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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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허--택 트리오의 사진. 가운데가 강동희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이제 아래에 서술할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해 더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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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영원히 볼 수 없고 봐서도 안 되는, 그리고 승부조작으로 스스로 레전드에서 흑역사로 추락하는 병크를 저지른 감독 시절의 모습.

이름강동희(姜東熙)
생년월일1966년 12월 20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경기도 수원시
출신학교송도고 - 중앙대학교
포지션포인트가드
신체사이즈178Cm, 92Kg
프로입단1990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입단
소속팀기아자동차/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1990~2002)
창원 LG 세이커스 (2002~2004)
국가대표팀1989 베이징 ABC[1]
1990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 / 베이징 아시안게임
1991 고베 ABC
1993 자카르타 ABC
1994 캐나다 세계선수권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995 서울 ABC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997 리야드 ABC
1998 그리스 세계선수권 / 방콕 아시안게임
1999 후쿠오카 ABC[2]
지도자창원 LG 세이커스 코치 (2004~2005)
원주 동부 프로미 코치 (2005~2009)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 (2009~2013)
수상경력<선수>
1986-87 농구대잔치 신인상
농구대잔치 MVP 1회 (1993)
농구대잔치 베스트 5 6회 (1991~1993,1995~1997)
농구대잔치 어시스트상 6회 (1991~1993,1995~1997)
농구대잔치 스틸왕 3회 (1995,1996,1997)
KBL MVP 1회 (1997)
KBL 베스트 5 6회 (1997~2001,2003)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FIBA ABC 우승 1회 (1997) / 준우승 4회 (1989,1991,1995,1999) / 3위 1회 (1993)
<감독>
KBL 감독상 1회 (2012)

1 개요

한국 농구를 대표했었던 최고의 포인트 가드. 현역 시절 및 나이가 들어 프로에 와서도 최고의 기량을 뽐낸 당대 제 1의 가드였다. 감독으로도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갔던 인물.

하지만 2013년 9월 3일부로 승부 조작 혐의의 처벌이 확정되고 6일 영구제명되어 프로농구계에서 완벽하게 퇴출됨에 따라 사상 첫 감독 출신 승부 조작범이 되었다. 현재 그에게 남아 있는 건 승부를 조작한 범죄자라는 낙인 뿐이다.

2 프로 기록 및 수상기록[3]

정규 시즌
336경기 11.13점 2.79리바운드 6.55어시스트 1.70스틸 FG 47.22% 3P 40.50% FT 76.57% TS 60.1% eFG 58% PER 16.93

플레이오프
41경기 12.68점 2.17리바운드 4.10어시스트 1.51스틸 FG 47.87% 3P 40.10% FT 78.30% TS 60.7% eFG 57% PER 12.80

챔피언 결정전
17경기 15.71점 3.65리바운드 4.88어시스트 1.94스틸 FG 46.60% 3P 38.18% FT 73.44% TS 60.7% eFG 57% PER 15.99

각종 상도 많이 받았다. 정말 찬란한 기록이다. 심지어 감독상도 받았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는 더 이상은 없다. 대신 마재윤, 박현준, 최성국, 박외식, 최병현, 김동현, 이태양, 유창식이 조작라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3 선수 생활

3.1 대학 시절

1남 2녀 중 셋째인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농구를 했다. 키도 농구선수가 되기엔 그리 큰 편이 아니라서 송도중학교 때는 농구부에서 밀려나서 일반 학생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꿈은 평범한 체육 교사였다고 한다.차라리 그냥 평범한 체육 교사가 됐으면... 그런데, 송도고로 진학하고 송도고 농구부의 대부였던 전규삼 옹이 강동희의 팔 길이를 보고 농구부로 다시 부르면서 농구 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 가드를 모두 키운 전규삼 옹의 지도 아래 강동희의 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졸업 무렵에는 모든 대학교에서 탐내는 고교 랭킹 1위의 가드가 되었다. 강동희의 진로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는데, 원래 강동희 자신은 꼭 중앙대학교에 갈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규삼 옹이 "호랑이(허재)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는 것이 맞다."고 조언하는 바람에 그대로 중앙대로 입학했다고.

중앙대에서는 처음에는 김유택, 강정수, 허재와 같은 선배들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워낙 패스가 좋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중앙대는 대학 사상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결승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현대에게 패배. 이들이 차례차례 졸업할 무렵에는 혼자 팀을 이끌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혼자서 활약할 당시에는 어시스트보다는 득점에도 주력하며 득점력도 갖춘 포인트가드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역시 대학 졸업 무렵의 진로를 두고 고민이 컸는데, 중앙대로 처음 올 때 고민한 것처럼 기아자동차로 가는 것에 대해 고민이 심했다고 한다. 선배들이 많아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보일 기회가 있을지 고민한 것. 하지만, 기아자동차 및 중앙대학교의 설득과 스카우트비 공세(알려진 것은 6천만원인데, 여기에 집을 하나 더 사줬다고 한다.)로 인해 결국 기아자동차로 가게 되었다.

3.2 기아자동차 시절

이미 김유택한기범이 지키는 골밑에 더해 허재가 이끄는 가드진이 강했던 기아자동차는 여기에 강동희까지 오면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팀으로 변모했다. 강동희는 중앙대 시절처럼 다시 공격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가드가 되었고, 강동희가 찔러주면 센터진이나 허재가 받아먹고, 강동희가 가로채기하면 속공으로 이어지는 그런 팀으로 변했다. 스포트라이트는 가장 화려했던 허재가 주로 받았지만, 강동희 역시 이에 뒤쳐지지 않는 활약을 보였다. 팀에서 가장 빛났던 세 선수의 이름을 따서 흔히 허--택 트리오라고 부르는 강력한 전설이 태동한 것이다.

대신 부수적인 문제가 두 가지 생겼는데, 하나는 유재학의 MVP 수상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4] 기아자동차가 완전히 중앙대의 판이 되었다는 점이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유재학이나 정덕화는 조기 은퇴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노력을 대충해도 이겼다는 거. 강동희 자신도 말술로 유명하고, 허재의 술이야 뭐 사고로 너무너무 유명했다.그런데도 이겼다.(...) 자연히 나태해 질 수 밖에 없던 것. 농구대잔치 6연패를 해 버리니 자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는 연세대학교를 위시한 대학세의 돌풍이 불어닥친 1990년대 초반에 자연히 해결되었다. 기아자동차는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그들의 직속 후배 격인 중앙대학교에 8강에서 지는 수모를 당한다. 정신차린 그들은 곧바로 1994-95, 1995-96 시즌을 모두 우승하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어쨌거나 강동희는 이 와중에 그나마 허재보다는 덜 사고를 쳤고, 그래서 덜 까였다. 그리고 화려했던 농구대잔치를 기반삼아 프로가 생길 때, 프로 팀의 주축으로 지목받은 것은 강동희였다.

외국인 선수의 도입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노쇠 기미가 보이던 김유택은 벤치멤버가 되었다. 포워드 자리에는 선배 못지 않은 김영만이 보강되었다. 허재최인선 감독과의 불화로 출전을 거의 하지 못할 때, 강동희는 팀의 주축으로 프로 원년인 1997시즌 맹활약했다. 평균 15.6득점, 7.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프로 초대 어시스트왕 및 MVP에 올랐다. 이 활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평균 18점을 넣으며, 역시 초대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허재가 결국 팀을 떠나고, 김유택이 은퇴한 후에도 강동희는 기아의 구심점으로 계속 남아 활약했다. 1997-98 시즌 올스타전 MVP, 기아 소속으로 어시스트 1위 4회. 강동희는 이대로면 기아의 전설로 은퇴할 것이 확실했다. 누가 보더라도.

3.3 선수 생활 말년

모기업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난 후, 우여곡절 끝에 현대자동차로 인수되었고, 현대차 그룹은 스포츠단의 교통정리에 들어가 기아자동차 농구단을 모비스로 이관시킨다. 그래서 모비스 소속이 된 상황에서 새롭게 부임한 감독은 바로 연세대의 대부 격인 최희암. 아무리 그래도 설마 강동희를 어떻게 하겠냐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기아 색채 빼기에 들어간 것이다.

김영만우지원과 트레이드되었고, 입지가 좁아진 강동희도 결국 트레이드 시장에 나와 오성식과 트레이드되면서 졸지에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원래 팀과 재계약을 맺으면서 코치 보장을 했던 조건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강동희는 그렇게 배신감을 안고 팀을 떠나야 했다.

LG는 마침 중앙대 선수들이 많아서 활약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고, 강동희 자신의 활약도 절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활약을 한 것. 하지만, 결국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하고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내심 고향인 인천으로 가서 한 번 더 뛰어보고 싶어하기는 했지만, 이는 이뤄지지 않았다. LG는 그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한다고 발표는 했는데, 슬쩍 취소했다. 모비스는 아예 기아자동차를 지웠기 때문에 그는 그래서 어느 구단에도 결번되지 않았다. 그리고 승부조작으로 인해 구속영장이 신청됨으로서 오히려 이 병크가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오오 모비스 오오.

3.4 국가대표

중앙대학교 시절에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강동희는 꾸준히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강동희가 국가대표로 한국의 우승을 이끈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강동희가 등장한 시대부터 이미 한국 농구는 중국에 밀리면서 아시아 2인자로 내려 앉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 때만 해도 중국과 상대할 유일한 호적수는 한국이었고, 2000년대 후반처럼 서남아시아의 이란, 요르단, 레바논에게까지 밀리지는 않던 시기였다.

국가대표로도 강동희는 거의 비슷한 활약을 펼쳤다. 콤비를 이뤘던 허재가 잦은 사고로 국가대표에서 종종 밀린, 특히 방열 감독에 대한 항명 파동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사면서 국가대표에서 다소 껄끄러웠던 시기가 있었던 것에 비해 강동희는 이렇다 할 사고 없이 국가대표에서 꾸준히 뛰었다.

음주 파동으로 국가대표 농구팀이 제대로 욕을 얻어 먹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어시스트와 스틸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한국 대표팀을 대표해 그의 유니폼이 세계농구협회에 전시되어 있고,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인 1997년 아시아농구선수권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베스트 플레이 메이커 상을 타기도 했다. 이 때, 국가대표팀은 28년만의 우승에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딱 실업 팀에서의 모습 그대로 활약한 편이고, 포인트가드 포지션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아무래도 중국의 벽을 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3.5 선수 시절의 플레이 스타일

강동희 플레이의 특징은 기본기가 탄탄했다는 점에 있다. 송도고 시절 전규삼 옹의 지도 아래 갈고 닦은 기본기는 팔이 긴 신체적인 특징과 만나면서 축복이 되었다. 긴 팔은 수비에 도움이 되었고, 공격에서는 한 발 더 빠른 패스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타고난 신체 조건 때문에 성공한 선수는 결코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강동희 는 원래 농구를 못 할 뻔했던 선수다.

타고난 유연성에서 나오는 테크닉은 당대 으뜸가는 수준이었다. 그의 특기는 무빙 점프슛인데, 이는 아시아 최고라는 중국의 강력한 수비망을 무력화시켰다. 드리블, 슈팅, 패스 등 선수가 갖춰야 할 기본기에서 아직도 강동희 만한 선수를 찾기는 힘들다.

파워풀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선수는 아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상황에 맞춰 경기를 풀어나가는 유연성이 더 뛰어났던 선수다. 부드러운 움직임과 모르고 못 막는(알고도 못 막는 것이 아니라!) 패스와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으로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물론 2012년의 그 덕스러운 풍채만 놓고보면 상상이 안가지만 이런 유연성은 상황에 맞춰, 동료에 맞춰 딱딱 패스를 내주며 강동희를 코트 최고의 야전사령관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덤으로 상당히 강력했던 3점슛까지. 여담으로, 강동희의 3점슛은 그 궤적이 매우 높게 올라가고각샷 수비수가 블록하기 상당히 까다로웠다.

특히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속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신중한 성격으로 경기를 유연하게 풀어나가는 강동희지만, 속공을 만들어 낼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를 풀어나가는 선수였다. 침착한 성격 때문에 승부사로서 어울리는 것은 아니라는 평도 있었지만, 강동희는 아예 승부사가 필요없는 순간을 만들어 내는 선수였다.

4 감독 생활

감독으로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승부조작의 길에 들어서며 자기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

해외 연수를 다녀온 후 마지막 팀이었던 LG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가 코치를 시작할 무렵엔 은퇴 당시의 김태환감독은 이미 팀을 떠난 상황이었고, 박종천감독이 새로 부임한 상황. 그러나 박종천 감독 체제에서 6강 PO에 꾸준히 들던 팀은 9위로 추락했고, 박종천 감독은 완전히 LG의 흑역사 감독으로 낙인찍힌다.(...) 결국 박종천 감독은 자진사임하고, 새로 들어온 신선우 감독이 코칭스태프 전면개편을 감행하면서 강동희도 LG에서 물러난다. 그 상황에서 강동희를 데리고 간 것이 원주 동부 프로미전창진 감독이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는 아무 연이 없고, 오직 하나 강동희가 대학 졸업할 때, 삼성전자 프런트던 전창진이 강동희를 스카우트하려고 만난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런데 과감하게 전창진은 그를 끌어들였고,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전창진 밑에서 감독 수업을 착실하게 받은 후, 2009년 전창진이 부산 KT 소닉붐으로 떠나자 감독 자리를 물려 받았다. 그리고 본인의 색깔을 더하기 시작했다. 전창진이 만들어 놓은 조직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것. 트리플 타워를 이용한 드롭 존 디펜스는 역대급으로 꼽히며, 강호의 입지를 꾸준히 이어가며,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5]했다. 비록 챔프전에서 전주 KCC 이지스에 막혔지만.

그러나 강동희 감독이 항상 환영만 받지는 않았던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굳이 단신용병을 꼭 뽑았다는 것인데 첫해에는 마퀸 챈들러(197cm) & 게리 윌킨슨(202cm) 조합의 용병을 뽑았다가 골밑에서 제대로 고생하기도 했다. 챈들러는 스코얼러로 기대를 했지만 운동을 전혀안해 몸상태가 엉망인 상태로 와서 전혀 골밑에서 보탬이 못되었고 거기에 태업은 기본이었지 게리 윌킨슨은 식물용병이었다. 역시 백형은 흑형한테 안되는건가? 이러니 김주성이 과부하가 걸려서 고생까지 했다. 그 이후에도 2명선발 제도일때 꼭 한명은 190cm대 중후반의 포워드 타입의 선수를 뽑아서 까이기도 했다. 김주성은 5번보다는 4번에서 뛰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선수이니만큼 용병제도가 2명보유 1명출전으로 바뀌는 2013시즌부터는 강동희 감독이 용병을 뽑는데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기도 한 대목이다. 장신 두명을 뽑아야 김주성을 5번으로 쓰는걸 피할수 있기 때문이다. 김주성도 나이가 많이 들었으므로 5번에서 무리한 플레이를 할시 과부하의 위험성도 있는지라...

신인선수를 선발할때는 유난히 가드를 많이 뽑는다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가드왕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백업센터로 쓸만한 장신선수 지명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있다. 벌써 몆년째 백업센터는 김봉수 하나로 버티고 있다. 가드덕후?

2011-12 시즌에는 아예 역대 최고 승률까지 노릴 기세. 감독으로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점이라면, 주전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임 초기보다는 백업의 활용이 높아지긴 했다. 결국 역대 최단 경기, 최고 승률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다만 최근 국내 각종 스포츠에 부는 승부조작의 기운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을 덜 보고 있다.

4강 PO에서 모비스를 3승 1패로 누르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지만, 또다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 2승 4패로 패하고 준우승[6]. 선수시절에도 허재에 가려 2인자 이미지가 강했는데[7], 어째 감독으로서도 콩라인의 기운이 엄습하고 있다.(...) 그래도 정규시즌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2011-12 시즌 감독상은 탔다. 허재보다 더 빨리 탔다.

그리고 2012년 5월 7일 혼혈 드래프트에서 이승준을 득템하는데 성공해서 콩라인 탈출의 청신호가 켜졌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부족한 백업센터만 보강한다면 물샐틈 없는 백업진을 보유하게 되니 절호의 기회라 할수있다. 하지만 강동희는 신인 뽑을 때마다 가드만 긁어모으는 오덕 가드 수집가잖아. 안될거야 그러나 2012~2013시즌에서 제대로 대형 참사를 내고 있는중이다. 김주성의 노쇠화와 이승준의 특성을 감안안하고 포워드형 용병인 브랜든 보우먼과 멸치수준의 웨이트를 가진 저마리오 데이비슨을 뽑았다가 전부 바꾸고 고생하는중. 그래서 농구 관련 커뮤니티에서의 동부팬들은 강동희 감독깡통감독이라고 까고 있는중이다. 더군다나 브랜든 보우먼이 삼성 이적후 인터뷰에서 미루어볼때 고생을 했다는 내용때문에 또 이래저래 까일 거리가 하나 느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농구관 자체가 빠른 선수만 고집하는 스타일이라는게 2012~2013시즌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런 똥고집이 이번시즌 삽질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중이다. <s>강동희 감독은 키 크고 덩치 큰 선수를 싫어해요!</s>

초반 삽질 이후 강팀답게 UTU를 시전하려고 했으나, 핵심 멤버인 김주성이 발목부상을 당하면서 또다시 하위권으로 처지고 말았다.

5 승부조작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파동이 일면서, 승부조작 연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강동희 검찰소환 만약 연루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선수가 아닌 지도자가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례인데다[8], 그가 농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여간 큰 게 아닌지라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었다.

본인은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2013년 3월 7일 출두하여 2011년 3월 플레이오프에서 수천만원을 받고 4차례에 걸쳐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당일 늦은 오후 강동희가 승부조작을 시인하였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일부 매체들의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차 조사까지 들어갔으며, 자정을 앞둔 시점에서도 계속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결국 3월 8일 새벽 2차 조사가 끝난 후 검찰에서는 강 감독이 승부조작에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 항목에 작성할 것.

2011년 6월에 YTN에 나와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은 가슴이 아프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정작 강동희 본인은 이미 3개월전에 조작을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3월 11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본인은 혐의를 계속해서 부인하고 있으나 담당 판사는 도주 위험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3월 12일 결국 승부조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동부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천하의 개쌍놈 확정 이후 김영만[9] 코치가 원주 동부 프로미의 감독대행이 되었으며, 2013~2014 시즌 동부는 이충희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

강동희의 승부조작에 대한 1차 공판이 2013년 4월 22일 오전 10시에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1차 공판에서 기소된 2011년 4700만원을 받고 4경기 조작한 혐의 중 2월 26일 경기에서 7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나머지 3월 11, 13, 19일 경기에 대한 혐의는 부인하였다.

이후 증인대질과 증거조사를 위해 2013년 5월 6일에 실시한 2차 공판 대질심문에서 브로커는 강동희가 4경기를 조작했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브로커와 치열한 법정공방이 예상된다.#

3차 공판은 2013년 5월 20일에 치뤄졌으나 혐의사실만 치열하게 떠넘기고공방만 벌여서 공판이 무성과로 끝났다. 결국 4차 공판이 확정되었으며 2013년 6월 11일 오후 5시에 동법원 3호 법정에서 실시될 예정이다. 이 공판에는 강동희측 증인으로 강동희의 밑에서 원주 동부 프로미의 코치를 하던 김영만이 재판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기로 되어 있다. 김영만 코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될 경우 주전급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줄이는 것이 관례"이고 "감독이 선수 몰래 고의적으로 패배를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했으나...

결국 8월 8일 1심에서 징역 10개월, 추징금 4700만원 판결이 내려졌으며, 강동희에 이어 검찰도 항소를 취하. 징역 10월이 확정되었다.[10] 그리고 KBL에서는 같은 달 6일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 판결을 근거로 강동희를 제명 조치했다. 영구제명이라는 용어는 KBL 규정 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뿐, 승부조작의 해악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영구제명이나 마찬가지이다.

6 이후

2016년 KBO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불거지면서, kt 위즈에서 승부조작 예방을 위한 강사로 위촉되었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승부조작이 위험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며, 한번 빠져들면 절대 나올수 없다는 본인의 경험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11]

추가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당시 있었던 몇 가지 사실을 언급헀다.

  • 최초 승부조작은 "1쿼터에 주전 선수들을 빼준다면 술값을 내준다"는 말에 승부조작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었고, 어차피 휴식을 위해 주전들을 뺄 계획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응한 것이 시작이었다.
  • 이후 3차례의 승부조작을 더해 총액 3700만원을 받았으며, 그 시기 터진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을 보고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 3700만원을 브로커에게 돌려주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으나, 그 때부터 2년간 브로커에 협박으로 시달렸다.

네티즌들은 이미 지은 죄를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할 만큼 고통받았던 것도 사실이고 더 이상 자신같은 사례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강의를 진행한 것인 만큼, 더 이상은 이런 실수를 하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반응이 다수이다.

이후에도 대전 KGC인삼공사 선수단 강연에도 등장하는등 승부조작 방지 교육 전담으로 나선 모습을 보여주고있다.[12]

7 이모저모

'강동희 농구교실'이라는 자기 이름을 딴 유소년 농구 육성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강동희가 현역 시절일 때부터 이미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것이 훗날 그가 감독이 될 때도 계속되었다. 물론 감독인 지금 직접 지도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교실이니 신경은 쓰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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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강동희가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리자 강동희 농구교실에서는 발빠르게 대처를 하였고 결국 KBC(Korea Basketball Club) 농구교실로 이름이 개명되었다(...) 당연히 여기서 본래 KBC의 K는 본래는 Korea가 아니라 본인 이름(Kang dong hee) 에서 따왔던 것.

1997년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했을 때 제작진들이 엉뚱한 사람을 찾아 당황했는데, 이는 프로그램 역사상 유일한 NG라고. KBS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어요

  1. 중앙대 4학년때 첫 선발
  2. 단짝이었던 허재와 함께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3. 강동희가 프로에 들어올땐 이미 한국 나이로 33이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좋은 기록을 세우고 은퇴했다. 승부조작으로 모든 걸 망치긴 했지만 선수 시절 그가 잘했던 선수인 건 맞다..
  4. 1988-89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한 기아자동차의 가드인 유재학이 MVP를 타게 되는데, 이 때 방열 감독이 고생한 한기범을 챙기지 않았다는 오해로부터 시작해 급기야 중앙대와 비중앙대의 전면적인 갈등으로 이어진다.
  5. 게다가, 당시 정규리그 1위 팀이었던 부산 KT 소닉붐을 제압했다.
  6. 참고로 안양 KGC인삼공사의 입장에서는 첫 우승이다.
  7. 이 점은 강동희 자신도 허재와 같이 한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당시 강동희의 멘트. "난 이전부터 다 맞추면서 살았잖아요. 형은 누구를 위해 기분을 맞추고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한 적이 없었어요. 왜냐고? 농구대통령이었으니까. 난 2인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맞춰가는 데에 익숙한 편이에요."
  8. 만약 그가 혐의를 시인할 경우, 국내 프로스포츠 감독으로선 최초로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례로 남는다. 결국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9. 물론 그 감독대행이 지금의 김영만 감독이다. 후임 이충희마저도 물러난 이후에 정식 감독으로 동부를 이끌게 되었다.
  10. 참고로 수감 기간에는 구속 기간이 포함되기 때문에 강동희는 10개월의 형량을 그대로 살 필요는 없고 2013년 3월에 구속되어 이미 6개월 가까이 수감됐기 때문에 나머지 4개월만 더 복역하면 된다. 2014년 초(아마도 1월말~2월초)에 만기출소했다.#
  11. 반발이 많지만 이런식의 교육은 흔히 있는것이다. 음주운전 범죄자나 도박중독자, 마약중독자가 음주운전, 도박, 마약 근절 교육에 강연을 하는게 예.
  12. 특이하게도 강연하는 강동희 옆에 안준호 전 감독이 등장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이걸 볼때 공적으로는 도움을 못줘도 사적으로 농구인들이 챙겨는 주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