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1 설명
조선 시대에 완전히 정립된 일종의 귀족과 같은 지배계층.
일반적으로 말하는 귀족 체계에 비해서 유동적인 계층으로, 양반에 포함되고 퇴출되고는 수시로 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한정된 용어로 알기 쉽지만, 고려시대에도 개념은 있었다.
본래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북쪽에는 왕이 앉고,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남쪽에는 남반이라는 궁내 실무직들이 앉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중 남반은 조선시대에 들어 사라졌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兩)반이 된 것. 초기에는 현직 관리들만이 양반이었지만 그 자손들이 계속 이어서 벼슬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면서 나중에는 조상 중에 관리가 있으면 양반이라고 불렸다. 조선 후기 들어 신분 질서가 문란해지기 전까지는 3대 이내에 벼슬 한 사람이 있어야 사회에서 양반 집안으로 쳐줬다. 괜히 한미한 가문에서 진사시, 생원시에 목숨 건 게 아니다.
서양의 귀족들과 달리,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양반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 특히 혐오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러한 혐오적인 스탠스가 피로 피를 씻으며 왕정과 신분제를 몰아낸 프랑스보다 더 심하다. 진짜 양반 계층이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양반이라는 단어가 가벼운 욕설에 가까운 뉘앙스로 사용되기도 한다.
2 양반의 붕괴
초기에는 약 5% 미만의 집권세력으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조선시대 호적에서 유학호로 기재된 것을 양반으로 잘못 파악하여 생긴 오해[1]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2], 경북 풍기군[3],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충청남북도와 경상북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 북부 지역(안동, 예천, 영주, 청송 등)을 '양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러한 인구비율과 관련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과거에는 조선을 삼국시대 수준의 극단적인 신분제 사회로 해석하여, 상민은 글을 못 배우게 했다느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았다느니, 양반이 상민을 재미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고, 글을 아는 상민은 역적이 될 놈이라고 처참하게 죽였다는 둥 황당한 묘사가 많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민이나 남의 노비는 물론이고 자기 소유의 노비를 함부로 죽였을때도 관청의 조사를 받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돈 많은 상민[4], 천민에게 멸시를 당하는 몰락 양반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러한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리었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글공부한 걸 바탕으로 서당의 훈장이 되거나,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를 써주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체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결국 돈과 관직 그리고 가문이 진정한 신분을 좌지우지 했다.
지금와서 과거에 진짜로 자기네 조상들이 양반임을 확신할수 있는 사람들은 몇몇 유명한 가문의 종가집 사람들 뿐일듯. 아님 유명 가문이지만 희귀한 성씨거나. 유림에서는 족보 및 호주제까지도 전통이자 자랑이라고 하지만, 대중적으로 잊혀지는 상황이다.[5]
일제강점기 시대만 해도 양반 의식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가치가 멸시를 당하면서[6] 양반 의식은 그 뿌리를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인구이동과 전국민의 거지화가 일어나고 양반의 전통은 완전히 붕괴 및 파괴됐다. 만약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근대 소설을 보더라도 일제 때 양반이란 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만큼 인도의 카스트 제도만큼은 아니더라도 요즘의 학벌과 같이 약간의 계급의식과 차별이 잔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3 현재
현재에는 그저 남에 대한 존칭… 이지만 미묘한 감이 있다. 가령 자주 쓰이는 예문으로 '에라 이 양반아'가 있는데, 이는 존칭이기 보단 '놈'이라는 단어보단 그냥 듣기 덜 기분나쁘기에 부르는 듯 하다. 영감과 비슷한 사례. 자기 손아래 사람에게 '에라 이 양반아'라는 말과 '에라 이 놈아'라고 불러보자. 반응이 꽤 다를 것이다. 친한 사람끼리 장난삼아 서로 부를때는 그리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서는 놈이라는 말 또한 시비조나 심지어 욕설이 된다.
이외에도 점잖은 사람을 비유할 때나 어떠한 상황보다 낫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 단어인데도 뜻이 완전히 정반대인 경우다. '차라리 양반'이라는 말을 쓰는데 못마땅할 때 그나마 낫다는 의미이지 완전한 칭찬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치중립적인 지칭어나 친근함이나 호의를 담은 존칭으로도 쓰이곤 한다.
4 기타
선비와도 관련이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는 극단적인 캐릭터상을 보여주거나 하지만 대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한 주인공의 돈줄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양반은 특권 중 하나로서 제사[7]를 지낼 수 있었다. 제사는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절이었다. 양반은 조선후기에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8] 양반은 4대 이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임금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이를 불천위제사라고 불렀다. 불천위제사를 많이 모시는 가문일수록 명문가로 명망이 높았다. 참고로 조선의 왕족은 양반보다 한 단계 더 뛰어나서 대에 상관없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한단계 더 뛰어나서 하늘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9]
제사에는 봉사대수라는 것이 있는데 쉽게 말해 몇 대 조상까지 제사를 모실 수 있나였는데 원래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조상의 대수가 달랐으나 후기로 갈수록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4대까지 지내게 되었다.##
상민 역시 1대까지는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구휼 정책 중에 돈이 없어서 제사를 못 지내는 양민들을 지원하기가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러한 제사는 양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서양 귀족들이 자기들을 차별화할 때 고상한 언어와 깍듯한 에티켓, 복장 등으로 구분한 것과 같이 조선의 양반은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준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배푸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했던것. 그리고 그 정점에 제사가 있었다.
복잡한 제사 절차와 화려한 제삿상. 우리가 아는 제사는 바로 주자가례에 따른 제사이자 양반층의 제사로 제사는 양반만 지내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완벽히 숙지하고, 온갖 화려한 음식을 상에 차리는 건 당시 평민들은 하기 힘들다. 따라서 당시 양반의 제사는 그저 고인을 추모하는 것 뿐만이 아닌 온 고을의 소문거리로 아예 기안이라고 해서 마을 내의 양반들의 제사를 모아 놓은 달력도 있을 정도.
양반들은 이 복잡하고 화려한 제사 행위를 지내는 걸 과시해서 자신의 지위를 각인시키고 동류에게 인정받았고, 평민들은 그 제사에서 음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제삿상을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제사용이다 보니 정성이 들어가고 고기나 물고기, 과일, 적전, 한과 등 귀한 음식들이었고, 양반집에서 먹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았으니 양반들은 민심을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심 좋게 나눠준 경우도 많았던것.
이러면서 점점 과시를 위해 제사 음식은 더 많고 화려해지고 절차도 복잡화되어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란 명목으로 모여서 서로 그 제삿밥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제삿상을 차린 집은 일종의 카페 역할도 어느정도 했다.
양반에 관한 역사학 이론 중 조선이 완전한 신분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10] 그 주장은 양반과 고관대직이 세습되지 않으며 단지 양반의 경우 권세와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편히 할 수 있었고 때문에 유학을 공부하며 관직에 진출하기 쉬워 기득권층을 계속해서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저도 흔할 정도였다. 그리고 순조때 시작된 세도정치 시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성씨만 과거에 합격하는게 여러 사람에 걸쳐서 폐단으로 지적되었으나 끝끝내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지역차별과 겹쳐져 조선 최대의 민란으로 부를 수 있는 홍경래의 난까지 불러왔을 정도니...
5 관련 항목
- ↑ 유학호의 일부는 양반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 중 압도적 다수는 '양인'일 것이다. 고시생은 많아도 합격자는 적듯이.
- ↑ 현 천안시 동부
- ↑ 현 영주시 북서부
- ↑ 특히 상인 출신
- ↑ 호주제 철폐를 두고, 방송토론에 나와 "호주제가 사라지면 인구 절반이 쌍놈이다"라는 괴이한 논리를 들먹이던 유림 측의 노인도 나왔다. 그러나 방송토론에 나온 방청객 누구도 귀담아듣지않고 다들 웃으면서 "그래서요?" 이런 반응이었다. 비슷한 노인 방청객이 "지금이 조선시대인 줄 알고 시대를 모르고 사는 논리군요?" 라고 인터뷰하자 유림 노인이 홀로 흥분했을 뿐.
- ↑ 심지어 친일 세력조차도 초기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 선 매국노들을 빼면 재능 있는 상민 출신들이 거의 70%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당장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거나 밀정 노릇을 한 자들의 상당수들은 가진 거 없이 태어나 친일을 해서라도 먹고 살려고 했던 일반 평민들이다. 물론 이는 문화 통치가 본격화하면서 일제가 독립 움직임을 막고 피지배층 사이의 싸움으로 만들려고 한국인에게도 기회를 준다는 핑계로 일부러 의도한 측면도 있다.
- ↑ 제사에 관한 디테일한 내용은 주자가례참조.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사대부가 되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 법이 제정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묘를 설치해서 조상을 모시라는 것.
- ↑ 조선초기에는 양반이어도 고위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면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 ↑ 중국의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천제를 지낼 수 없었고, 신라도 비슷한 이유로 삼국사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불교/무속/도교적인 형식을 빌려 제석천을 모시는 절을 짓고 불교식 재를 올린다든지, 국가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국조 제사시 간접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식 천제를 지내기는 했다
- ↑ 미야지마 히로시, 「호적대장에 나타나는 사람들 ;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42,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