荻生徂徠(적생조래)
1666년 3월 21일 ~ 1728년 2월 28일
본명은 오규 나베마츠(荻生雙松)이고, 소라이는 그의 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본명보다는 호로 그를 더 많이 부른다.
1666년 에도에서 태어났다. 하야시 슈우사이와 하야시 호코에게 학문을 배웠지만 아버지가 그만 쇼군이 되기 직전의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에도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아버지가 에도에서 추방되자 할 수 없이 가족들은 에도를 떠나 카즈사국(오늘날의 지바현 중남부)의 혼노 마을(오늘날의 모바라시)로 이주해야 했다. 이곳에서 오규는 불경과 유교경전, 일본 고전들을 탐독했고 스스로도 이곳에서 자신의 학문적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692년, 아버지가 사면을 받고 에도 추방령이 풀리자 다시 에도로 돌아왔다. 조죠지(増上寺) 근처에 학당을 열었지만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가난한 생활을 했고 근처 두부가게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먹을 것을 주어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던 중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그를 발탁해 그의 측근으로 정치 고문 겸 야나기사와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를 통해 쇼군 츠나요시와도 만나게 되었고 츠나요시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츠나요시가 죽고 야나기사와도 실각하면서 그도 중앙 정계에서 멀어졌고 야나기사와 저택을 나와서 니혼바시 가야바쵸에 거처와 학당을 열었다. 이때에는 많은 제자들이 와서 소라이파라는 학파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노년인 1722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다시 그를 쇼군의 정치자문으로 삼았고 오규는 요시무네에게 추방령이 가혹하니 다른 관대한 형벌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해 받아들여졌다. 1728년 6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오규 사상의 특징은 반주자학으로 볼 수 있다. 현실론적 성격이 강했던 오규가 보기에는 주자학은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학설에 불과해보였던 것. 오규는 특히 주자학의 도덕, 윤리에 입각한 정치를 강하게 반대했고 정치는 도덕, 윤리와 분리되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런 오규의 사상이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추신구라 사건이다. 아코호번의 낭인 46인의 기라가 참살에 대해서 막부내에서는 이들의 처분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규의 스승인 하야시 호코를 비롯해 무로 큐소, 아사미 케이사이 등은 주자학적인 관점과 일본 전통적인 정서를 감안해서 주군에 충성을 다한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며 관대한 처분을 주장했다.
그러나 오규는 막부에 "소라이의 율서"라는 글을 올려서 이 사건을 충성과 의리를 다했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으면 천하의 법도는 서지 않게 된다. 이들이 사사로히 복수를 한 만큼 그 죄를 물어 할복시키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아코호번 낭인들의 처분을 고심하던 쇼군 츠나요시는 오규의 주장에 따라 할복을 명령하게 된다.
세간에선 오규의 어려웠던 젊은 시절과 아코호번 무사들을 할복시킨 일을 바탕으로 "소라이 두부"라는 만담이 에도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오규가 젊은 시절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두부가게에서 돈도 내지 않고 두부를 훔쳐먹다가 두부장수에게 걸렸지만, 두부장수는 그런 오규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후 에도 대화재로 오규를 도와주었던 두부장수가 가게를 잃고 어려운 처지가 되자 오규가 두부장수를 불러서 돈과 새 가게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두부장수는 오규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아코호번 낭인들을 할복하게 한 것 때문에 오규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오규는 "두부장수는 내가 두부를 훔쳐먹은 걸 관가에 넘기지 않고 출세 후에 갚으라며 정으로 내가 도둑이 되는 걸 막아주어 오늘날 학자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무사들에게 할복하라고 한 것은 학자로서 나도 최대한의 정을 그들에게 베푼 것이다. 그것은 두부장수가 내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법의 도리를 말한뒤 "무사가 화려하게 피어난 이상 아름답게 지게 해주는 것이 정이다. 무사의 대도는 적을 향해 쓰는 것이고 창칼은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서 무사의 도리를 설명하자 두부장수가 납득하면서 오규의 선의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 두부장수가 여러모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오규 소라이를 일본의 마키아벨리로 규정했다. 고대 중세의 정치가 정치와 종교, 도덕, 윤리가 결합된 형태였다면 근대는 이것이 분리 되는데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면서 정치의 분리를 강조한 것처럼 오규도 주자를 비판하면서 정치 분리를 강조한 것이 동일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현실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태도를 견지한 오규의 사상은 소라이학으로 불리며 조선에까지 전파되었는데 오규의 대표저서인 "논어징"은 1763년, 일본 통신사로 간 조엄이 가지고 와서 전래되었고 아예 서기 원중엄은 "오규 소라이 문집"을 가지고 들어왔다.
다산 정약용은 오규의 제자인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소라이 학을 접했다. 정약용은 처음에는 소라이학을 괴이한 논설로 생각했지만 소라이학을 깊이 탐독한 후 오규의 문체가 매우 찬란하다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논어 해설서인 "논어고금주"에 오규의 논어해석의 많은 부분을 수용했다. 정약용은 오규를 평가하면서 "이제 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조선을 훨씬 초월했으니 심히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오규가 소개되었지만 그의 저서는 나오지 않다가 2011년 1월에 오규의 대표적 저서인 "논어징"이 번역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