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일기

1 개요

龍蛇日記. 조선시대 임진왜란기에 저술된 전쟁일기로 총 두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2 이노(李魯)의 용사일기

2.1 개요

조선 선조 23년, 1590년부터 동왕 30년인 1597년까지 약 8년여간 송암 이노(李魯, 1544∼1598)가 쓴 전쟁일기. 현재 친필로 쓴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목판은 철성이씨문중의 목판고인 함휘각(含輝閣)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목판본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2.2 내용

용사난중일기(龍蛇亂中日記)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막료(幕僚)였던 의병장 이노가 전쟁기의 혼란한 와중에 8년여간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여 남긴 일기이다. 초유사 김성일의 활동, 당시 경상우도 의병, 관군, 그리고 백성들의 활동 내역이 매일의 일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임진년 4월 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약 15개월간의 초반 전쟁상황이 매우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용사일기 원본은 선조 23년인 1590년에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의 부사(副使)로서 일본에 사행(使行)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1598년[1] 4월 진주(晉州)에서 병사, 고향인 안동에 이장되기까지의 8년여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판의 경우 후손인 당혁(當赫)이 만든 것으로 1592년부터 1597까지 6년여간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2.3 바깥고리

2.4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

이 목판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송암 이노(1544∼1598)가 쓴 전쟁일기를 새긴 것이다.

이노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선조 24년(1591)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와 함께 김성일 휘하로 들어가 의병을 모으는 등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뒤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선조 30년(1597)에 『용사일기』를 완성하였으며, 그 이듬해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는 선조 25년(1592)에서 선조 30년(1597)까지의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동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조 39년(1763)에 후손 이당혁에 의해 비로소 간행되어 유포되었다. 처음에는 서문 2매, 본문 74매, 장계 7매, 발문 5매 등 총 88매로 제작되었으나, 상당부분 훼손되고 잃어버려 현재는 약 40여판이 함휘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이순신의『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3 도세순(都世純)의 용사일기

3.1 개요

성주(星州) 도(都)씨 14세손인 도세순(都世純)이 자신이 18살이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 4월 13일부터 1595년 1월 15일까지 약 2년 10개월간 쓴 피란일기.

3.2 내용

경북 성주의 도씨 가문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던 일기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8살 청년이던 도세순이 그의 일가 친척 40여 명과 함께 고향인 경북 성주군 운정리 개터마을을 떠나 인근의 여러 산속에 숨어 지냈고, 이어 경북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문예촌, 합천군 율곡면 두사리, 군위군 의흥면 등을 전전하며 파란만장한 피란생활을 하며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왜적의 살육을 피해 멀리 도망가라는 부모의 눈물 어린 조언, 온 가족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모습, 어린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등 평범한 청년의 눈으로 본 임진년 전쟁의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3.3 바깥고리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에서는 1593년이라 되어있으나 오기로 보인다. 이노가 진주에서 사망한 년도는 분명히 1598년이다. 1593년엔 김성일과 함양에서 만나 도처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어 창의하도록 하고 군량을 모으고, 그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하였으며,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일본과의 화의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던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