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사랑의 집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개요

원주 홀로코스트의 집

2012년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진 장애인 인권유린 사건.

2 원주 사랑의 집?

장씨의 일대기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1]에 위치한 '하나님의 복지법인 사랑의 집(이하 사랑의 집)' 대표 장진남 목사[2]는 1964년부터 1986년까지 장애인 23명을 입양하여 친자식처럼 돌보고[3] 장애인 복지에 힘써온 '천사 아버지' 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원래 장씨는 신의주 출생으로, 어릴 적에 월남했다고 한다. 1964년, 군 제대 후[4] 대구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한 장애아를 주워다가 기른 것을 시작으로 미혼 상태로 정관수술을 한 뒤 점차 장애아를 한두명씩 모아다 기르게 되었고, 1973년부터 장씨의 어머니가 사 주신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의 야산 인근 땅에 있는 폐가를 개조하여 정착한 뒤 장애아를 돌보면서 주로 국내외에 부흥회를 다니거나 흑염소를 키워 육골즙을 만드는 등 생계 활동을 해오다가 1979년 이후 수차례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가 더해졌고 사랑의 집을 후원하는 후원자들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경부터 사랑의 집 일대 토지가 서울 남부지역 개발 붐으로 땅값이 올라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고 장씨도 사랑의 집 증축을 위해 땅을 측량하다가 사랑의 집 인근 땅에 남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갑자기 나타난 땅 주인들과 갈등을 겪다 땅 주인들이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장씨는 1986년에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의해 연행되어 대공분실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뒤 땅 주인들에 의해 온갖 방해와 협박을 당하다 1989년에 장씨가 1년 전에 낸 자서전 <주님의 손처럼 되고 싶어라>에 땅주인들 이름을 실명으로 기재하는 바람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90년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어 돌아와 보니 내발산동 사랑의 집은 이미 1989년 10월 6일부로 강서구청의 행정대집행에 의해 철거되었고(사유는 불법건축물 판정과 장애자복지법 위반), 장애아들은 당시 서울시립아동병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장씨는 이들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병원측에서 거액의 치료비 및 식비 등을 내야만 한다고 하자 결국 주머니 사정상 5명의 장애인들을 겨우 찾아 지리산, 월악산 등지를 떠돌면서 약초를 캐며 원시인과 다름없이 유랑생활을 하다가 1996년경에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산골에 터를 잡으며 2년 뒤에 새 집이 지어지자 이곳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3 실상

이 모든 것은 장진남 목사의 추악한 본성을 가리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장씨의 실상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말종,인간 쓰레기. 애당초 장씨 본인부터가 직함만 달고 있을 뿐인 가짜 목사였다.[5] 그는 사망한 원생의 시신을 10여 년이 넘도록 냉동고에 방치한 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했으며[6] 사망한 장애인들의 사망 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부당하게 장애인 수당을 챙기고 있었다.

게다가 사랑의 집에 있던 다른 원생들은 하나같이 기본적인 끼니조차도 챙기지 못한 듯한 학대의 흔적이 역력한 데다 장씨는 이들을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밭에서 강제로 노동을 시키고 심지어 삭발을 시키고 몸에 그들의 이름[7]문신으로 새기기까지 하는 등 도저히 '천사 아버지' 로 불리던 인물이 할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심지어 폭행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장애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사진으로 찍어 남기기까지 했다.

또한 이곳의 장애인들은 모두 친부모가 있었지만 경제적인 가정 형편 등으로 인해 맡겨진 원생들이었는데 장씨는 이들을 입양해서 친권자가 된 뒤 엄청난 뒷돈을 챙겨왔다. 장씨의 호적에는 21명이 올라와 있었지만, 정작 실제 남아있는 자녀 수는 고작 4명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1989년에 내발산동 사랑의 집이 강제철거되자 동거했던 장애인들은 서울시립아동병원을 거쳐 각지의 장애인 시설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후 장씨가 5명을 겨우 찾아냈으나 그 중 두 명은 2000, 2002년에 각각 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2012년 당시에 거주하던 4명 중 나머지 한 명은 2000년에 다른 시설에서 되찾아 데려온이라 쓰고 끌려온 것이다.

거기에 4명을 21명으로 불린 수법도 가관인데 사진을 조작해서 사람 수를 늘린 것도 모자라[8] 한 명의 주민등록번호를 2중으로 등록해 1인 2역을 시키는 등 온갖 치졸한 수법을 동원했다.[9] 이렇게 21명이라는 '양자'를 유지해서 국가 보조금만 무려 2억원에 후원금만 5억 상당의 어마어마한 액수를 챙겼던 것. 내발산동 시절 장씨의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방송에 의해서 양말부터 억대의 돈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매스컴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진상이 드러나다

결국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취재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사랑의 집의 실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첫 번째 르포는 2012년 6월에 방송되었고 이후 큰 파장을 불렀다. 방송을 본 많은 시청자들이 공분했고 일부 시청자들은 장애인 인권 유린이라는 측면에서 과거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이 연상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두 번째 취재에서는 장애인 가족들과 장애인 단체들이 앞장서서 사랑의 집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장씨 부부[10]는 잘못을 시인하기는 커녕 오히려 취재진을 '채증' 하겠다며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댔고[11] 시종일관 고성과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심지어 사랑의 집에 있던 장애인들의 친부모가 가져온 증명서류마저 '이거 다 가짜다' 라면서 그들 앞에서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병크를 터뜨리는 등 끝까지 뻔뻔한 태도를 보여 공분을 샀다. 게다가 장씨는 취재진과 경찰, 심지어 장애인 단체들에게까지 온갖 혐의를 뒤집어씌워 고소하기에 이르른다. 한 술 더 떠 장씨의 아내는 경찰과 취재진을 향해 '악인들', '악마' 운운하며 온갖 폭언과 욕설, 저주를 서슴치 않는 등 추악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게다가 경찰 역시 태도도 소극적이었는데, 막상 사랑의 집 앞에 경찰이 출동하자 "체포영장이 나올 때까지 못 들어간다."고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사랑의 집에서 장애인 4명이 무사히 구출되었음에도 "살아만 있어주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이후 한 차례 더 방송이 나간 다음, 장장 6개월 동안의 진실 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장애인 단체와 인권단체가 장씨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힘입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SBS의 취재 내용을 증거로 채택하여 조사를 시작했으며 검찰도 사랑의 집을 압수수색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장씨가 이런 사태를 대비해 미리 손을 쓴 것인지 마당에서는 각종 서류 등을 불태운 흔적이 발견되었고 개 뼈 조각도 발견되었다.[12]

5 그 이후

2012년 12월 장씨는 구속되었지만 췌장암 드립을 치면서 진술을 거부하는 데다 진짜 췌장암 환자면 그 지경까지 언성 높일 기운도 없을 텐데? "배정훈[13]이 3억원을 달라는데 안줘서 그러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여전히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비리에 연루된 높으신 분들이라도 된 양 휠체어까지 타고 나타나는 패기를 시전했다. 어디서 약을 팔아 심지어 사랑의 집 측에서는 기존의 사랑의 집 홈페이지를 긴급 개편하여 방송에서 조작했다는 식으로 필사적으로 장씨를 옹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나 대중들은 당연히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장진남이나 장진남 옹호하고 홈페이지 만든 놈이나그야말로 뻔뻔함류 甲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 장씨 측이 사진 등을 제시하며 주장한 내용 전문.

보다못한 한 누리꾼이 방송을보고 2013년 2월 8일에 아고라 서명을 올렸는데 얼마나 흥분하고 분노했는지 서명운동 제목이 장애인21명을입양 학대한 희대의 사기꾼을 역사가 심판해야한다라고 되어있다.[14]

한편 사랑의 집에 있던 원생들은 다른 장애인 시설로 옮겨가 생활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원생 중 한 명인 장성아 씨는 사랑의 집을 나온 이후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고[15] 병세가 점점 악화된 끝에 결국 2013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에 반해 장씨는 여전히 아내와 지인들을 동원해 자식들을 빙자한 본인의 중요한 돈 공급원들을 찾고 있다고 한다.

2013년 2월 재판이 진행중이나 장씨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심지어 법원에 특별변호인까지 신청한 상태이며 보석 신청도 계획 중이라고 한다. 결국 1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했으나 일부 진술은 장애인의 지적 능력을 감안해 신빙성이 낮다는 이유로 기각했으며 결국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했지만 장애인 단체들은 판결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면서 항소하기로 했다.

2013년 7월 26일에 1989년 내발산동 사랑의 집 강제철거 당시 다른 원생들과 시설로 같이 옮겨졌던 한 원생이 경기도 이천의 한 시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13년 9월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비슷할 정도로 엽기적인 홍천 실로암 연못의 집 사건같은 방송사의 비슷한 프로그램(#910)에서 고발되었다.

6 후속보도,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증언

위에 내용에 관한 방송 이후 내발산동 시절 15살 때 5번만에 탈출한 원생이 수십 년 뒤 세월 뒤에 부모와 재회 후 이어지는 증언으로 시작되는 후속 르포가 2013년 4월 12일에 방영되었는데 그 증언에 따르면 더 충격적인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그는 장씨 부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4번이나 시도했다가 팔의 문신 탓에 장씨에게 붙잡혀 물고문하고 손발톱을 빼고 눈을 바늘로 찔리는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 정도면 가히 학대를 넘어선 고문 수준이다.

그리고 원생의 증언에 따르면 원장이 한 여성 원생[16]을 데리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정황상 성폭행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만일 이게 사실이었다면 이건 도가니 시즌 2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리고 이 증언으로 인해 결정적인 것이 드러났는데 학대를 견디지 못해 숨진 원생만 6명[17]이라고 하고 이 6명은 당시 사랑의 집이 있던 강서구 발산동 구 사랑의 집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고 한다.

암매장된 지역을 포함한 구 사랑의 집은 1989년에 강서구의 행정대집행에 따라 철거된 이후 빈 땅으로 남다가 2004년부터 재개발에 따라 SH공사에서 지은 마곡수명산파크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찜찜해서 어떻게 살까[18] 암매장된 자리는 그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지역이라고 한다. 유골의 행방을 찾을 수는 있었으나 이미 공사업체에서 유골을 발굴한 이후 무연고자 시신으로 한 사찰에 화장을 요청했기 때문에 정확한 DNA 감식이 힘들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저 6명의 신원을 확인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 방영분을 위해서 제작진들은 해당 원생의 증언을 베이스로 재연극은 물론이고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 사랑의 집을 재현한 세트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방송 중 장씨 측의 변호를 서는 변호사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보통 생각이 있는 변호사라면 사건이 사건인 만큼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라거나 말할 수 없다라고 하겠지만 변호사는 장씨측이 고용한 사람답게 "도의적인 책임은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도저히 용납 못할 아버지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2013년 9월에 경향신문에서 사랑의 집 원생들의 근황을 알려주는 기사가 실렸다. 원생 4명은 모두 구출되었으며 지금은 시설에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악몽을 꾸는 등 정신적 트라우마가 심각했으며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실제로 장씨의 부인은 친권을 주장하며 이들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서울가정법원에 친권 파기 소송을 진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성인인데도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관할 구청에서 주민등록증조차 받지 못했다.

2014년 1월 23일에는 그동안 병원 냉동고에 안치되어 있었던 원생 故 장성희씨의 장례가 12년만에 치러지고 추모제가 열렸다#.

2014년 7월 2일에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사실상 장씨와의 친권 관계가 아님을 인정하였다.# 장씨는 이에 항소했으나 2015년 5월 14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장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공식적으로 친권을 파기했다.근데 췌장암 걸린놈이 아직도 안뒈졌어?

원주 사랑의 집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원주 사랑의 집 사건 백서를 참조.

2015년 7월 31일에 사랑의 집의 맏형이었던 이성민(장성민) 씨가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광주지역의 장애인 극단 '그래도'에서 제작한 <행복한 동행>이라는 제목의 연극은 이 사건 피해자의 주변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1. 원주로 옮기기 전까지는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2. 프로게이머 장진남과는 동명이인이다.
  3. 자기 자신의 '목사' 직함에 대해 "숨을 바쳐 랑한다는 의미의 목사" 라는 개드립 표현을 썼다. 덧붙여 대외적으로는 군복(대한민국 해병대이다)이나 허름한 청자켓/청바지를 주로 입었다.
  4. 아마추어 권투선수 출신이라는 얘기도 있고, 2000년에 낸 자서전인 <나 주님만 따르리라>를 통해 해병대에서 복무했다고 밝혔으나, 둘 다 사실무근일 가능성이 높다.
  5.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전도사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6. 시신은 두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이 중 한 구는 장례를 치렀으나 남은 한 구는 장씨가 장례를 계속 거부하고 있어 계속 냉동고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1심 판결 이후에 배다른 형제의 도움으로 직장암으로 사망한 다른 원생의 1주기 추모제와 함께 2014년 1월 23일에 장례를 치뤘다.
  7. 장씨가 장애인들을 입양하면서 임의로 지어준 이름들로 본명이 아니다.
  8. 전문가에 의하면 포토샵을 대충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도 간단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한 합성 수법이라고 한다.
  9. 또한 이러한 블러핑을 위해서 후술할 희생자의 존재까지 동원하기도 하였다. 예토전생 돋네
  10. 사실 현재의 아내는 세 번째로 결혼한 여자이다. 첫 번째 부인은 1977년에 협의 이혼했고, 둘째 부인은 1990년 내발산동 사랑의 집 강제철거 이후 헤어지고 나서 1년 뒤에 재판상 이혼하였다.
  11. 당연히 이 인간의 이런 행위는 채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당장 정식 수사기관인 경찰조차도 집회나 시위 현장 등에서 마구잡이 채증을 하다가 큰 논란이 빚어진 사례가 여러 차례 보도된 것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12. 당연히 개들한테도 그다지 잘해주는 것 같지 않다. 밥도 음식 쓰레기 수준. 그 밥마저도 추위때문에 얼어붙어 있었다.
  13. 궁금한 이야기 Y 담당PD. 참고로 이 PD는 2014년 같은 방송사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부산 형제복지원사건 편의 연출을 맡았다.
  14. 글을 보면 중2병스러울수도 있겠지만 서명한 인원수를보면 방송을본 시청자들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분노를 느꼈는지 알수있다.
  15. 사랑의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종양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적절하게 치료를 받지 못해 점점 전이되어갔던 것.
  16. 대부분의 원생은 옷도 제대로 입히지 않았으며, 손님이 올 때와 사진 촬영 때만 입혔다고 한다.
  17. 실제 발견된 유골은 7명이라고 한다.
  18. 아파트가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장씨가 간간히 기거하던 가건물이 있었다. 장씨는 1989년 강제철거 이후 지리산 등지를 유랑하다 원주로 이전한 이후에도 수없이 내발산동 구 사랑의 집 터를 다시 찾으려다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