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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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如松 (Lǐ Rúsòng, 리루쑹)
1549? ~ 1598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군.

1 명의 장수

이 이르기를,

"이여송(李如松)은 명장인가?"

"이성량(李成梁)의 아들로 천하의 명장입니다. 영하(靈夏)를 정벌할 때에 그의 아버지 성량의 권한이 너무 중하여지자 성량을 불러서 북경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하게 되자 영하후(靈夏侯)로 봉해져서 지위가 아버지 위에 있게 되고 천하 대총병(天下大總兵)이 되어 13총병이 모두 이여송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33권 중-

5대조인 이영(李英)은 평안도 초산 사람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정착하여 후손이 이성량~이여송으로 이어진다.[1] 이성량도 명나라 장수이다. 조상이 조선 출신이니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거 없었다. 이여송은 철저한 중국인으로서 조선을 가벼이 여겼다. 실제로도 행적을 보면 독으로 독을 제압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여송과 그의 군사들도 일본군 못지 않게 조선 백성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기울어 가던 명나라에서 제독 직급으로 복무하였으며 요동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난을 평정하여 명성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영하(寧夏)에서 벌어진 보바이금말의 난(발배의 난)[2]을 진압할 당시, 반란군의 우주방어로 명군이 6개월간 진압하지 못했던 성을 수공을 이용해 3개월만에 제압하는 등 당시 명군에서 촉망받는 유능한 장수였다.[3]

2 임진왜란 파병

보바이의 난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급보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의 만력제는 명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돕는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왜군의 정확한 규모와 전력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조승훈을 보내 3천 병력을 이끌고 왜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평양성에서 왜군의 매복 기습에 보기 좋게 깨지고 돌아왔고, 왜군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명은 이여송이 이끄는 4만 2천 병력을 파병하기로 한다. 요동경략 송응창과 함께 이여송은 조선을 돕기 위해 출발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그를 선조는 버선발로 마중했고, 조선 조정은 가뭄에 단비가 내린듯 상기되었다. 명의 대병력이 단숨에 왜군을 쓸어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겨울 내내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전세를 관망하며 미적댔고,[4] 이에 빡친 조선의 대신들이 당장 공격할 것을 종용한 끝에 1593년이 되어서야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

3 평양성 탈환

적장은 보아라! 우리가 한 번 거사하면 너희를 모두 섬멸키에 충분하나,

차마 인명을 모두 해할 수 없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니, 너는 여러 제장을 거느리고

속히 원문으로 나와 나의 분부를 받들라!

연광정 토굴로 피신하여 저항하는 고니시에게 이여송이 유시한 말

남하한 명군은 만여 명의 조선군 지원과 함께 도합 5만 병력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며, 평양성에 죽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들과 격돌했다. 초기의 섣부른 공격으로 공세 초기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 등 잠시 삐걱거리긴 했지만, 이여송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성을 함락할수 있다고 판단, 신중한 작전을 계획했다.

이여송은 명군이 보유했던 모든 화포를 평양성에 쏟아 부음과 동시에 병력을 전개시켰고, 일본군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병력이 많았던 조명 연합군은 우세를 점할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여송의 직속부대인 요동기병(한족, 몽골인, 여진족 혼성부대로 질이 낮았다. 주축은 여진 및 몽골기병)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절강등지에서 파견된 남병, 즉 척계광 등의 대 왜구 훈련을 받은 보병들이 대활약했다. 척계광의 병법은 3수병 체계로 조총을 쏘는 사수, 을 쏘는 궁수 그리고 이들을 근접 엄호하는 을 다루는 장창수가 있었으며, 조선군이 일본의 장창에 대응하지 못해 전부 찔려서 죽을 때 압도적인 위용으로 일본 장창수 및 철포대를 제압했다. 일본은 조총만 있었지, 대포는 없었으며 명군이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홍이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홍이포가 쏟아지니(...)

평양성의 일부 성채는 함락했으나 고니시군은 남은 성채에 모여 방어를 강화하자 협상으로 포위망을 풀어주고 일본군은 철수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여송은 평양 탈환전에서 일본군 1만 8천명 중 1만 2천명을 격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평양성과 임진왜란 전체의 명군 전과에는 자기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선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도 섞여 있었다.[5] 이러한 일 때문에 평양 쪽에서는 대 중국 감정이 무지 안좋아졌다. 평양 외에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여서, 야사에서 이여송이 대차게 까이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6]

평양성이 탈환되자 선조와 조선 조정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고,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계속 추격하며 2주 후에는 개성을 탈환했다.

4 벽제관 전투 및 이후 행보

그렇게 일본군을 섬멸하고 신나게 추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병력을 포함한 왜군 상당수가 재집결하고 있다는걸 간과하게 된다. 왜군을 추격하던 명군 기보병 9000명은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평양성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화포가 없었던 명군은 일본군과 뒤엉킨 개싸움을 시작한다. 이 와중에 위기에 빠진 이여송을 부관 이유성이 목숨을 바쳐 구해내기도 했다.

정오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양측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명군에게 개활지에서 조총 사격을 퍼부었으며, 명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다가오는 명군 본대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본군은 해가 진 후 한성으로 물러났고, 2500여명의 피해를 입은 명군 역시 진격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이여송은 자신의 직속부대인 요동기병 다수를 잃고 무력감에 빠진다.[7]

이후 이여송은 이 쯤에서 더이상의 피해를 막고 적당히 일본과 타협하여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고, 조명 연합군 전체에 더 이상의 왜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눌러앉은 명군은 조선에서 식량을 현지 조달(이라 쓰고 약탈이라 읽는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조선의 민간에게 크나큰 부담과 고통을 주게 된다. 결국 그는 이후의 명군 민폐전설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듣게 된다. 오죽하면 류성룡임진왜란을 상세한 기록한 책자 징비록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얼레빗보다 더 촘촘한 참빗이라고 호되게 씹었다. 징비록을 보면 류성룡이 이여송에게 제발 진격을 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하는데 그 노력이 눈물날 지경. 실제로 군량 문제 때문에 이여송이 류성룡을 꾸짖자 그만 류성룡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여송도 이 꼴을 보고 민망하긴 했는지 부하 장수들에게 '너희들은 전에 나와 함께 서하 지역을 정벌할 때는 여러날 굶고도 참고 공을 세웠다. 그런데 조선에 와서 며칠 군량이 없다고 벌써 돌아가자고 하냐?'라고 갈궜다.

5 죽음

그렇게 이여송은 별다른 전투 없이 조선에서 허송하다가 유정(劉綎)에게 조선 주둔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한 후, 1597년 요동총병관이 되어 북쪽으로부터 침공해온 토만[8][9]이 이끄는 차하르부를 제압하기 위해 내몽골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1598년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숲 주변을 정찰하던 중 수천의 차하르부 병력에게 포위되었고, 탈출에 실패하여 붙잡힌 뒤 살해되었다. 이때 평양에서 하던 짓(민간인 학살 이후 전공 꾸미기)을 또다시 벌이다 잡혀서 거꾸로 매달려 목이 잘렸다고 한다.

6 가족 및 후손

  • 동생 이여매(李 如梅) : 심하 전투에서 전사했다.
  • 이성룡(李成龍) : 이여매의 손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 아들 이성충(李性忠) : 이자성의 난 때 죽었다.
  • 손자 이응인(李應仁) : 이성충이 죽자 조선으로 피신했다. 망명했다.

이여송은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인 금씨(琴氏) 성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였다. 이여송이 명나라로 돌아가고 몇달 뒤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천근(李天根)이라 한다. 청나라에서 명나라 유민 쇄환 요구가 오자 거제도에 숨어 살았고, 이들의 후손이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다.

한편 이여송의 손자와 이여매(이여송의 아우)의 손자 역시 훗날 조선에 정착했는데 이들의 후손이 농서 이씨이다.

7 기타

이여송의 부하인 낙상지는 조선에 제독검이라는 검법을 소개했고, 이 검법은 훗날 조선의 무예신보와 무예보통지에 등재되었다.

접빈사로 나온 이덕형에 대해서 아내와 성이 같다니 이거 순 짐승 아냐?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명과 조선의 문화차이를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조선에서는 성씨도 성씨지만 본적을 따지는 편인데 중국은 집성촌이 발달한데다 성씨는 같아도 본적이 다르다는 개념이 없었다. 즉 이여송이 보인 태도는 가까운 친인척끼리 결혼한거냐는 것. (조선에서도 숙종 시기에 본관이 달라도 같은 성씨면 혼인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에 본래 성씨가 다른데 공을 세워서 왕실의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식으로 이항복이 이야기를 꾸몄고, 이 말을 들은 이여송이 오히려 이덕형을 존중하게 했다는 식의 일화도 있다. 국성을 하사받는다는 건 대단한 충신이란 뜻이기 때문.

이익성호사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여송이 선조에게 아주 귀한 음식이라며 '계두'라는 계수나무에 사는 벌레를 선물했고 당연히 선조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이후 선조는 명 장수들에게 문어 요리를 보냈는데 문어에 익숙하지 않은 북방 출신 장수들이 난처해하며 감히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우화인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소설 임진록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선 문어 요리가 아니라 산낙지로 나온다.

그외에 아우인 이여백도 장수였으나 형인 이여송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다. 안습. 되려 조선시대 소설에서 이여백이 조선에 와서 죽어 원혼이 떠돌아다니는 설정(사실은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안 죽고 명에 가서 죽었기에 이건 허구다)으로 나왔을 정도.

8 야사

전국 각지에서 이여송과 관련된 야사와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

첫째로는 쇠말뚝 전설이다. 이여송은 풍수에 능했는데, 조선의 지세를 보고 작은 나라에 명당이 쓸데없이 많으며,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 명을 위협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말뚝을 수시로 박았다는 전설. 전국방방곡곡에서 우리 동네 뒷산에 이여송이 말뚝을 박고 튀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것과 관련되서 가장 유명한 야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백두산 일대에서 명장이 태어나는 명당을 보고 못을 박았고, 전후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 이성량에게 이 일을 자랑스레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이성량이 그곳은 조선에 살던 옛 조상이 묻혔던 곳이며 네가 그 맥을 끊었으니 우리 집안은 이제 망했다며 통곡을 하는 것이다.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어 결국 이여송은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형제들 역시 제 명에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미륵불이 중국을 안 좋게 본다고 그 머리를 자르는 문화재 파괴행위를 많이 저질렀다고 왜놈이나 똑같은 자라고 엄청 안 좋게 전해진다.

이여송이 등장하는 야사들

이여송 쇠말뚝 전설은 물론 민중이 오해를 한 것에 불과하다. 숙영지 등을 만들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후, 이를 남겨둔 채 떠나간 것을 보고서 "지맥을 끊으려 했다"고 가뜩이나 미운 명군과 이여송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운 것. 그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일제나 미군 등이 와서 쇠말뚝을 박을 때마다 똑같은 오해를 하고 비슷한 야사를 만들었다. 이 이여송 쇠말뚝은 이런 전설에 있어서 일종의 프로토 타입인 셈이고, 한국인이 쇠말뚝을 실생활에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쇠말뚝이 풍수가 어쩌구 정기를 어쩌구 하는 얘기를 신봉하는, 16세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9 매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임진록 2에서는 명 진영의 영웅 중 한명으로 등장하며, 기병이 없는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말을 타고 다녀 기동성이 우월하다. 거기다 강력한 기본 능력치와 연옥술 스킬로 명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영웅이다. 일본이나 조선 입장에서는 이여송 개객기 소리가 절로 나온다. 참고로 임진록 2 초기에는 연옥술이 없는 대신, 생산 건물이 군사연구소가 아니라 병부성이라 더 초반부터 나왔다.

  1. 이 부분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 차용한 듯.
  2. 보바이의 난, 임진왜란, 양응룡의 난을 만력삼대정이라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만력제를 참고.
  3. 이시기 명은 만력중흥 당시 군사력 증강을 통한 북로남왜의 화 극복을 통해 군사력에 상당히 자신감이 있는 상태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정규군 자체는 막장이라 그걸 해결하기 위해 주요 장수들이 가정이라는 사병을 육성했다는 점이다. 대병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면서 결정타는 가정이 먹이는 게 일반적이었고, 반대로 가정이 전멸하거나 큰 피해를 입으면 전투력은 급감하게 된다.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그렇게 소극적으로 변한 것이나 명군이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4. 단, 조선의 보급 문제로 군마들이 상당히 많이 좋지 않은 상태가 되거나 죽었음을 감안하고 식량 보급 문제도 겪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5. 사실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일본군이나 이런 문제는 회피하기 힘들었다. 원균만 봐도 같은 조선인을 학살(...)
  6. 이 때문에 평양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탑승해 있던 중국인 화폐감정인 이팔용이 탈출한 후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워낙 시기도 많이 차이가 나고, 이팔용 말고도 말레이시아인 및 미국인 개신교 목사 토머스까지 죄다 백성들이 죽였기에 특별히 중국인만 미워했던 건 아니다. 알다시피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 상선으로 마구잡이 포격을 가해 조선 백성을 여럿 살상해서 분노를 일으켰었다.
  7. 이후에는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는 한 편, 용산의 왜군군량창고의 위치를 알아내고 부총병관 사대수에게 그곳을 불태우라고 명한다.
  8. 이 토만이라는 인물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쪽 자료들을 보면 차하르 몽골의 대칸인 투멘칸을 말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당시 투멘칸은 살아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 토만이 단순히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투멘칸의 아들인 보얀칸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단순히 몽골의 군사 체계인 투멘(土門. 다른 말로는 만호萬戶. 투멘칸과 한자는 다르지만 몽골어 발음이 같다)의 장을 부르는 것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9. 참고로 인터넷에는 이여송이 토번에게 죽었다고 잘못 알려진 자료가 많은데 이여송은 당시 요동총병이었다. 고로 절대 서쪽에 있는 토번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