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근(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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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모비스 피버스 No. 6
양동근(梁東根 / Dong-Gun Yang)
생년월일1981년 9월 14일
국적대한민국
출신학교삼선중 - 용산고 - 한양대학교
포지션포인트가드
신체 사이즈181Cm, 81Kg
프로입단2004년 드래프트 1번(전주 KCC 이지스)
소속팀울산 모비스 피버스(2004~ )
수상내역[1]KBL 정규리그 MVP 4회(2006, 2007, 2015, 2016)
KBL 플레이오프 MVP[2] 3회(2007, 2013, 2015)
농구대잔치 MVP 1회(2008)
KBL 최우수 신인(2005)
KBL 베스트 5 9회(2006, 2007, 2010-2016)
KBL 최우수 수비상 2회(2013, 2015)
KBL 수비 5걸상 3회(2005, 2015, 2016)
KBL 어시스트상 2회(2011, 2016)
KBL 스틸상 2회(2010, 2015)
KBL 모범선수상 1회(2007)
KBL 정규리그 우승 4회(2006, 2007, 2010, 2015)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5회(2007, 2010, 2013-2015)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5~2006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신기성(원주 TG삼보 엑서스)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서장훈(서울 삼성 썬더스)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6~2007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서장훈(서울 삼성 썬더스)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2014~2015, 2015~2016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문태종(창원 LG 세이커스)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2016-17 시즌
2006~2007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강 혁(서울 삼성 썬더스)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2012~2013 한국프로농구 플레이오프 MVP
오세근(안양 KGC인삼공사)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문태영(울산 모비스 피버스)
2014~2015 한국프로농구 플레이오프 MVP
문태영(울산 모비스 피버스)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이승현(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2008 농구대잔치 MVP
강병현(중앙대학교)양동근(상 무)유병재(상 무)
2004~2005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
이현호(서울 삼성 썬더스)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방성윤(서울 SK 나이츠)
2012~2013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수비상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양희종(안양 KGC인삼공사)
2014~2015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수비상
양희종(안양 KGC인삼공사)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이승현(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2006~2007 한국프로농구 이성구 기념상(모범선수상)
현주엽(창원 LG 세이커스)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강대협(원주 동부 프로미)

1 개요

모비스의 영원한 캡틴

KBL 역사상 최고의 포인트가드[3][4]

울산 모비스 피버스의 주장이자 포인트가드. 자타공인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KBL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드이며, 기아자동차 농구단과의 연결 고리가 사실상 끊어진 모비스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도 하다.

2 기록

3 선수 경력

3.1 프로 입문과 신인상

용산고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팀을 진두지휘하면서 한동안 약세를 면치 못하던 한양대 농구부의 돌풍을 주도했다.

2012년에 작고한 신임 한양대 김춘수 감독[5]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양동근(고교때까지 수비용 식스맨인 양동근을 불러주는 대학팀은 없었다.[6])의 잠재력을 보고 과감히 발탁해 그를 중심으로 팀을 짰다. 그리고 전통의 투빅맨시스템 대신 1빅맨 3포워드 1가드 시스템의 토털농구로 팀을 쇄신한다.

이후 김성현, 김승민, 강은식, 서동용, 조성민 등을 영입하고 2년여간 담금질(맞춤형 지옥훈련)을 한다. 이 개혁이 대성공해 한양대는 양동근이 3학년일때부터 대학농구의 정상을 노리게 된다. 팀성적과 함께 개인성적도 좋아져 3~4학년 때는 2년 연속 농구대잔치 어시스트상을 수상하여 대학농구 최고의 포인트가드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당시엔 대학농구리그 출범전이라 농구대잔치가 최고권위의 대회였다.

농구대잔치에서 3학년때는 당시 대학최강 연세대에 석패했지만, 4학년때는 하승진, 김태술, 이광재, 양희종, 방성윤, 이정석, 전정규의 연세대를 격파하는 대이변을 연출한다. 이 게임을 앞두고 김감독은 강은식에게 미들레인지 슛을 연습시켜 하승진을 끌어내고 양동근이 이정석, 김태술을 융단폭격하는 전술을 써서 대박을 냈다. 물론 조성민, 김성현, 김승민, 서동용 등 김춘수가 키워낸 포워드진이 로테이션을 돌며 공격을 성공한 점도 컸다.

이처럼 한양대의 리더로 일찍부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된 경력에 농구대잔치에서 2년 연속 어시스트상을 수상한 양동근은 자연스레 2004년 드래프트 최대어로 손꼽히게 되었다.

2004년 드래프트에서 전주 KCC 이지스에 의해 전체 1순위로 지명받았다. 하지만, KCC는 2003-2004 시즌 도중 모비스의 센터 R.F. 바셋을 임대 영입하는 과정에서 KCC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체 드래프트 1순위를 양도했고, 그 결과 모비스는 비록 형식은 전주 KCC가 가진 지명권이었지만, 그들이 실질적으로 지명권 1순위를 행사해 양동근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7]

이로써 양동근은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3개 대학 이외의 대학을 나온 최초의 1픽 선수가 되는 기염을 토한다.

마침 모비스는 팀 재건을 위해 한 때 좋지 않게 헤어졌던 유재학을 전자랜드에서 파격적인 금액을 불러 모셔오는데 성공했고,[8] 유재학 감독의 합류와 그의 갈굼 지도 아래 양동근은 프로에서도 한양대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며 팀을 지휘한다. 비록 5할 승률에 미치지 못한 성적이었지만, 신인 첫 해 평균 11.5점 6.1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을 내며 신인상을 타는데 성공.

3.2 두 번의 MVP와 군입대

박수교, 최희암, 장일의 시대를 거쳐 팀의 전설들도 다 떠나고, 막장으로 치달았던 모비스는 유재학 감독의 취임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일선에는 양동근이 있었다. 그리고 모비스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크리스 윌리엄스까지 가세하면서 모비스는 하위권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돌풍을 일으키며 일약 2005-2006 시즌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사상 최고의 이변을 연출한다. 외국인 선수에게 따로 MVP를 주기 때문에 국내 선수 중에서 MVP 선정을 해야 하는데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한 서울 삼성 썬더스서장훈과 치열한 경합을 거친 끝에 결국 KBL 최초로 둘 다 MVP를 받았다.

하지만 KBL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만난 두 선수는 모두 챔프전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 일단 양동근은 챔프전에서 평균 15.5득점 7.1어시스트로 분전하기는 했지만, 삼성과 치열한 접전 끝에 4전 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높이에서 우세한 삼성이 예상과는 다르게 강혁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들고 나오면서 모비스가 완전히 말린 것. 그 결과 정규시즌과 다르게 서장훈도 조연에 그쳤다.[9] 최종 스코어만 보면 경기 내용도 일방적일 거라고 오해하기 쉽겠지만 경기 내용은 그리 일방적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승리를 거둔 건 삼성이었지만...

그러나 양동근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2006-2007 시즌에 다시 팀의 정규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한다. 전 시즌에 비해 훨씬 향상된 성적을 거두며, 전년도에 팀빨로 수상했다는 비평을 말끔히 씻어낸 것. 평균 15.7득점, 5.9 어시스트, 1.9스틸로 더 향상된 기량을 선보이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부산 KTF 매직윙스와의 7차전까지 가는 챔프전 접전에서 평균 19.1점을 집어넣는 맹활약으로 팀의 두 번째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KBL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에는 대학 시절 만난 연인과 결혼까지.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찾아온 것은 바로 입대 영장이었다(...)

3.3 군입대(2007~2009)

어쩔 수 없는 것이 병역 특례의 유일한 기회였던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은 삽질의 연속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8강에도 못 들면서 탈락해 버렸고, 자연히 신체건강한 양동근은 신혼의 단꿈을 꾸자마자 바로 상무로 갔다.

그리고 상무에서 2007년 12월 오른쪽 발목 연골 재생수술을 받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에 쓰게 된다. 기사 (그리고 이 수술 이후로는 농구화 깔창을 특수 제작해서 사용한다.) 재활 후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면서 뛰다가 무사히 전역했다.

3.4 군 복무 이후(2009~2012)

복귀 첫 시즌에는 신인 시절과 같은 성적을 냈다. 이 때 팀의 주축은 어차피 함지훈 위주로 돌아가던 시절이었고, 모비스는 어쨌거나 두 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2008-2009 시즌과 달리 2009-2010 시즌에는 정규리그와 KBL 챔피언결정전 모두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0-2011 시즌에 양동근은 다시금 예년 MVP 시즌 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KBL 무대에서는 여전히 양동근의 돌파와 패스는 잘 먹혀 들어갔다. 생애 최다인 16.5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 다만, 모비스는 함지훈의 입대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얇은 선수층의 한계도 극복하지 못했다. 덕분에 양동근 혼자 죽어라 뛰고 달리는 지경이었고 팀성적도 하위권에 머물렀다.

2011-12 시즌도 마찬가지로 가드진의 지원이 미비한 상황에서 양동근 혼자 죽어라 슛쏘고 패스하면서 혼자 백코트진을 책임졌다. 외국인 선수 테렌스 레더와 상무에서 제대하고 시즌 후반 합류한 함지훈의 활약을 바탕으로 PO 4강까지는 올랐지만 당시 극강이던 동부산성을 넘지 못하고 3:1로 패배. 그래도 양동근은 유재학 감독이 정말 고생했다고 미안해하고, 안티가 0에 수렴하는 선수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3.5 모비스 왕조의 주역(2012~현재)

2012-13 시즌 혼혈 귀화선수 문태영과 신인드래프트 1순위 포인트가드 김시래의 합류로 모비스에서의 공격에서의 롤은 예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덕분에 데뷔 이후 가장 낮은 스탯을 기록중이지만 팀에서의 중심점 역할과 상대 가드진을 봉쇄하는 앞선 수비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평. 정규시즌 2위에 이어 서울 SK 나이츠와의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1차전 역전 3점포 및 4차전 28득점의 신들린 활약으로 본인 선수인생의 두번째로 만장일치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하였다.

2013 국제농구연맹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도 공격면에서는 별로였지만 수비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특히 3/4위전에서는 다시 한번 뛰어난 수비력을 발휘해 한국이 2014년 세계농구월드컵으로 나가는데 큰 공을 세웠다.

2013-14 시즌 확실히 예년보다 둔화된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양동근 노쇠화론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장기이던 스크린 받고 돌아나오는 풀업점퍼의 성공률이 확실히 낮아졌다. 평균득점 한자리수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던 와중, SK전에서는 돌파과정에서 주희정 선수의 발을 밟고 양동근 선수 인생 최초로 부상으로 리그경기에 결장하는 보기 드문 모습도 연출되었다. 그러나 당초 결장이 길어질거란 우려를 깨고 2주 만에 부상을 털고 경기에 빠르게 복귀하였다. 그 후로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5라운드부터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0%정도의 3점슛을 40%까지 끌어올릴 정도로 슛감이 올라오자 전성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플레이들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모비스는 4승 2패로 창원 LG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 MVP는 문태종에게, KBL 챔피언결정전 MVP는 문태영에게 내줬지만 양동근의 2013-14 시즌도 마무리는 성공적이었다.

2014 FIBA 농구 월드컵 스페인에서는 그야말로 대삽질을 하였다. 조성민과 더불어 득실마진은 -10점이 넘어가며 최악의 활약을 펼쳤고 2014년 국가대표팀의 경기에서 거의 모두 선발스타팅이었으나 유재학 감독도 농구 월드컵 몇몇 경기에선 부진한 양동근을 대신해 김선형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본인도 세계와의 수준 격차에 충격을 받았는지, 후에 인터뷰에서 후배들에게 아침에 안보이면 잘못되있을꺼라고 말을 했다고한다. 농구 월드컵의 부진은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초반에도 유지되어 하마터면 약체인 몽골에게도 질 뻔 하였다. 이후 어느정도 컨디션을 되찾고 결승전인 이란과의 4쿼터 막판 75-70에서 따라가는 3점슛 성공 및 이어진 김종규의 역전 골밑슛 앤드원을 어시스트하는 등 승부처에서 주전가드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대한민국의 10년만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때 양동근의 이름값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국가대표 시즌이었다. 이시점 이후에 농갤에 고동근 드립이

2014-15 시즌에서는 아시안게임의 여파인지 시즌 초반이지만 양동근의 농구인생 중 가장 부진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1라운드 3점 성공률이 14%에 머무르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여주며, 그동안 두자리수를 사수하던 평균득점도 한자리수로 하락했다. 1라운드는 역대 최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드디어 양동근도 노쇠화가 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라운드부터 갑자기 슛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2라운드 9경기 만에 3점 성공률을 40%까지 끌어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시즌 도중 문태영이 부상으로 몇 경기 결장하고, 작년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발목부상을 당한 함지훈이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동안 수비에 치중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모처럼 득점본능을 뽐내며 팀원의 공백을 메웠고 그 결과 11월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 후로도 득점과 어시스트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11월에 이어 12월에도 SK의 박상오와 공동으로 12월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정규리그 우승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던 6라운드 SK-동부전 키게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올시즌 유독 중요한 경기와 클러치 상황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11월, 12월에 이어 2월에도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는 등 외국인 선수상이 재설되는 올해 가장 유력한 정규리그 MVP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결국 2007년 이후로 8시즌만에 세번째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 자기보다 체력적으로 더 유리한 젊은 선수들도 아시안게임의 여파로 이번 시즌 아쉬운 성적을 낸 것을 감안하면 더욱 더 값진 MVP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통산 어시스트 2,208개를 기록중이던 강혁 전 선수의 기록을 넘어서며 역대 어시스트 5위로 올라서는 기록도 수립하였다.

2014-15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창원 LG 세이커스를 상대로 양우섭의 뛰어난 맨마킹 수비를 극복하고 5경기 평균 18득점의 활약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결승에서는 정규리그 2위였던 원주 동부 프로미를 맞아 4경기 평균 20득점 4.8리바운드 4.8어시스트로 모비스의 4:0 완승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리고 기자단 투표에서 64표 중 60표를 받아 챔피언결정전 MVP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정규리그 우승 4회, 정규리그 MVP 3회, 플레이오프 우승 5회, 챔피언결정전 MVP 3회 등 KBL 출범 이래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보유한 리빙 레전드로 등극했다.

2015 FIBA 아시아 남자농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전반 무득점에 두개의 리바운드에 그치는 극도의 부진을 보였으나 후반전에 완전히 폭발하여 18득점 6리바운드 8어시스트 8스틸로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박찬희가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고 김태술이 극도의 부진을 보인탓에 출전시간 조절을 받지못했고 결국 조대결에서 중국에게 패배, 8강에서 이란과 맞붙어 패배하며 당초 목적이던 4위권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양동근은 농구팬들로부터 재조명 받게 된다. 그동안 국제대회서 비교적 준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성적에 묻혀 국내용이라고 까였던 양동근이었지만 이번 대회서 만큼은 홀로 빛났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동근은 평균득점 12.7점 어시스트 4.7개 리바운드 3.6개 스틸 2.4개를 기록하며 전방위적인 활약을 하였다.(심지어 비교적 약체와의 경기는 거의 뛰지 않고 만든 기록이다.) 효율성지수를 나타내는 PER 역시 17.4를 기록하며 전체 대회 7위 가드 1위에 올랐고 대한민국 팀내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한국 나이 35세의 선수가 사실상 팀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동안 국내용이라고 비난했던 안티들도 이번 대회 퍼포먼스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외신들이나 타국가 선수들도 양동근을 주목하는등 양동근으로서는 마침내 전성기가 꺾이는 시점에 화려한 불꽃을 태운 대회가 되었다.

2015-16 시즌 KBL로 복귀한 후 비시즌 동안의 강행군으로 인해 힘든지 초반에 낮은 슛 성공률을 보여주었다. 대신 함지훈이 리그 어시스트 1위를 달릴 정도로 훌륭한 플레이메이킹 솜씨를 보여주고 있고 기량이 눈에 띄게 발전한 전준범아이라 클라크, 커스버트 빅터 두 외국인선수가 득점을 해주면서 모비스는 '리빌딩하는 팀'이라는 주장이 무색하게 훌륭한 성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시즌 중후반부로 오면서 역시 그 실력은 어디 안가는지 양동근은 시간이 지날수록 슛감이 올라오면서 훌륭한 득점력을 보여주기 시작, 팀은 결국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고[10] 이로인해 또다시 MVP 후보에 오르게 됐다. 팀 동료 함지훈이 양동근 못지 않게 좋은 활약을 했으나 보여준 MVP 포스가 무색하게 시즌 후반부터 경기력이 좋지 않아 양동근 아니면 KCC의 전태풍이 MVP를 수상하지 않을까 의견이 많았는데, 시상식 당일 전태풍을 1표차로 제치며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11]

4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원주 동부를 3대0으로 꺾고 올라온 고양 오리온을 맞아 경기를 했는데, 정규시즌 때와 달리 매치업 상대인 조 잭슨을 상대로 거의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팀의 3대0 패배를 바라봐야만 했다.[12] 조 잭슨에 대한 수비가 잘 되지 않았고, 본인의 주특기인 스크린을 타고 하는 플레이가 오리온의 장신 선수들, 특히 최진수의 스위치에 막히면서 모비스 공격 전체가 삐걱거렸고 전준범, 송창용 두 슈터마저 침묵하면서 패배했다. 그래도 지난 시즌에 비해 약해진 전력이라 평가받는 모비스를 1위팀과 승차 없는 정규시즌 2위로 이끌고 본인은 백투백 MVP까지 받았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

15-16 시즌후 FA 자격을 얻었고 원소속팀인 모비스와 보수총액 7억 5천만원(연봉 5억 5천, 인센티브 2억)에 3년간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6-17 시즌 개막전에서 손목부상을 당하였다.이 날 경기가 자신의 500번째 출장 경기라서 더욱 안타깝다.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수비력까지 갖춘 KBL 최고의 듀얼가드

뛰어난 공격력을 갖춘 포인트가드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수비력까지 갖추었다. 양동근의 진정 무서운 점은 역대 포인트가드 중 최상급의 공격력은 물론이거니와 수비에서도 상대 에이스가드를 막는 스토퍼로서 공수에 동일한 에너지를 쏟는게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양동근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정적인 슈팅이다. 주 공격옵션은 용병 선수나 국내선수의 스크린을 타고 쏘는 점퍼나 3점슛이다. 돌파력도 준수한 편이지만 양동근 공격의 7~80%는 이 루트이다. 스크린을 이용한 풀업점퍼는 거의 오픈이나 다름이 없고 모비스의 움직임이 워낙 조직적이어서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바디밸런스가 상당히 좋아 슈팅자세나 릴리즈가 안정적인 것 또한 강점이다.

또 하나의 장점이라면 역시 체력과 부상당하지 않는 신체. 체력이 받쳐주다보니 공격과 동시에 수비에서도 계속해서 상대를 따라다니게 되고, 상대선수가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전에도 비교적 멀쩡하여 득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즉 본인은 15점을 내고 5점으로 막는 선수. 또한 부상이 거의 없는 선수라[13] 나이를 먹고도 꾸준한 기량을 낼 수 있다는 점이 이 선수를 더욱 무섭게 만든다.

단점으로는 돌파 직후 점프 패스를 많이 한다는 점이 있다.[14] 유감스럽게도 이는 대한민국 가드들의 종특이기도 한데 최정상급 선수인 양동근도 이런 위험한 버릇과 무관하지 못하다.

그 외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약점이 바로 경기를 지휘하는 포인트가드임에도 불구하고 드리블이나 패스가 좋지 못하고 시야가 떨어진다는 것. 이점에 대해 여러번 지적을 받아왔고 시야가 부족한 것은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다만 그 비교대상이 역대 최고의 시야를 지녔던 이상민이나 김승현, 강모씨와 같은 위대한 포인트가드들이라서 유달리 과소평가받는 점도 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이며 선수생활 말년에 이르면 리그 현역 가드 중에서도 그보다 리딩이 좋다고 꼽을 만한 가드는 극히 몇 안 된다. 사실 패스나 시야를 중요시하는 정통 포인트가드 옹호론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저평가를 받는 선수 중 하나이다. 오히려 이 선수가 2004년이 아니라 지금처럼 듀얼가드가 대세가 된 시기에 뛰기 시작했더라면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통 포인트가드라는게 그냥 스타일이 다른거 뿐이지 콤보 가드보다 더 좋은 스타일이라고 하는건 그야말로 개소리라고 보면 된다. 안타깝지만 이런 말들이 2010년대 이후로도 자주 나온다는 것 자체가 아직 대한민국 농구계가 세계적인 추세로부터 뒤쳐져있다는 증거이다.

5 이모저모

  • 사촌형이 전 농구선수이자 천하의 개쌍놈 양경민이라(양동근 입장에서 큰아버지의 아들) 드래프트 당시에 화제가 되었었는데, 가정사 문제가 있는 건지 사이는 좋지 않은 듯 하다. 양경민의 존재 자체가 KBL흑역사 급이기도 해서 그런지 언급 자체가 터부시되는 느낌.[15] 일요신문과의 인터뷰 때, "경민이 형과 내가 연관되는게 부담스럽다"며 "경민이 형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다.
  • KIA 타이거즈꽃범호이범호와 절친이다. 이범호가 한화 이글스에서 뛰던 시절 초등학교 친구인 당시 KIA에서 활약하던 이영수가 앙동근을 연결해 줘서 절친이 됐다. 이후 이범호가 2009년 WBC 때 등번호를 6번으로 달았고, 양동근은 반대로 이범호의 등번호인 7번을 국가대표팀에서 달고 뛰기도 했다. 또한, 모 스포츠신문에서 야구선수의 절친에게 편지를 쓰고 거기에 답장을 받는 꼭지[16]에서도 이범호와 양동근이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NC 다이노스손시헌, 이종욱과도 친분이 있다.
  • 야구도 좋아해서 농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야구를 했을 거라고도 한다. 상무에서도 3번 타자 겸 유격수를 했다고 한다.[17] 비시즌이 되면 거의 매해 야구장 목격담이 들려오기도 한다.
  • 양동근 본인도 상당히 겸손하고 실력도 좋아 안티가 별로 없는 선수였지만 모비스가 조금 잘나가기 시작하자 농갤 열폭종자들을 중심으로 안티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 진한 표시는 역대 최다 수상을 가리킨다.
  2. 2011-12 시즌부터 기존의 KBL 챔피언결정전 MVP가 플레이오프 MVP로 바뀌었다. 관련기사
  3. 일단 수상경력만 놓고봐도 최다 MVP 및 우승, 그리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승현같은 경우에는 임팩트는 최고였지만 전성기가 짧았고, 이상민같은 경우에는 수상내역에서 양동근에게 밀리는건 사실이다. 강동희의 경우는 프로에 진출할 때 이미 30대였다.
  4. 단 한국 농구 역대 최고 포인트가드냐고 묻는다면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유재학 감독 같은 경우에는 강동희 이상민은 모두 유명하지만 본인은 신동찬을 뽑았다.
  5. 1999년경에 김용근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 2008년 농구대잔치에 고려대에게 패하자 이상영 코치와 함께 선수 2명을 폭행하는 바람에 경질되고 말았다.
  6. 고교 특급 선수는 이르면 고등학교 1학년, 보통 2학년에는 입학할 대학교가 정해지는데, 양동근은 3학년이 지나도록 오라는 곳이 없어서 농구를 관둬야 하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용산고 입학 시절 키가 168cm 밖에 되지 않아 짬이 차는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주로 벤치를 지키는 수비용 식스맨이었다. 그에 반해 1년 후배 이정석은 1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다.
  7. 1순위 경쟁자는 용산고 1년 후배인 이정석. 둘 다 실력 차이가 거의 없고 고만고만하다는 평이었으나, 모비스 구단은 당시 KCC 감독이었던 신선우의 강력 추천과, 양동근의 외모가 조금 더 나아서 스타성이 있다는 이유로 양동근을 1순위로 뽑게 된다. 당시 기사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전자랜드 감독이었던 유재학은 전자랜드가 1순위에 걸릴 경우 이정석을 뽑으려고 했다.
  8. 유재학은 부상으로 인해 기아자동차에서 조기 은퇴하는데, 그가 부상 재활을 포기하고 은퇴한데는 기아가 중앙대 위주로 굴러간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다.
  9. 심지어 제대로 경기에 나오지도 못했던 서장훈은 결국 1년 후 KCC로 팀을 옮기게 된다.
  10. 1위 전주 KCC와 승수는 같다.
  11. 역대 최소 득표차 수상이며, 기존 기록은 2001-02 시즌 MVP 투표 당시 2표차(김승현 39표, 서장훈 37표).
  12. 조 잭슨이 양동근을 많이 막지 않은 반면 양동근은 조 잭슨을 막았다고 해서 불리한 매치업이라 이야기하는 팬들도 있지만 애초에 농구가 완전히 1대1도 아니고 양동근의 스타일 자체가 팀원들의 스크린을 받아서 하는 정해진 플레이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당연히 억지에 가깝다. 더불어 함지훈의 스크린이 무빙 스크린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13. 상무시절 오른쪽 발목 연골 재생술을 받았지만 상무 기간 재활에 성공. 그 이후로 잔 부상을 당한 경험이야 있지만 선수 생명을 갉아먹거나 능력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경험은 없다. 오세근 같은 경우는 족저근막염으로 계속 고생중인데다가 경기를 계속 뛰면서 무리하는 바람에 무릎에도 이상이 생겼고, 전태풍의 경우는 하글런디시병으로 완치 불가 판정을 받았다.
  14. 점프 패스는 그 루트를 파악하기가 쉬워 막히기가 쉽다. 국내 가드들이야 비교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제대회만 나가도 이 단점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15. 양경민은 자신의 팬클럽 회장에게 자기가 출전하는 플레이오프 경기의 토토 대리구매를 시켜 이걸로 36경기 출전정지의 중징계를 받았다. 프로선수의 복권 구입(토토 등)은 전적으로 금지된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덤으로 그 팬클럽 회장은 미성년자였고, 그 회장을 강간했다는 혐의까지 붙었다. 강간은 무혐의로 처리됐지만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혐의가 인정되어한마디로 쎽쓰는 했다는 소리 민사소송에서 패해 6천만원을 배상했다. 어찌됐든 복권 구입에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등 프로선수로서는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행동임에도 KBL에서는 36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내리다가 얼마 뒤 21경기 출장정지로 슬그머니 처벌을 완화하는 답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양경민KBL의 최초의 영구제명자로 알고 있는데 KBL에서는 양경민에게 영구제명 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 이로 인해 양경민은 양토토, 양토간이라는 당연하지만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16. 여담으로 이 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로 우규민이 초등학교 때 동창이었던 배우 윤은혜에게 편지를 썼으나 답장을 못 받은 일화가 있다. 이택근현대 유니콘스에서 삼성 라이온즈로 FA 이적한 박진만에게 보낸 편지도 유명.
  17. 당시 1선발은 노경석, 2선발은 한정원, 이시준조성민도 수준급의 야구 실력을 갖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