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종

요의 역대 황제
7대 흥종 야율지골8대 도종 야율사랄9대 천조제 야율아과
묘호도종(道宗)
시호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
연호청령(淸寧, 1055년 8월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태강(太康, 1075년 ~ 1084년)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 1월)
거란어야율(耶律)
거란어사랄(查剌)
중국어홍기(洪基)
생몰기간1032년 9월 14일 ~ 1101년 2월 12일(70세)
재위기간1055년 8월 28일 ~ 1101년 2월 12일(45년 6개월)
역대제왕묘 배향자

요나라 제8대 황제로 이름은 야율사랄(耶律查剌)으로 중국식으로는 야율홍기(耶律洪基). 흥종의 장남으로 일찌감치 황태자로 책봉되어 조정의 정치에 참여했으며 1055년 아버지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초기에는 권농, 흥학, 구재 등에 노력했으나, 불교에 빠져 탑을 마구 건설하고 시주에 거액의 국비를 사용했다. 이처럼 정치를 돌보지 않아서 신권이 강화되었으며 야율을신과 친한 재상 장효걸의 참언을 믿고 태자 야율준의 생모 의덕황후에게 자살을 명했다. 야율을신은 이후 자신과 가까운 후궁을 황후로 세우고 권력을 강화했다. 거기다 야율을신은 황태자 야율준을 무고해서 유폐시키게 하고 사람을 보내 암살했다.

그러나 도종은 야율준이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말년에는 태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해져 태자의 아들 야율아과를 황태손으로 삼았다. 또 도종은 야율을신의 간악함을 알게 되자 야율을신은 황태손을 해치려다가 주살되었다. 이 때부터 황태손의 지위가 안정되고 황권이 안정되었다. 1101년, 도종이 행궁에서 70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황태손이 뒤를 이었다.

50년 가까이 재위한 요성종에 못지 않게 오래 재위했으나 존재감은 희미하다. 게다가 도종의 치세에는 황제의 어리석음과 간신의 전권에 의해 충신이 억압받았으며 정치가 엉망이 되었다. 또 토지 겸병이 민중의 불만을 샀으며 동북방의 여진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여진의 강성함은 그의 사후 30년도 되지 않아 요나라의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요나라 말기의 암군.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며 본인이 직접 화엄경찬을 저술했다

김용의 작품 천룡팔부에서는 요나라의 황제로 등장한다. 반란을 진압한 소봉에게 남원대왕의 작위와 영지를 주고 후대하나, 송나라와의 전쟁을 극구만류하는 소봉을 옥에 가두고 출병한다. 의형제들의 도움으로 탈출한 소봉이 도종을 납치하여 설득하려 하지만 도종이 소봉이 반심이 있지 않나 의심하자 소봉은 요와 송의 평화를 바랄뿐 다른 뜻은 없다고 밝히고 스스로 자결, 결국 크게 후회하고 군대를 회군하여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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