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의 역대 황제 | |||||
6대 성종 야율문수노 | ← | 7대 흥종 야율지골 | → | 8대 도종 야율사랄 |
묘호 | 흥종(興宗) | |
시호 | 신성효장황제(神聖孝章皇帝) | |
연호 | 경복(景福, 1031년 6월 ~ 1032년 11월) 중희(重熙, 1032년 11월 ~ 1054년 8월) | |
성 | 거란어 | 야율(耶律) |
휘 | 거란어 | 지골(只骨) |
중국어 | 종진(宗眞) | |
생몰기간 | 1016년 4월 3일 ~ 1055년 8월 28일 | |
재위기간 | 1031년 6월 25일 ~ 1055년 8월 28일 |
역대제왕묘 배향자 |
성종의 장남으로 궁녀 소누근(흠애황후로 추존)의 소생이었지만 성종의 정비 인덕황후에게 친자식과 다를 바 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021년, 6세의 나이에 황태자가 되었고 1031년 아버지 성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흥종의 생모 소누근은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잡았고, 자신의 호위병 풍가노로 하여금 북부 재상 소착복과 인덕황후의 형제 소필적을 무고하게 했다. 흥종은 인덕황후에 대한 효심이 지극해서 그녀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지만 흠애왕후는 인덕황후를 상경(현재 내몽골 자치구)으로 내쫓고 사람을 보내 억지로 자결하게 했다. 1034년 흠애왕후는 아들인 흥종을 폐하고 다른 아들을 왕위로 세우려 했지만 흥종은 이것을 미리 알고 어머니를 귀양보냈다. 이처럼 흥종의 치세부터 요나라는 내란이 끊이질 않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부는 부패하였고 군대는 흩어졌다.
흥종은 서하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북송과도 교전하였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높은 세금을 내야 했고 그는 불교를 내세우며 사치에 빠졌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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