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왕

위만조선의 역대 국왕
위만 (1대)3대 우거왕 우거위만조선 멸망
왕호우거왕(右渠王)
우거(右渠)
생몰년? ~ BCE 108년 6월
재위기간? ~ BCE 108년 6월

1 개요

위만조선의 3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며 고조선마지막 왕이다. 이름은 우거(右渠).

할아버지는 위만이나 아버지, 형제, 부인의 이름은 알수가 없다. 안습 그의 아들은 장항(長降)만 알려져 있다. 《한서》에는 장강(長降)으로 표기되었다. 또 《사기》 후자연표(侯者年表)에는 장로(張路)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장(長)이 본래 이름이고 장로는 투항한 후에 부여 받은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2 생애

BCE 2세기에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에 오른 위만의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차지하여 예, 맥과 남쪽의 진한과 나라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동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고. 우거는 이 때 즉위하여 중국에서 몰려오는 망명자를 받아들이고 남쪽의 진나라가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교역할 때 반드시 고조선을 통해서 하게 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에 한나라는 BCE 109년 섭하를 보내 달래려 했으나 우거왕을 달래지 못했다(...). 아무런 성과없이 무재배 돌아가게 된 섭하는 처벌이 두려워 패수에서 배웅을 나온 위만조선의 비왕(裨王)(작호로 보임) 장(長)을 죽였다. 그러고는 돌아와서는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뻥을 쳤다.[1] 이에 분노한 우거왕은 군사를 보내 섭하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고조선 정벌을 명했다(기원전 109년).

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수륙병진으로 조선을 공격케 하였다. 이에 고조선군은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대항했고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왕검성(王儉城)을 공격하자 이를 격파하고 좌장군 순체(荀彘)의 수군을 패수 서쪽에서 저지하였다. 고조선의 강력한 저항에 놀란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 우거와 교섭하였고 우거가 태자를 한나라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전쟁이 종결되나 싶었으나 위산과 순체가 태자가 거느린 호위대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이에 태자가 불응하여 되돌아옴으로써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나라군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포위하였으나 왕검성의 수비는 튼튼했다. 더군다나 이 때 순체와 양복이 내분을 일으키는 병크를 터뜨렸기 때문에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순체가 양복을 잡아 가두고 승리함으로써 군대를 통합하는데 성공하면서 왕검성 공격에 박차를 가하였고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임을 느낀 고조선의 대신들은 우거왕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했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부했고 이에 일부 대신들은 한나라에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尼谿相) 삼(參)이 보낸 자객에 의해 우거왕이 살해당했고 이후 왕위는 공석인 것으로 보인다.(얼마 안되는 기간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왕검성 전투 항목 참조.

3 사망 이후

왕검성은 대신 성기(成己)의 지휘 아래 계속 항전하였으나 순체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회유시켜 성기를 죽임으로써 위만조선은 1년 간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내분으로 인해 8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참고로 장항은 애초에 '사기에 장(長)이라고만 되어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장항(長降)이라 기록된 것이 없다. 이름이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라고 되어있고 뒤에는 "長"이라고만 되어 있다. 첫 문장을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과 항복한 상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장(長)이 맞고 애초에 한서가 사기를 본따 지어진 것이기에 장(長)이라 보는 게 낫다.
  1. 이에 한무제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 작위를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