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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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학자들의 수장이며 스승

- 레오 13세, 「영원한 아버지」 13항

성 토마스가 집대성한 철학적, 신학적 종합은 교회와 온 인류의 건실하고 항구한 자산입니다.

- 요한 바오로 2세, 「위대한 기도」 1994년 3월 16일, 6항

1224년(1227년) 경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성(城)에서 출생, 1274년 3월 7일 교황령 포사노바에서 선종. 한국 가톨릭 공식 표기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지만, 사람에 따라 토마스 데 아퀴노, 도마 아퀴노, 토머스 아퀴나스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도미니코회 수사신부[1]로서 중세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 또한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토마스 학파의 창시자이며 교회학자 35명 중 하나로 이명은 천사 박사(Doctor Angelicus). 가톨릭과 성공회성인으로 축일은 1월 28일. 학자, 교수, 학생, 철학자, 서점 직원, 연필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네임드 뚱보. 뚱뚱해서 책상에 앉기 위해서는 책상에다가 그의 임산부스러운 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반원 모양의 홈을 파둬야 하는데 이 책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뚱뚱함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그레고어 멘델 신부의 체형을 표현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한데 그것보다 좀 덜 뚱뚱해"라고 할 정도.

다만 그가 뚱뚱하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다. 도미니코회 수도사제인 토마스 아미어러는 그의 저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원제: Thomas Aquinas Theologiam)>에서 "일반적으로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금발이고 머리가 약간 벗겨진 인물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참으로 비만하였는지[2], 또는 그가 과묵하였는지[3] 등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라며 설명한다.[4]

현대인 천재론 등에서 현대인과 그 당시 사람의 지적 수준을 비교할 때 쓰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동료 수사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얼마나 똑똑한지 소리를 내지 않고도 책을 읽을 수 있다." 하고 말했기 때문.[5]

여기에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그 당시에는 띄어쓰기와 대소문자 구분이 전혀 없었다. 즉 자신이 말한 걸 소리 그대로 받아적는 게 책이었다. 의미가 아닌 소리를 기록한 것이 책인데, 이걸 머리 속으로 읽는다는 건 저자의 의도와 책의 중심적 내용,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가능하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들의 특성상 띄어쓰기가 없다면 문장 하나는 물론이거니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6][7] 그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굇수의 기록을 읽고 이해한데다가 스콜라 철학을 정립하기까지 했으니 천재라는 걸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지식은 쌓여왔지만 자극에 대해 발전하는 뇌의 역량과 지능, 지혜는 현대와 중세의 차이가 있을수 없다.

영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를 수도원장으로 키우려고 했는데,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놈이 졸업하더니 갑자기 기대를 배신하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겠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포기하겠다는 얘긴데,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은 "이놈이 미쳤나" 하고는 중간에 납치해서 감금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러나 진중권미학 오디세이에 따르면, 가족들이 그를 감금할 때 정말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8] 내 아들을 베네딕도회로 보낼 수 없다면 차라리 타락시켜 버릴 테다 결국 가족들은 그 굳건한 신념에 두손 두발을 다 들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된다.[9][10]

파리에서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의 제자가 되어 지내다가 스승을 따라 쾰른으로 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수가 되기 위해 강사를 하러 파리로 돌아온다. 그 후 교수 자격을 취득해서 강의를 하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와 아나그니 오르비에토 사비나 수도원 등지에서 활약을 하던 중,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명령으로 리옹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길에 병에 걸려 선종한다.[11] 1323년 7월 18일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568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는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12] 그러나 이 같은 지적에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축했다고 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2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이성을 위하여 어떤 신앙 조목을 포기하는 것은 반역이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눈에는 신앙을 위해서 이성을 포기하는 것도 역시 반역이었다. 참으로 두 경우에 반역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인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앙토냉 세르티양주[13]

스콜라 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그리스도교 철학 사상 최대의 먼치킨.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가톨릭 철학의 양대 산맥이자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는 두 학자 중 하나. 주요 저서로는 《신학대전》, 《대이교도대전》, 《명제집 주석》이 있다. 그의 사상을 토미즘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조화시켰으며, 보나벤투라와 함께 스콜라 철학알파이자 오메가. 그 자신이 당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최고 전문가였다.[14] 전통적인 교부철학은 플라톤 및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당시에는 아랍권을 거쳐 최신 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는 유럽의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름이 아니라 '철학자'라는 대명사 자체로 호칭될 정도로 자연철학의 대가로 인식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한 자연철학적인 주제와 계시를 통한 신학적 가르침들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성적인 논리로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신학대전》.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인 구성, 주제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스콜라 철학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한 저서이다.

가톨릭적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이미 진보한 사람들만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놓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의 임무다.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여러분에게 젖을 먹여주었지 단단한 음식을 먹여주지 않았습니다."(1코린 3,1-2)라고 한 사도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이 저서에서 우리가 의도하는 것도 그리스도교에 속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합당한 방법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신학대전》 머리말 中

토마스 아퀴나스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책은 입문자용이라고 하는데, 황당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과 철학적 사유 때문에 아무리봐도 조롱으로 느껴진다(...) 어린아이에게 먹인게 평범한 젖이 아니라 마유주가 아니였을까? 오죽하면 라틴어로 된 원전을 통독하는 전공자가 드물다고 한다. 수백 페이지나 되는 책이 무려 100권이나 되는 것이 신학대전이므로, 교양 삼아 읽으려면 정리서를 읽는 편이 낫다근데 소위 인문학 전도사라 칭하는 이지성은 이걸 중2한테 추천했다. 내용 전부를 간명한 논리로 정리한 분량만 한글 기준 600페이지다. 원전을 다 읽으려다간 쉬지 않고 읽어도, 몇 달이나 지나간 뒤에 책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15][16] 독서광이자 중세에 대해 굉장히 박식하고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읽는 움베르토 에코도 그의 칼럼에서 '이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나 요약본을 만드는 사람들 뿐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다만 다른 칼럼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들을 읽으려면 몇 달은 필요하다'라고 언급한 걸 보면 다 읽긴 읽은 듯 하다.[17]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도 때도 없이 여행을 다닌 것으로도 유명한데, 저서의 분량이 상식적으로 여행다니면서 쓸 수 있는 분량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현대의 전공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행 중 비서에게 빠르게 구술하는 형식으로 작업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통해 이 말도 안 되는 작업량을 설명하려 한다. 구술 이론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서의 내용을 거의 쏟아내듯이(!) 읊었을 것이다. 신학대전 또한 혼자 모든 집필을 한 게 아니라 도와주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마치 현장법사가 다수의 불경을 번역한 방식과 비슷하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각광받았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논리를 주장한 '영민한 박사'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6~1308)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하느님을 이성의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선이라는 개념이 하느님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했으며, 이는 잠시나마 토마스 아퀴나스를 단죄받게 할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대 철학자 중에서 가장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지만 신학대전의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흥미롭다. 그는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끝마친 후에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이유를 묻자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18]라며 대답하였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ref>

물론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인적 체험이므로, 중세철학 전반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대부분의 저서는 신학적 논증을 위한 것이지만, 간명하고도 철저한 논리의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개인의 입장과 관계없이 논리적 훈련과 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증명하는 논증은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에서 깠다 [19] 하지만 군더더기를 줄이고 핵심만 넣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은 그 이후에 논증 전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아직도 귀감이 되고 있다. 동시에 핵심만 넣고도 100권 넘게 책을 쓰는 놈은 대체 뭘 이렇게 많이 쓴건지 궁금해져간다

신학대전의 각 세부 파트는 '질문'과 '해답'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앞에서는 주로 널리 퍼져 있는 논리를 다루고 뒤에서는 철저하게 그 논리를 공격하여 해답을 내놓는다. 이 전체 과정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필요하게 화려한 수식어 같은 것을 배제하고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의 전개의 연속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 서술만으로 100권을 채운 것이다. 신학대전은 궁극적으로 신학의 계시와 철학의 이성적 탐구를 조화시키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닥치고 믿으라는 등의 강요 같은 것은 일체 없다. 오히려 내용 자체는 중세 당대의 철학적 질문들과 삶의 의문들 또한 골고루 포함하고 있으며, 질문과 해답 편에서 드러나는 논리의 전개와 반박 구조 등이 대단히 치밀하기 때문에 중세 철학 전공자뿐 아니라 철학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대충 훑어보기라도 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철학에 대한 발언으로 유명한 "철학은 신학의 시녀와 같다"가 있다. 단, 오해를 하면 안되는게 아퀴나스는 이를 '철학은 신학의 따까리 존재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말을 한게 아니다. 해당 항목에서 나오는 것처럼 시녀는 결코 천하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주인을 섬겨야 하는 노예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아퀴나스의 의도는 신학이 철학보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바로 철학이라는 주장이다. 참고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토마스와 그의 스승인 알베르토가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빠였는지를 생각하면, 이 발언은 철학에 대한 옹호이면 옹호이지 폄하는 아니다.

단 토마스 아퀴나스가 철학과 종교를 진정으로 대등한 경지에서 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신학적 계시는 이미 진리로서 주어진 것이며,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이성을 올바로 발휘할수록 진리를 보다 잘 이해하고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 이성을 통한 진리의 탐구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존중하는 자세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 계열의 스콜라 학자들이 비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을 연구하고 경의를 표한 일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포일러는 당하지 않았지만 너무 머리가 좋아서 우주의 사건 전개를 대략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탁월한'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였는데, 이후로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서구철학계에서 신은 무엇보다도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나름 유행의 선도자.

3 다른 매체에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천국편 제10곡에 등장하여 태양천의 첫 번째 구성원을 소개하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칭송한 뒤 자신이 소속된 도미니코회가 타락했다고 개탄한다. 뒤이어 나타난 동료 수사이자 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가 보다 못해 도미니코회의 창설자인 성 도미니코에게 실드를 쳐준다. 여기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스승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사상이 전혀 달랐다. 보나벤투라 역시 둔스 스코투스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74으로 나온다. 시나리오 2, 시나리오 3에서 프랑스 소속으로 등장.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등장인물 올소라 아퀴나스의 이름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흔적이 있다.

  1. 남성 수도자를 수사, 여성 수도자를 수녀라고 한다. 수사 중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성직수사(수사신부, 수도사제라고도 함)와, 그렇지 않은 평수사가 있다. 한편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여성의 서품을 허용하지 않지만 성공회에서는 허용하여, 성공회 수녀들 중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2. 도미니코회수도복, 장기간에 걸친 과도한 작업, 잦은 여행 등에 비추어 볼 때, 거의 그럴 것 같지 않다.
  3. 여러 대작들을 동시에 구술할 수 있는 사변적 천품이라는 것이 이러한 선입견을 낳았을 것이다.
  4. 지금도 수도회는 청빈을 강조하지만, 아퀴나스 생전의 도미니코회사유재산이 없는건 기본이요, 끼니는 구걸로 해결하였다. 동시에 아퀴나스는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며 다녔는데, 상식적으로 볼때 이런 사람이 뚱뚱한건 말이 안된다. 아퀴나스가 그 정도로 뚱뚱하였다면, 진작에 "도미니코회 회원이 뭐 이래요?"라며 고발당하여 갈려나갔을 것이다. 그는 결코 뚱보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뚱보를 뜻하게 되었다.
  5. 당시에는 책을 읽을 때 소리내서 읽는 것이 원칙이었다.
  6.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복잡한 관현악 악보를 보고 머리속에서 그 음악이 재생되는 수준이다.
  7. 책 속의 내용이 모두 이런식으로 적혀 있었다고 보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
  8. 일설에는 여자가 적극적으로 성인을 유혹하려 했는데 그가 난로에 넣어두는 불쏘시개를 들이밀며 "나가지 않으면 이걸로 너를 지지겠다"(...)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9. 베네딕토회도미니코회나 같은 수도회인데 왜 가족들이 반대했냐 하면, 지금이야 도미니코회가 전통과 명성이 있지만 아퀴나스의 시대 때 도미니코회는 이제 막 생긴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미니코회는 청빈 수도회이므로 대토지를 소유하지도 않고, 사유재산도 없다. 부모 된 입장에서 뒷골 땡겼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 참고로 도미니코회는 설교자 수도회라고 불릴 정도로 설교를 중시하는데, 이러한 성격은 아퀴나스의 취향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톰이라는 이름과 설교 때문에 묘하게 어마금이 떠오른다. 애초에 신학대전 자체가 어떤 수사의 설교목록이지만 또한 도미니코회는 지금도 아퀴나스를 최고의 자랑 중 하나로 여긴다. 요컨대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 덕에 최고의 신학자가 될 수 있었고, 도미니코회 역시 아퀴나스 덕에 가톨릭 신학의 최고봉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상부상조, 시너지 효과
  11. 당대의 성인 신앙인 성인의 유해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믿음 때문에 시신이 갈갈이 찢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12. 일반적으로 시성되려면 기적이 일어났음을 최소한 2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성인 참고
  13. 프랑스의 신스콜라 신학자로, 파리의 가톨릭 대학 철학 교수를 역임했다.
  14.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오늘날 붙어 있는 챕터 제목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주한 그대로이다! 그래서 최신 연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을 배제하고 원전 자체에 접근하고자 할 때 특히 그렇다.
  15. 이런 정신나간 분량 때문인지, 서양 고전에 대한 번역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일본에서도 라틴어-일본어 대역으로 전체를 번역하는 것은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일본이 그리스도교 신자 수가 적은 국가이지만, 신학대전이 중세 철학을 집대성한 책이라는걸 감안하면 얼마나 괴랄한 분량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16. 한국에서는 서강대학교 정의채(서강대의 학교 재단인 예수회 소속의 사제이며, 몬시뇰이기도 한, 한국 천주교의 저명한 원로 신학자임) 교수를 중심으로 라틴어-한국어 대역으로 전체 번역을 시도하였는데, 1985년에 1권이 나오고도 2016년에도 아직 완결이 안되었다(...) 가장 최근의 성과물이 2013년의 12권이었다. 그런데 비그리스도교권 국가 중 이런 번역을 시도라도 하는 게 최초의 일이었고, 1994년에 당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격려와 축복의 말을 서신에 담아 보냈다. 그리고 당시 주한 교황대사였던 조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는 그 서한을 전달하며 "제가 아는 한, 교회 역사에서 교황이 개인적 번역 작업에 직접 간곡한 말씀과 축복을 내리는 서한을 전달한 일은 처음입니다."라고 말했다.
  17. 그래도 아예 못 읽을 책은 아니다. 이 항목에서 겁을 주고는 있지만, 애초에 신학대전은 소설책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책이 아니다. 오늘날의 백과사전이나 가톨릭 교리서처럼 필요한 부분을 그때그때 찾아서 읽는 책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부분들은 굉장히 간결한 언어로 되어있기에 난해하지도 않다. 한국어 번역에서 한자어가 많은게 흠이지만, 그것만 잘 극복하면 된다. 특히 아퀴나스의 문체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화려한 수사어구를 생략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이 역시도 독해의 난이도를 낮춘다. 다만 수사어구의 화려함을 포기한 덕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체보다는 간지가 덜한 편.
  18. Weisheipl, Friar Thomas d' Aquino, p321(이재룡 옮김, 489쪽)에 인용되어 있는 굴리엘모 토코의 증언.
  19. 물론 굳이 리처드 도킨스까지 갈 것도 없이 중세 후기만 가도 심심하면 철학자들이 까면서 노는 게 제1 동인으로서의 신 증명이었다. 누가 더 독창적으로 까느냐(...)의 대결이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