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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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테러 후 박살이 난 연방 정부 건물.

Oklahoma City bombing

1 개요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앨프리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에 가해진 폭탄 테러. 9.11 테러 이전 미국 국내에서 일어난 테러 중 가장 인명피해가 컸던 폭탄 테러이다.

테러를 일으킨 티머시 맥베이와 공범 테리 니컬스[1], 마이클 포티어는 군 훈련소 동기로 주범 맥베이는 걸프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받은 경험도 있었다. 이들은 연방정부가 권력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는 절대 악이라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총기 소지, 민병대 조직에 대해 찬성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 후 웨이코 참사에서 연방정부가 벌인 대규모 진압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은 1994년부터 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를 목표로 잡고 테러를 위한 사전답사를 벌였다. 이들은 연방정부청사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다른 지역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하기 위해 벽면 대부분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주차장이 자리잡은 연방청사 북쪽을 목표로 설정했다.

1995년 4월 19일 웨이코 참사가 벌어진 날을 기념해서 테러를 일으키기로 결심한 티모시 멕베이는 동료들이 구해온 2200kg이 넘는 질산암모늄 비료와 니트로메탄과 경유를 트럭에 싣고 연방정부청사로 향했다. 그 후 트럭을 연방정부청사 주차장에 세워둔 뒤 미리 준비해둔 도주 차량을 타고 빠져나갔다. 그리고 오전 9시 2분에 기폭장치의 타이머가 끝이 나면서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있었던 일본에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난지 한 달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세계는 또 다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2 피해

폭발의 위력은 매우 강해서 폭발한 자리에는 폭 9m, 깊이 2m의 구덩이가 파였고 수 km 떨어진 곳의 지진계에서도 리히터 규모 3.0의 지진이 감지될 정도였다. 폭발로 일어난 바람이 연방정부청사 유리창을 전부 날려버렸고 건물의 3분의 1이 붕괴되었다. 그 외에도 반경 16블록내에 있던 건물들이 폭발의 위력으로 파괴되거나 유리창이 깨졌다. 그 외에도 차량 80대가 폭발로 불에 타면서 2차 폭발이 일어나 피해가 더 커졌다.

인명 피해도 상당해서 168명이 사망하고 68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중 99명이 연방 건물 직원이었고 연방청사 내에는 탁아소도 있었기 때문에 19명의 어린이 희생자도 나왔다. 맥베이는 체포된 뒤에 테러 당시 폭발 지점 인근에 보육시설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고 증언했으나, 한편으로 웨이코 참사 때에도 여자와 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해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한편 FBI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그가 당시 범행장소 근처에 보육시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무시하고 테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폭발 후 소방관이 부상을 입은 Baylee Almon(1994.04.18~1995.04.19)을 안아 든 사진이 유명한데 이 사진은 1996년 퓰리처상을 받았다.[2] 사진 속의 아기는 부상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이송된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아기가 사망한 바로 전날은 그 아기의 첫 번째 생일이었다.

테러 전 테리 니콜스와 티머시 멕베이의 대화를 보면 이들은 이 폭발로 사망하는 소방관이나 여타 공무원을 스타워즈스톰 트루퍼정도로 생각한 듯 하다. 악의 제국에 충성했으니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는 식. 참고로 스타워즈 드립은 실제로 티머시 멕베이가 언급한 것이다(...)

3 처벌

대형 참사를 일으킨 티머시 맥베이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체포되었는데 주 경찰이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중, 번호판이 없는 차를 보고 차를 돌려 세워서 검문하는 도중에, 주위에 불법 무기를 발견하여 체포하였다.

맥베이는 군 출신인데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는데 "연방정부는 악이지만 주 정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3] 덕분에 처음 체포한 경찰들은 맥베이가 폭탄 테러를 일으킨 범인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고 마약단속에 대한 보복[4]이나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을 일으킨 테러조직들의 후속 테러 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곧 그가 테러의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후 테리 니콜스와 마이클 포티어 역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티머시 멕베이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유명한 문구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먹어야 한다[5]'가 인쇄되어 있었고 재판 과정에서도 티머시 멕베이는 본인의 행위가 미국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는 식으로 변호를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법정이 내린 결론은 티모시 멕베이와 그 일당은 '자신의 비뚤어진 신념에 빠져 무고한 사람 수백명을 죽고 다치게 한 전형적인 테러리스트'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법원은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쳐 주범이자 테러 실행자인 티머시 맥베이에게는 사형, 공범이자 테러 모의 및 준비에만 가담한 테리 니콜스에게는 희생자 한 명당 1회로 총 168회 종신형을 중복 선고[6]. 역시 비슷한 범죄를 지었으나 죄를 인정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한 마이클 포티어는 법정에서 협력한 점을 고려하면서도 죄질이 너무 나쁜 점을 들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이후 2001년 6월 11일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폐쇄회로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주범 멕베이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여담으로, 특이하게도, 마지막 식사로 2파인트 분량의 민트 아이스크림만을 주문했다.

이 사형은 비록 참관인이 희생자들의 유족들로 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1936년 이후 65년만에 처음 집행된 공개처형이었고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38년만에 처음 집행된 사형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한 일반적인 사형 집행 관행과 달리 이례적으로 1심 선고 4년 만에 아주 신속하게 이뤄진 점도 논란이 되었다. 사형 반대론자들은 맥베이가 사형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테러를 저지르고 순순히 체포되기까지 한 점 등을 들어 사형제도가 정말 사형이 마땅하다고 인정될 만큼 죄질이 나쁘고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범죄 예방 효과가 없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맥베이가 사형을 당하던 날 연방 교도소 사형장 밖에서는 사형집행을 환영하는 집회와 규탄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사형 확정 이후에도 전혀 반성하는 태도가 없었던 맥베이는 사형 집행 직전에야 기존의 태도를 바꿔 테러 당시 사망한 유아나 일반 직원 등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는 뒤늦게나마 유감의 표현을 남기는 등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본질적인 책임은 연방정부에 있으며 연방 정부가 악이라는 생각만큼은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으며 이를 보여주듯이 사형 집행전 유서로서 윌리엄 헨리의 시 '인빅투스[7]'를 써서 남겼다. 이 시는 '나는 내 운명의 주인[8]'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다.

4 테러 이후

오클라호마 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연방청사에 대한 경비 강화와 건물 설계 변경 등을 지시했다. 이 대처로 비슷한 테러 시도가 수 차례 있었지만 전부 저지당했다. 연방정부청사는 헐려 나가 추모 공원이 생겼고 지금도 추모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득세하던 미국 극우 및 반연방주의 진영도 큰 타격을 입어 아이러니 하게도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 까지는 그 세력이 위축되어 있었고 지금도 오클라호마 테러 이전의 위세를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사고를 치는 자들은 존재하게 마련이라 간혹 잊을만 하면 일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인종주의 증오범죄 혹은 반연방 테러 시도가 벌어지고 있으며 미국 정부는 이들을 잡는 족족 종신형 혹은 징역 몇십, 몇백년의 중형을 때려 테리 니콜스와 마찬가지로 1급 교도소에 집어넣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테러리스트'하면 까무잡잡하고 야만적인 아랍인만을 연상하던 미국인에게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심지어 미국을 위해 참전하기까지 한 백인'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남겼고 후에 집필된 티머시 멕베이의 평전 역시 <미국인 테러리스트[9]>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한편, R&B 그룹 Color Me Badd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Remember when>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5 테러범들의 근황

2013년 6월 현재 테리 니콜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10] ADX 플로렌스 교도소[11]에서 엄중한 감시 하에 복역중에 있으며 마이클 포티어는 사법부에 적극 협력한 점이 인정되어[12] 12년형을 받고 2006년에 출소하였으며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현재는 사법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어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다.[13]

한편 위키피디아에 나온 테리 니콜스의 근황에 의하면 그는 지금도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꾸준히 재심 청구를 하고 있는데 2005년에 테러와 관련 멕베이를 적극적으로 도운 제3의 인물이 있다는 주장을 하며 재심을 청구하기도 했으나 증거가 없어 기각당한 바 있으며, 이후에도 맥베이와 관련 잊을만 하면 그럴듯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주장을 늘어놓으며[14] 재심을 청구하고 있다고 한다.
  1. 티모시 멕베이, 테리 니콜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2. 해당 사진의 수상자 찰스 포터 기자는 "명예롭지만, 파티와 샴페인으로 축하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I'm honored to win, but this is not necessarily the time for parties and celebrations and champagne bottles)라며 소감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3. 실제로 미국에는 연방정부가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자로 연방정부를 절대악 그 자체로 본다. 주로 보수성향이 강한 남부에 많다. 레드넥 항목 참조.
  4. 청사 내에 마약단속국 사무실도 있었다
  5.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6. 이후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죽을 때까지 못 나올 예정이다
  7. Invictus
  8. I am the master of my fate
  9. American Terrorist
  10. 정확히는 피살자 한 명당 한 건씩 계산하여 총 161회에 걸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지만 사실상 한번이나 100번이나 죽을 때까지 깨끗한 지옥에 가둬두는건 동일하기에 큰 의미는 없다. 물론 의미가 아주 없는건 아니고, 한 종신형이 유기징역으로 감형되도 다른게 남아있으니 계속 잡아둘수 있지만 이놈은 애초에 감형의 여지도 없다.
  11. supermax 등급의 교도소로 미국내 최강의 보안을 가진 교도소이며, 주로 테러범이나 스파이, 범죄조직 두목등이 수감된다
  12. 실제로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범죄에 대한 처벌이 엄격한 대신 사법부에 협력하는 등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 제공이나 유죄 협상을 한 자들에게 의외로 관대한 처벌이 내려지곤 한다. 찰스 맨슨이 벌인 연쇄살인행각에 가담한 린다 카사비앙의 경우는 다른 가담자 3명과 맨슨이 사형을 받는 와중에도 아예 기소가 면제되었으며 제러드 크루즈 사건에 가담한 성인 6명도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대로 아동 집단 성폭행이라는 사상 초유의 범죄에 대한 처벌에 걸맞지 않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3. 이 때문에 영문 위키에서도 그의 근황은 출소 이후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질 경우 그의 배신으로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된데다 자칫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에 놓인 테리 니콜스가 모종의 수를 쓸 수도 있는데다(미국 사법부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외부와의 연결이 거의 불가능한 플로렌스 1급 교도소에 가둬놓은 거지만) 맥베이 일당에게 호의적인 다른 극우주의자들의 테러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4. 주로 티모시 멕베이의 역할을 강조하거나(이미 죽은 상황이라 반박을 못하니까) 제3의 공범이 있다고 말하는 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는 주장이다. 받아들여질 경우 형량이 다소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