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

  • 과거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중국에서는 가짜 나라란 의미를 담아 '위만(僞滿)'이라 부른다.
위만조선의 역대 국왕
준왕(기자조선)1대 위만우거왕 (3대)
왕호미상 / 위만왕(衛滿王)
위만(衛滿)
생몰년? ~ ?
재위기간? ~ ?

1 개요

위만조선의 건국자이자 초대 국왕.

2 설명

위만(衛滿)은 위만조선의 초대국왕으로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열었다. 보통 여기까지 고조선으로 친다. 원래 일연삼국유사는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조선이란 말을 쓴거지만.

기원전 195년경, 전(前漢)의 왕(燕王) 노관(盧綰)이 모반하여 흉노로 달아나자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위만은 준왕에게 서쪽의 번병(藩屛)이 되기를 청하였고 준왕은 이에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서쪽 변방을 지키면서 연의 망명한 무리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기원전 194년 무렵에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 스스로 조선이 되었고 위만조선을 열었다.

위만은 철제무기로 무장한 병력과 재물을 이용해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복속시켜 고조선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이후 동방의 패자로 군림하게 하였다. 이후 위만조선은 전한과 남쪽의 진(辰)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였다. 영토를 넓히는 것까지는 전한이 눈감았지만 중계무역때문에 마찰이 생긴다. 예를 들면 진의 쌀 1가마니가 1만원이면 위만조선이 1만원에 곡식을 사고 전한에 다시 5만~10만까지 올려 값비싸게 팔았다. 이것이 80년이나 지속되었으니 한 무제가 분노 하지만 전쟁은 피하고 싶어선지 대신 BC128년 위만조선 근방에 창해군을 설치한다. 창해군은 실효성이 없어져서 3년 뒤에 폐지된다. 위만조선은 3대 우거왕 대에 나라가 강성해지자, 진번과 진국이 한과 직접 교역하는 걸 막은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나라가 사신 섭하를 보냈지만 우거왕은 무역로 막는 걸 풀라는 한무제의 명령을 거부한다. 공을 못 세운 사신 섭하는 패수에서 비왕 장을 죽이고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된다. 우거왕은 군사를 보내 요동 동부도위를 습격하고 섭하를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육군 5만,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포위했으나 1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후 내분으로 부하들이 우거왕을 살해하고 항복한다.

위만조선의 시작과 함께 전성기와 멸망이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위만조선의 등장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고대 한국의 선진 정치집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이들이 통일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존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수 있다.

2.1 위만의 출신에 대한 의문

기록이 된 모든 사서에선 그가 연(燕)나라 출신이라고 전한다.

위만이 조선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그 증거라는게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 한 줄 뿐이라서 투항할 때 조선에서 안 받아줄 거 같으니까 훼이크 부린 거라는 얘기도 있다. 사기를 보면 기자나 위만이나 중국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저 상투 틀었다는 한 줄 덕에 국사책에서 삭제되는 일은 면했고, 과거에는 연나라 출신의 조선인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후 현재에 들어서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의견은 공식 학계에선 많이 수그러든 편이다. 다만 중국 유이민 세력 출신이나 이전부터 고조선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형태가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위만의 국적 문제는 위만조선 정권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제 때의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위만이 중국인이므로 위만조선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유지했고 그 전부터 존재하던 정치체제를 유지했고 왕검성을 그대로 수도로 둠으로써 기존의 국가정체성을 그대로 계승 및 유지했으므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 보는 시각은 매우 잘못된 것. 그렇게 친다면 싱가포르도 중국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정치적인 권력을 쥐고 있으니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말도 맞는소리가 되며, 필리핀[1]이나 태국[2]도 중국계가 통치하거나 통치한 적이 있으니까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소리도 맞는 말이 된다.

물론 민족주의와 혈통적 관점을 넘어서서 보면 이천년 전 존재했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혈통과(그것도 어짜피 쭉 이어져온 것도 아니지만) 연관이 있건 없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결론은, 위만은 고조선으로 귀화한 중국인이다.

학계에선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계승, 유지했고 중국계 지배층과 고조선의 토착 지배층의 연합 정권적 성격을 가졌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위만의 출신이 조선이 아니라 연나라인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길 필요도, 숨길 필요도 없다. 베트남에서의 조타사섭이나 이집트에서의 무하마드 알리권투선수 말고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생각해보자. 오히려 위만이 들고 온 당대의 선진문물이 우리 민족의 문화로 재창조 된 것을 생각하면 고마운 존재라 할 수 있다.

3 현(現)중국에서의 관점

古代卫氏朝鲜的建立者.

公元前二世纪初,辽东局势动荡,燕人卫满率千余人叛西汉入箕子朝鲜, 箕子朝鲜准王任命其为博士, 将其国西部封地百余里与卫满. 公元前194年卫满联合箕子朝鲜的部分反对国君的势力进攻国都王俭城,准王自海路亡命于半岛南部的马韩地区,卫满即位后,卫满统一了箕子朝鲜,并将势力扩展到了鸭绿江以南地区.设立了裨王、相、大臣、将军等官职,完善了古朝鲜的政治体制。
고대 위씨조선의 건국자
기원전 2세기 초 요동에 세를 가지고 활동하였던 연나라인 위만은 약 천여명을 이끌고 기자조선에 입성한다. 기자조선의 준왕이 그를 박사에 임명, 나라의 서부 백여리를 위만에게 봉한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기자조선과의 연합을 반대하여 왕도 왕검성으로 진공, 준왕은 바다를 통하여 반도 남부의 마한 지역으로 망명한다.

卫满即位后,积极建立国家,并输入中原文化,使国家愈来愈强盛。汉武帝有感卫满朝鲜对汉朝的威胁愈来愈大,决定在公元前109年起兵远征朝鲜半岛。公元前108年,卫满朝鲜被灭,汉武帝把卫满朝鲜的国土分为四郡,分别为:乐浪郡、玄菟郡、真番郡、临屯郡,合称为“汉四郡”。
위만이 즉위 후, 위만은 기자조선을 통일하고, 그 세력은 압록강 이남 지역에 도달하였다. 비왕, 상, 대신, 장군 등 관직을 설립하고, 고조선의 정치체제를 완성하였다. 위만 즉위 후 적극적으로 국가를 건립하며 중화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국가는 점차 강력하게 되어갔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한조에 위협된다고 생각하고는(혹은 유감을 가지고), 기원전 109년 병사를 일으켜 조선반도에 원정을 결정한다. 108년 위만조선을 파멸했고 한무제는 위만조선의 국토를 4군으로 분할하였다, 분별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 일명 한사군이다.

古朝鲜即箕子朝鲜和卫满朝鲜的合称。箕子朝鲜乃殷商遗裔在朝鲜半岛上所建地方政权,臣于周,后又臣于秦,为周秦海外之属国。箕子朝鲜为卫氏朝鲜所取代,卫氏朝鲜为汉之“外臣”、属国。汉武帝伐朝鲜,裂其地为四郡,为汉的边疆辖区。有了箕子朝鲜,方有卫氏朝鲜,方有汉之四郡,方有高句丽史、渤海史,从而构成了东北古史、东北民族与疆域史的基本系列,而箕子朝鲜是为中国东北史之开端。
고조선, 즉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이르는 이름. 기자조선처럼 은나라의 후예(혹은 후손)로 조선반도에 세워진 지방 정권이다. 주나라의 신하국 또한 진나라의 신하국, 즉 주-진나라의 해외속국이다. 기자조선처럼 위씨조선 역시 이어받아(신하국), 위씨조선은 한나라의 외신, 속국이다. 한무제가 조선을 벌하고, 그 땅을 4군으로 분열시켰으며, 한나라의 해구변경이 된다.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나라의 사군, 고구려 역사, 발해역사, 모두 동북고사로부터 구성된다. 동북미족의 강역사의 기초계통이며, 또한 기자조선은 중국동북역사, 동북민족의 강역역사의 기초계열이며 기자조선은 중국동북사의 시작이다.

출처: 중국 바이두 백과 위만.(2012년 6월 24일자)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위만과 그의 위만조선은 기자조선과 함께 중국의 속국이자 중국 동북고사의 시작점으로 칭하고 있으며, 완벽히 중국 사람으로 왜곡하고 있다. 우리 나라처럼 국적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은, 주, 진, 한 4국의 속국으로 정의하여 고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위치 지었으며, 고구려와 발해 역시 기자와 위만 두 사람의 등장으로 중국동북사의 기틀로 만들었다.

조선 항목에서의 역사 역시, 삼국시대 부분에서 고구려를 이와 같은 이치로 중국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 편에서 더욱 직설적인데, 중국사의 의의 등이 적혀져 있으므로, 한 눈에 알 수 있다.

4 기타

조선시대 때, 조선은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제사는 지냈으나 위만에 대한 제사는 지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찬탈자였기 때문이다. 찔리냐[3]

네이버 웹툰 천국의 신화 6부 주인공이 위만이다.

  1. 국부인 호세 리살부터가 중국계이며 마르코스 일가와 아키노 일가도 중국계다. 물론 당사자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2. 탁신 총리가 중국계였고, 비단 그뿐만 아니라도 태국인 자체가 원래 중국에 살다가 현재의 태국으로 이민 와서 정착한 종족이었다.
  3. 조선의 경우 일단 형식 자체는 고려의 왕위를 양위받은 이성계가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물론 형식으로 '양위' 어쩌고하는 그런 걸로 수식하는거지 본질은 역사에서 수두룩했던 왕위찬탈과 별 다를바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