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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스 농구단은 2001년부터 기아 농구단의 새 주인이 되며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원이 없던 부산을 떠나 새 연고지로 울산을 정했다.
창단 첫 해에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마지막 멤버였던 강동희-김영만 등 원래 기아의 주축 선수들과 박수교 감독을 그대로 안고 가며 시즌을 맞이했으나 하필이면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모비스 농구단은 감독이었던 박수교를 해임하고 새로운 감독을 물색했는데, 하필이면 데려온 감독이 프로에선 전혀 검증되지 않은 최희암이었다.
최희암은 연세대학교 감독 시절에는 꽤나 명성을 날렸으나 프로에서는 한번도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던 것. 최희암은 모비스와 계약하는 조건 중 코치 선임을 자신이 결정한다는 조항을 고집했고, 결국 이 조항은 엄청난 평지풍파를 예고하게 된다.
최희암은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입맛에 맞는 농구 지향과 리빌딩을 위해 프런트와 짝짜꿍하며 자신의 인맥 심기 및 기존 기아 왕조의 주축 선수들을 대폭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의 시작으로 KCC 농구단에서 기술 고문을 하던 72세의 고령인 이우재를 코치로 영입했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신의 대학 제자인 박승일을 전격적으로 코치로 임명했다. 그 후 1999-2000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여 전년도까지 모비스에서 코치를 하고 있던 김유택 코치와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으며(사실상 내쫓은 셈), 김유택 코치는 모교인 명지고등학교에서 감독을 맡게 되었다.
강동희, 김영만 역시 최희암과 프런트의 데스노트 살생부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김영만의 경우는 "나 연봉 자진해서 삭감할 테니 팀에만 좀 남게 해주셈" 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구단은 쌩깠으며, 강동희 역시 최희암과 편먹고 자신을 퇴물 취급하는 구단 프런트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특히 강동희의 경우는 기존에 기아 농구단과 FA 계약을 맺을 때 은퇴 후 유학+코치직 보장이라는 2가지 옵션을 제시받았고, 강동희는 이것을 기분 좋게 수락하며 새로운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팀이 바뀌어 버리고 새로 부임한 프런트는 유학+코치진 보장? 그딴게 어딨어? 기아는 기아고 모비스는 모비스거던? 라고 기존의 계약을 부정하며 대폭 삭감된 연봉을 제시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역시나 감독이 최희암으로 바뀐 것도 있지만, 하필이면 그 밀약을 약속했던 기아 농구단 프런트 수뇌부들[1]은 기아자동차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서 KIA 타이거즈로 바뀌면서 KIA 타이거즈 프런트로 옮겨갔던 것.(…)
결국 김영만은 훈련 불참을 선언했고 강동희 역시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뉴스기사
기아 왕조의 마지막 선수였던 강동희, 김영만을 사실상 전력 외 취급해버린 최희암은 자신의 직속 제자들로 이 공백을 메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우-신세기 농구단을 거쳐 삼성의 문경은과 맞트레이드된 이후 문제가 되었던 수비와 더불어 공격에서도 제 몫을 하지 못했던 우지원과 SBS와 LG에서 리딩 가드 역할을 하던 오성식이 그 주인공이었던 것. 최희암은 구단에 이 둘의 영입을 강력히 요청하였고, 모비스 구단은 결국 강동희를 창원 LG 세이커스로 보내고 오성식을 받았고, 마침 서울 SK 나이츠 소속이었던 서장훈이 FA권리를 행사,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하는 일이 발생하자 SK 구단은 보상선수로 우지원을 픽하며 모비스와 우지원 + 1억 = 김영만 트레이드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제자들을 잔뜩 데려온 것만으로는 어째 불안했는지, 애초에 국내 최고의 포인트가드 강동희랑 최희암 제자라지만 오성식과 비교한다는게 말이 되냐 이번에는 전주 KCC 이지스와 3:3 트레이드를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성식이건 우지원이건 2% 부족한 선수들이라고 생각하여 군 제대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표명일, 프로 3년차 포워드 송태영, 기아 시절부터 뛰었던 공격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몸빵은 되었던 센터 김동언을 내주고 단신가드 김태진, 센터 구본근, 이상영을 데려온 것. 여담으로 구본근의 경우는 부상으로 조기 은퇴,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박승일 코치의 대타로 갑자기 코치로 선임되었다가(둘은 초,중,고,대학까지 선후배다.) 현재는 매니저와 주무를 거쳐 모비스 농구단의 프런트 직원(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연히 올드 기아팬들이 주축이었던 모비스 팬들은 난리가 났다. 하루아침에 팀의 기둥이 뽑힌 격인데 오죽하랴...[2] 한마디로 팀이 새출발한답시고 팀의 고유 전통을 전통? 그게 뭐임? 개나 줘버리세여;; 취급하며 그 파급효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그 때문에 관중도 *대 출신만 받지 그러냐라는 비아냥도 나왔을 정도.(...)
그래도 최희암은 첫 해에 6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원주 TG에게 발리며 광탈, 그 다음 시즌에는 꼴지로 떨어지면서 사퇴하게 되었고 이는 대학교 출신 지도자들의 실패 잔혹사의 시작이 된다. 재밌는 것은 꼴지로 떨어진 03-04 시즌 전주 KCC 이지스와의 트레이드에서 용병인 R.F 바셋과 바꾼 지명권이 1순위에 걸렸고, 드래프트에서 양동근을 데려오며 재건의 기반을 마련, 전자랜드를 4강에 올린 유재학을 영입하면서 지금까지 지속되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농구대잔치 시절 7회 우승과 더불어 프로농구 원년 우승과 초창기 강호로 군림했던 기아 농구단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나마 미리 은퇴했던 김유택은 현재까지 14번 영구결번이 이어져 오고 있지만 안습하게도 현재 모비스 팬들 중에 14번이 영구결번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히 모비스에서 팽 당한 과거 강동희나 김영만의 번호인 5번과 11번은 현재 아무나 막 쓰고 있다.[3] 게다가 우지원이 은퇴하면서 우지원의 번호였던 10번이 모비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가만있자.. 우지원이 누구를 트레이드하고 받아온 선수더라?
그 때문에 과거 기아자동차 팬이었던 사람들중 상당수는 모비스 농구단과 기아 농구단이 엮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한 마디로 후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4] 그 예로 인터넷 상에서 모비스와 기아를 엮는 기사가 나올 경우 지랄하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과거 기아자동차 팬이었던 사람들은 아예 농구를 보지 않거나, 다른 팀[5]을 응원하는 경우가 대부분. 가끔 위에 서술된 모비스와 기아를 엮는 기사에서 기아자동차 팬이었던 사람들과 우지원, 양동근이 스타로 발돋움한 뒤 유입된 팬들과 키배가 붙긴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농구 인기 자체가 워낙 시들한 탓에 그다지 크게 번지거나 주목받지는 않고 있다.
어찌보면 이런 처사가 현재 한국의 프로농구 인기 하락에 가장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농구팬들이 가장 불만인 것이 팀 이름이 자주 바뀌는 것과 선수들의 잦은 이동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덧붙이자면 2000년대 이후 모비스 팬의 대부분은 양동근, 우지원이 팀의 스타로 발돋움한 후 유입된 경우가 많다.[6] 그 때문에 디씨 농갤에선 몹퀴벌레라는 비칭이 생기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기아자동차 농구단을 계승한 팀이기에, 현재 울산 동천체육관에는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첫 우승 엠블렘이 달려 있다.#
전형적인 감탄고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구단 공홈의 연혁에 과거 팀의 이력을 싹 지워버린 몇몇 팀들을 생각하면 모비스에게만 돌을 던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거기에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우승시즌 유니폼 전시에서 엄연히 현재팀인 모비스 앰블럼이 아닌 우승 당시 팀이자 전신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앰블럼을 박아넣은 성의가 보인다.(유니폼 6개중 제일 왼쪽)- ↑ 김익환 단장 및 정재공 사무국장. 이들은 KIA 타이거즈의 초대 사장과 단장으로 부임했다.
- ↑ 야구로 예를 들자면 해태 타이거즈의 선동열, 이종범, 이대진같은 선수들이 하루아침에 다른 팀으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다른 팀
유입종자프랜차이즈 선수들이 메꾼다고 생각하면 된다. - ↑ 다만 강동희의 경우는 2013년 3월 7일부로 10-11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4차례 승부조작을 한 것임이 드러나 구속영장이 신청되었으므로 오히려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강동희 혹은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 참조.
- ↑ 어찌보면 해태 타이거즈와 KIA 타이거즈의 정통성 논쟁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래도 KIA는 양반인게, 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종범(해태 출신이지만 일본에 있다가 KIA로 컴백한 케이스), 이대진, 김종국 같은 선수들이 오래 있어서 해태의 후신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단지 해태시절에 걸맞는 성적이 안나와서 그렇지이쪽은 아예 전통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심각한 예로는 기아 농구단 말년에 신인급 선수였던 하상윤이 지금까지 모비스 선수로 있다는 이유로 반 농담삼아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얘기하는 것.(…) - ↑ 부산 KT 소닉붐으로 넘어간 예가 가장 많다. 전신팀인 기아 엔터프라이즈부터가 부산 연고기도 해서... 그 외엔 허재 이적 이후로 실업시절 기아자동차의 주축이기도 했던 중대라인이 재결성된 원주 동부 정도.
- ↑ 그런데 아주 가끔 과거 기아자동차 시절부터 현재의 모비스까지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현 감독인 유재학이 기아자동차의 초기황금시대를 이끌기도 했었고... 물론 극소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