 기사 얘기가 중세를 모델로 삼은 사실은 유명해서 중세하면 판타지를 떠올리긴 충분하다.
- ↑ 심지어 당시를 살아가던 농노나 평민들도 자기네 시대가 암흑과 같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중세시대 때 농노들이 불행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현대인 중심적인 관점이자 편견 및 고정관념이다.
- ↑ 하지만 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제국때 이룩한 효율적인 농경술의 상당부분을 상실하였다.
- ↑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커진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 때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중세에는 그런 거대 제국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던것. 물론 실제로 커지기도 했지만(...)
- ↑ 하지만 후기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극단적 기근이 찾아온다. 페스트와 더불어서 당시 유럽 인구의 태반을 날려버린 계기가 되는데, 전반적으로 남부와 중남부가 페스트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 위로는 대기근의 영향이 더 강했다. 심지어 영국 왕이 빵 걱정을 할 정도까지 간다. 르네상스 시대에 생산량이 줄어드는 2가지 이유는, 온도 하락과 함께 인구 격감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앞서 언급된 농업 기술력 발달이다.
- ↑ 부정하기도 어려운것이, 무역의 이상은 Win-Win이다. 자신과 상대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 함께 부유해지는것. 여기서 상대도 부유해진다부분을 용납못한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서로가 양보해서 각자 조금씩의 이익을 얻자는 쪽과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자는 쪽 중 단기적인 선택의 경우 어느쪽을 선택하게 될지는 명확하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상대도 하고 있다는 점과 상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점을 자신도 알고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하니 그냥 무역을 안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결국 내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보호무역이다.
- ↑ 참고로 이 당시 화폐 주조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왕이나 영주, 주교등 지배 계급이었다.
- ↑ 물론 이건 유럽 전역에서 다 때린 게 아니고, 화로는 러시아나 프랑스가 유명했고, 창문은 영국 등 각자 특유한 세금이 있었다. 그렇다고 평민들한테 매기는 징세과목은 결코 적다는 것은 아니다.
- ↑ 다른 사례로 왕이 사로잡혀 몸값을 내야 할 때엔 귀족들이 돈을 내어줘야 했는데 가끔 이게 무지막지한 액수라 도저히 일시불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일종의 세금 비슷한 것으로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 ↑ 사자심왕라거나!
- ↑ 나중에 가면 어느 나라든 아예 세금을 걷으려고 크고 작은 전쟁을 유지하거나 아예 전쟁 대비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는 경향이 생긴다. 전쟁을 핑계로 삼았으니 군대를 유지해야 하므로 상비군이 필요하고 세금을 효율적으로 거두려면 행정기구가 필요하니 관료제가 대두하면서 절대왕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괜히 백년전쟁을 거친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이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 아니다.
- ↑ 그런데 이건 어느 시대, 어느장소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까지도 만리장성 등의 유적의 석재등을 빼와 주변 주민의 주택을 짓는 일이 흔했다. 피라미드 역시 표면의 석재를 빼가서 현재의 계단형 모습이 형성된 것이고 콜로세움도 성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빼간 석재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 ↑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시골집들을 볼 수 있었다(...) 장 자크 상페의 풍자 만화
-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티는 단순한 유흥을 떠나 권력 확인의 수단이었다.
- ↑ 수프 같은 걸 먹을 땐 아예 그릇을 돌려가며 들이켰다고 한다. 물론 수저 따위 안 썼기에 막걸리 마시듯 사발을 양손으로 들고 먹었다. 그것도 귀족들이.
- ↑ 그것도 귀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장이나 다리 같은 잡다한 부위들.
- ↑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죽은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중세에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 일이 없진 않았을테지만, 근세에 벌어진 마녀사냥은 사람들이 단체로 마녀를 집중적으로 죽이는, 즉 학살에 가까운 마녀사냥이다. 일반적으로 마녀사냥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잔혹하게 치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근세 한정으로 잔혹하게 치러졌다.
- ↑ 중국의 포로 세뇌, 소련 KGB의 각종 고문 기법, 미국 CIA의 MK울트라 프로젝트 같은 예가 그것. 한국 안기부도 이와 관련해 소문이 많다.
- ↑ 참고로 말하자면 교무금 자체는 현대 가톨릭 교회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중세에 비해서 신자 개개인의 자율성에 많은 것을 의탁한다.
- ↑ 이건 기존의 의학을 범주화 시키고 개량시켰던 이슬람 의학에도 어느 정도 해당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도 치료법/약초 사전 편찬이나 흑사병 대유행 당시의 대처법을 보면 확실히 중세 서양의학보다 우월하긴 했다.
- ↑ 문제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돌팔이 시술을 얼마나 알아챌 수 있느냐이다. 그런 판단이 가능하게 하는 지식들이 중세에 부족했던 건 당연한 사실이다.
- ↑ 근거중심의학은 쉽게 말해 "이 치료법 진짜 효과 있냐?" 를 엄격하게 따진다. 플라시보를 걸러내는 것도 이들의 특징. 그런데 그 작용기전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서 어쨌든 치료효과를 보이는 대체의학이나 몇몇 치료방법을 용인하기는 좀 찜찜하지 않냐는 지적이 있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이 치료법 과학적 근거 있냐?" 를 따지는 과학중심의학이다.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그렇다.
- ↑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과 수도사 제외
- ↑ 정확히는 길거리 아무데나 버린건 아니고 그 근처에 패인 도랑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반드시 버리기 전에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규칙도 있었다.
- ↑ 물론,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에 의거한 관점이었다.
- ↑ 물론 여기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과학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 M.H.Shank 저작 참조.
- ↑ 로마 제국의 붕괴는 단순히 한 나라의 붕괴로 생각하면 안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UN과 미국이 사라지는 것 정도? 로마제국의 붕괴는 단순한 한 나라의 붕괴가 아닌 당시 유럽기준으로 모든것이 붕괴되는 시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 ↑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만큼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이 짙게 녹아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서유럽 외에 곧이 곧대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등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참고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서로 국내에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형이 바로 이 사람이다.
- ↑ 총 4권의 시리즈로 나올 예정이며, 현재 1권이 나온 상태이다. 수백명의 학자들이 참여한만큼 백과사전 식으로 빽빽히 구성되어 있으며 가격이 비싼게 아쉬운 점이다.
- ↑ 이 두가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대립은커녕 양립했고, 지금은 통합되었다고 봐야한다. 현대의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경제체제적 구분에서 '공산주의는 현대'라는 부분을 뺀 것이다.
- ↑ 현대 역사학에서 근대의 기점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발달이다.
- ↑ 애초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표현 자체가 마르크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 때문에 역사를 잘게 쪼개서 억지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되느냐 아니면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가도 되느냐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 ↑ 이것의 시초는 일본의 정체성론에 대항하려는 백남운 등 사회경제학파의 담론이다. 김석형 등의 학자는 아예 외거 노비를 농노와 유사한 단계로 파악해 중세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는데, 현재에는 많이 기가 죽은 이론이기는 하나 일본의 게닌(下人, 사무라이 계층에 딸린 예속적 농민)에 대한 재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 ↑ 여기서 사실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시대구분론으로서 '고대', '중세'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고대국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 단어가 시대구분으로서 고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대충 얼버무린 감이 있다.
- ↑ 설정상 우리가 아는 역사 이전 이야기이므로 따지자면 고대 이전 이야기다. 근데 묘사는 중세일뿐
- ↑ 엘더스크롤 세계관 내에 현실 중세 문명의 기술력과 문화가 비슷한 부분은 제 3시대와 제 4시대이다.
- ↑ 심히 르네상스처럼 보이지만 아직 시기상으로 백년전쟁이 한창 진행될 시기이니... 어차피 가상 세계이다.
- ↑ 다만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분류법을 쓸 경우 중세에 편입된다. 그런데 현재 대세는 고대-중세-근세-근대로 구분하는게 대세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