おたあジュリア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양한 조선 아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참고로 쥬리아는 세례명인 율리아의 일본식 발음이다. 조선에서의 행적, 본명 등은 일체 불명. 임진왜란 때 유키나가가 그녀를 입양해 그의 처한테서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당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가톨릭이 금지되자 섬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에도 고니시 가에서 배운 약학 지식을 살려 환자를 간호하는 등 신앙 생활과 봉사를 계속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가톨릭을 믿는 재일교포들은 그녀를 많이 존경하고 있다. 절두산 성지에 그녀의 무덤으로 알려진 코즈시마 섬의 무덤의 흙을 떠와 만든 그녀의 무덤이 있었으나, 후에 그녀가 코즈시마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철거되었다.
1871년에 청나라에서 출판된 '관광일본'[1]에 따르면 조선의 왕족 출신이라는 듯한 저술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알 길은 없다. 애초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들이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자신이 잡은 포로를 왕족으로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