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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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여포장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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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布
(? ~ 198년)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자는 봉선(奉先). 병주 오원군 구원현 사람.

2 정사

2.1 정원 휘하

사납고 용맹하여 병주에서 복무했다. 병주자사 정원이 기도위가 되어 하내에 주둔하니 여포를 주부(主簿)로 삼아 크게 친근하게 대우했다. 영제가 붕어하자 정원은 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 하진과 함께 여러 황문들을 주살할 것을 도모하고 집금오에 임명되었다.

하진이 패망하고 동탁이 수도로 들어왔는데, 장차 난을 일으키기 위해 정원을 죽이고 그 군사들을 아우르려 했다. 동탁은 여포가 정원에게 신임 받는 것을 보고 여포를 꾀어 정원을 죽이게 했다. 여포가 정원의 머리를 베어 동탁에게로 나아가니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로 삼고 매우 아끼고 신임하여 부자(父子) 사이가 되기로 맹세했다.

2.2 양인 전투

후한서 동탁열전에 따르면 낙양 사람 수백만을 장안으로 옮기는데 군대를 동원해서 몰아서 재촉하니 서로 짓밟히고 굶어죽고 시체가 길가에 가득했다. 동탁이 스스로 필규원 안에 주둔하고 궁궐이나 관청이나 민가를 모조리 태워서 2백 리 안에 남겨진 게 없었다. 다시 여포를 시켜서 황제들의 능과 공경 대신의 무덤도 파헤쳐서 진기한 보물을 거두었다.

손견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처음 손견이 동탁을 토벌할 때, 양현의 양인에 도착하였다. 동탁 또한 보병과 기병 5천을 보내 맞게 하였는데, 진군태수 호진을 대독호로 삼고, 여포를 기독으로 삼고, 그 나머지 보병과 기병의 장교와 도독인 자가 아주 많았다. 호진이 성격이 급해 미리 선언했다.

지금 이번 출행에서는 응당 한명의 청수(손견)를 참수하고, 군대를 정돈해 돌아갈 뿐이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듣고 그를 미워했다. 군대가 광성에 도착하니, 양인성과 수십 리 거리였다. 날이 저물자 군사와 말의 피로가 극심하여 응당 멈춰서 묵어야 했지만, 또한 본래 동탁에게 받은 명령서에는 광성에서 묵으며 말을 어루만져 먹이고, 밤에 진군하여 새벽을 틈타 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호진을 미워하고 꺼려서, 적들이 일을 망쳐주길 바랬지만, 여포 등이 선언했다.

양인성 성중의 적들이 이미 도주하였으니, 응당 추격하여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칠 것이다.

바로 밤에 진군하였지만, 성중의 수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 엄습할 수 없었다. 이에 관리와 병사들은 주리고 목말라, 사람과 말이 극도로 피곤하였는데, 또 밤이 되니 진영에는 참호와 보루도 없었다. 갑옷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데, 여포가 또 깜짝 놀라 외쳤다.

성중의 적들이 나왔다.

군사들은 요란하게 달아나 모두 갑옷을 버리고 안장과 말을 잃었다. 10여리를 행군하여 적이 없음을 알자, 날이 밝아올 쯤 다시 되돌아와 병기를 수습하고 진격하여 성을 공격하려 했다. 성의 수비는 이미 견고하고 파놓은 참호도 깊으니, 호진 등은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한서 동탁열전에 따르면 동탁이 몸소 출전하여 손견과 제릉묘한에서 싸웠으나 동탁이 패주하고 민지에 다시 주둔한 뒤에 섬(陝) 지방에서 병사를 모았다. 손견이 낙양 선양성문에 진격하여서 다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가 또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손견이 곧 종묘를 깨끗이 하고서 여러 능묘를 정비한 뒤에 군사를 나누어서 함곡관을 나와서 신안, 민지간까지 가서 이(涞) 강을 경계로 동탁과 맞섰다.

2.3 동탁 휘하

여포는 활쏘기와 기마에 능하고 완력이 남보다 뛰어나 비장(飛將)으로 불리었다. 점차 승진하여 중랑장에 이르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동탁은 스스로 남들을 무례하게 대했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거동할 때 늘 여포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동탁의 성정은 굳세면서도 편협해 화가 나면 후환을 생각지 않았다.

일찍이 여포가 사소하게 뜻을 거스르자 수극을 뽑아 여포에게 던진 일이 있었다. 여포는 용력하고 민첩하여 이를 피하고 동탁에게 사죄하여 동탁의 화 또한 풀렸으나, 이로 말미암아 은밀히 동탁을 원망하게 되었다. 동탁은 늘 여포에게 중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비와 사통하니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며 내심 불안해했다.

그 이전에 사도 왕윤은 여포가 동향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튼튼하다하여 그를 두텁게 대우했다. 그 뒤 여포는 왕윤을 방문하여 동탁이 자신을 거의 죽일 뻔 한일을 말했다. 이때 왕윤은 복야 사손서와 함께 동탁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여포에게 내응하도록 청했다. 여포가 말했다.

부자(父子) 사이인데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왕윤이 말했다.

그대의 성은 여(呂)이니 본래 골육도 아니오. 지금 죽음을 걱정할 겨를도 없는데 무슨 부자지간이라 하시오?

마침내 여포가 이를 허락하고 손수 칼로 동탁을 찔렀다.

후한서 동탁열전에 따르면 당시에 왕윤이 여포와 공모하고 복야 사손서를 포섭하여서 동탁을 처형하려 했다. 어떤 사람이 '여(呂)' 자를 베(布)에 쓰고서 등에 지고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포입니다."라고 노래하였다. 동탁에게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었지만 동탁은 깨닫지 못하였다. 192년 4월에 황제가 병에 걸렸다가 새로 치유되자 백관이 미영전에 모였다. 동탁이 조복을 입고서 수레를 타고 가는데 말이 놀라 뛰더니 진흙탕에 빠져서 다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동탁의 첩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동탁이 듣지 않고 곧 떠났다.

병사들이 늘어서서 길가를 가득 채웠다. 자신이 사는 보루를 지나서 궁궐에 다다르는데 좌우로 보병과 기병이 호위하여 사방을 방비하고 여포 등에게 명령하여서 앞뒤를 경호하게 하였다. 왕윤이 사손서에게 몰래 그 일을 알려주고 스스로 조서를 쓰게 한 뒤에 여포에게 주었다. 기도위 이숙과 여포가 한 마음으로 용사 십여 인에게 호위 병사의 옷을 입혀서 북액문 안에서 동탁을 기다리게 하였다.

동탁이 들어가려는데 말이 놀라며 가지 않으려 하니까 괴이하고 놀라워서 돌아가려 하였다. 여포가 계속 갈 것을 권하니 마침내 문에 들어섰다. 이숙이 으로 찔렀지만, 동탁이 속에 갑옷을 받쳐 입어서 극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팔만 다치고서 수레에서 떨어지면서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여포야! 어디 있느냐?!

여포가 말했다.

조서를 받들어서 역적을 죽이러 왔다!

동탁이 크게 욕했다.

어리석은 개새끼가 감히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여포가 기합을 넣어서 창으로 동탁을 찌르고서 병사들을 다그쳐서 어서 베게 하였다. 주부 전의(田儀)와 동탁의 창고지기 두전(頭前)이 그 시체를 애도하므로 여포가 죽였다.

마침내 동탁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주부 전경(田景)이 동탁의 시신 앞으로 달려가니 여포가 또 그를 죽였다. 모두 세 사람을 죽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2.4 방랑군

이각, 곽사전에 따르면 동탁이 죽자 여포는 이숙을 시켜 섬(陝)으로 가게 하여 황제의 명령으로 우보를 주살하려 했다. 우보 등이 역격해 이숙과 싸워 이숙이 홍농으로 패주하자 여포가 이숙을 주살했다.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 가절로 삼고 의례는 삼공에 비견되도록 하고 온후(溫侯)로 올려 봉하여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후한서 왕윤열전에 따르면 애초에 왕윤이 동탁의 부곡(部曲)을 사면하는 걸 의논하고, 여포 역시 수차례 그러도록 권한다. 그 뒤 의심하여 말한다.

이 패거리는 죄가 없고 그 주인을 따랐을 뿐이지만, 지금 흉악한 역적으로 일컫고 특별히 사면해준다면 스스로 의혹을 일으키게 하기에 족하니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오.

또한 여포도 동탁의 재물로써 공경, 대신, 장교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지만 왕윤이 역시 따르지 않는다. 왕윤이 평소 여포를 가볍게 보고 검객으로 대우한다. 여포 역시 그 공로에 기대어 스스로 자주 으스댔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점차 불평한다.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인 후 양주인을 두려워하고 꺼리었고 양주인 들도 모두 여포에 원한을 품었다. 이 때문에 이각 등이 마침내 서로 결탁한 뒤 돌아와 장안성을 공격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곽사는 성 북쪽에 있었다. 여포는 성문을 열고 군을 이끌고 곽사에게로 나아가 말했다.

군사들을 물리고 다만 우리끼리 몸소 싸워 승부를 가름하자.

곽사와 여포는 더불어 싸웠는데 여포가 로 곽사를 찌르자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이 앞으로 와 곽사를 구했다. 이에 곽사와 여포는 각각 그만두었다.

여포가 이를 막지 못했고 마침내 이각 등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동탁이 죽은 후 60일이 지나 여포 또한 패하니, 수백 기를 이끌고 무관을 나와 원술에게로 가려 했다.

이각, 곽사전 주석 한기에 따르면 여포는 군이 패하자 청쇄문 바깥에 말을 세워놓고 왕윤에게 말했다.

공도 함께 가시지요.

왕윤이 말했다.

국가를 평안케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니 만약 이를 이루지 못하면 몸을 바쳐 죽을 뿐이오.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여 원술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그의 덕을 보고자 했으나 원술은 그의 언행을 이리저리 고침을 꺼리어 여포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

이에 북쪽으로 원소에게로 가니, 원소는 여포와 함께 기주 상산국에서 장연을 공격했다. 장연은 정병 1만 남짓에 기병이 수천에 이르렀다. 여포는 적토마라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친근하게 지내던 성렴, 위월 등과 함께 적의 예봉을 꺾고 적진에 돌진하여 마침내 장연군을 격파했다.

조만전에 따르면 그때 사람들이 말했다.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

그리고 군사들을 구해 더욱 늘리고 장졸들이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소가 이를 근심하고 꺼렸다. 여포가 그 뜻을 알아채고 원소로부터 떠날 것을 청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자신이 원씨에게 공(功)이 있다하여 원소 휘하의 제장들을 업신여기며 오만하게 굴고 그들의 관직이 함부로 서치(署置)한 것이라 하여 족히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2] 여포가 낙양으로 돌아간다고 청하자 원소는 여포를 영 사례교위로 삼았는데, 겉으로는 응당 보내줄 것이라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여포를 죽이려 했다.

원소는 그가 돌아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밤중에 장사를 보내 여포를 습격해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다음 날, 여포가 출발하려 할 때 원소는 갑옷을 입은 병사 30인을 보내며 여포를 전송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포는 그들을 장막 옆에 멈추게 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장막 안에서 을 연주하게 했다. 원소의 군사들이 누워있자 여포는 머지않아 장막을 나와 떠났는데 원소의 군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중에 거사하여 여포의 이불을 베고는 여포를 죽인 것으로 여겼다. 다음 날, 원소가 알고 있는 사실을 캐어물어 여포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이에 성문을 닫았다. 여포는 마침내 군을 이끌고 떠났다.

그 일이 드러나자 여포는 하내로 달아나 장양과 합쳤다. 원소는 군사들에게 이를 추격하게 했는데 모두 여포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가 없었다.

여포가 원소를 버리고 장양을 좇으려 할 때 장막에게 들렀는데, 서로 헤어질 때 손을 잡고 맹세하니 원소가 이 일을 듣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장막은 조조가 끝내 원소를 위해 자신을 해치리라 생각하고 내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영웅기에 따르면 장양과 그의 부곡(部曲), 제장들은 이각, 곽사의 현상 수배를 받자 함께 여포를 도모하려 했다. 여포가 이를 듣고 장양에게 말했다.

나는 경의 동향이니 경이 나를 죽이더라도 경에게는 미약할 것이오. 차라리 나를 산 채로 붙잡아 팔아넘기느니만 못하니, 그리 한다면 가히 이각, 곽사에게 지극한 관작과 총애를 얻을 것이오.

이에 장양은 겉으로는 이각, 곽사에 따르는 것처럼 했으나 실제로는 여포를 보호했다. 이각, 곽사는 이를 우려하여 다시 크게 봉하는 조서를 내리고 여포를 영천태수로 삼았다.

2.5 복양 전투

194년, 조조가 다시 도겸을 정벌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는 조조의 장수 진궁, 종사중랑 허사, 왕해와 함께 조조에게 모반할 것을 공모했다. 진궁이 장막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연주는 군사들이 동쪽을 정벌하느라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로 싸움을 잘해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만약 잠시 그를 맞아들여 함께 연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장막이 이를 따랐다.

당초 조조는 진궁에게 군을 이끌고 동군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는데, 마침내 그 군사들로 동쪽으로 여포를 맞아 연주목으로 삼았다. 군현이 모두 호응했고 다만 견성, 동아, 범현만이 조조 편에 남아 수비했다.

조조가 군을 이끌고 돌아와 복양에서 여포와 싸웠는데 조조 군이 불리하여 백 여 일을 서로 대치했다. 이 해는 날이 가물었고 황충이 일어 곡식이 부족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라 여포는 동쪽으로 가서 산양에 주둔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195년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 이봉이 연주 산양군 거야현에 주둔했다. 조조가 이를 공격하자 여포가 설란을 구원했는데, 설란은 패하고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진란 등을 참수했다. 여포는 다시 산양군 동민현에서부터 진궁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싸웠다. 이때 조조의 군사들이 적었는데 복병을 설치하고 기습부대를 풀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다.

2년 사이에 조조는 여러 성들을 모두 되찾았고, 연주 산양군 거야현에서 여포를 격파하니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장막은 여포를 뒤따르며 장초를 남겨 가속들을 거느리고 진류군 옹구현에 주둔하도록 했다. 조조가 이를 공격해 몇 달 동안 포위하여 함락하고 장초와 그 가속들을 참수했다. 장막은 원술에게 가서 구원을 청하려다 미처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2.6 서주에서

진군전에 따르면 유비는 예주자사로 임명된 후, 진군을 불러서 별가로 삼았다. 이때 도겸이 병사하였으므로, 서주에서는 유비를 환영하였다. 유비는 가려고 했는데, 진군이 충고의 말을 했다.

원술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동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여포가 만일 장군의 뒤를 습격한다면, 장군은 설령 서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결국 서주로 갔고, 원술과 충돌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유비를 만나보고 그를 매우 공경했다. 유비에게 말했다.

나는 경과 더불어 같은 변경 땅 사람이오. 나는 동탁을 주살하고자 한 것인데, 내가 동탁을 죽이고 동쪽으로 나오니 모두 나를 죽이려고 했소.

유비를 청해 장막 안의 부인의 상(床) 위에 오르게 하고는, 부인에게 절하도록 하고 술을 따르며 먹고 마시고 유비를 동생이라 불렀다. 유비는 여포의 말이 수시로 변함을 보고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내심 기쁘지 않았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章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장비)이 하비상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 천 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으로 향하면 단양군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

유비가 동쪽으로 가서 원술을 공격하자 여포는 하비를 습격해 차지하고, 유비가 되돌아가 여포에 귀의했다.

선주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제장들이 여포에게 말했다.

유비는 여러 차례 언행을 이리저리 고쳤으니 기르기 어렵습니다. 의당 조기에 도모해야 합니다.

여포가 들어주지 않고 이 일을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는 내심 불안하여 스스로 의탁할 것을 청하고, 사람을 시켜 여포를 설득해 소패에 주둔하기를 원했다. 이에 여포가 유비를 소패로 보냈다.

여포는 유비를 소패에 주둔하게 하고, 서주자사를 자칭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처음 서주에 들어왔을 때 원술에게 서신을 보냈다. 원술이 답서를 보내 말했다.

  •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켜 나의 문호(門戶)에까지 해를 입혔는데, 장군이 동탁을 주살하고 그 수급을 보내니 그 공이 첫째요.
  • 지난 날, 장수 김원휴(김상)가 연주에 이르렀을 때 조조에게 격파되어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소. 장군이 연주를 격파해 다시 내 면목을 세워주니 그 공이 두 번째요.
  • 유비가 거병해 나와 싸웠소. 내가 장군의 명령을 어김에 힘입어 유비를 격파했으니 그 공이 세 번째요.
장군은 내게 이 세 가지 큰 공을 세워주었으니 받들겠소. 장군은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군량이 부족하여 쌀 20만 곡을 보내니 맞이해 주시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응당 다시 끊이지 않게 보낼 것이오. 만약 병기와 싸움 도구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크건 작건 오직 명하기 바라오.

여포가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하비로 갔다.

장광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여포가 서주를 습격해서 서주목이 되고 장굉손책과 같이 일하지 못하도록 하고자했다. 그래서 여포는 장굉을 무재로 추천하며 편지를 써서 장굉을 보내도록 했다.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또한 그에게 굴복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손책 역시 장굉을 중히 여기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여포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장굉을 보내지 않았다.

원술이 장수 기령 등과 보병과 기병 3만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니 유비는 여포에게 구원을 청했다. 여포의 제장들이 여포에게 말했다.

장군은 늘 유비를 죽이고자 했으니 이제 가히 원술의 손을 빌릴 만합니다.

여포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원술이 만약 유비를 격파하면 북쪽으로 태산같은 제장들과 연결될 것이니 나는 원술에게 포위당하게 되오.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

곧 보병 1천, 기병 2백을 엄비해 급히 유비에게로 나아갔다. 기령 등은 여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을 거두고 감히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여포는 패(沛) 남서쪽 1리 되는 곳에 둔치고 시종 군사를 보내 기령 등을 청하니 기령 등이 또한 여포를 청해 함께 먹고 마셨다. 여포가 기령 등에게 말했다.

현덕(유비)은 내 동생이오. 동생이 제군들에게 곤란을 겪으니 이 때문에 구원하러 왔소이다. 내 성정이 어울려 싸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싸움을 화해시키는 것은 좋아하오.

여포는 문지기 관원에 명해 영문에 극 하나를 세우게 했다. 여포가 말했다.

제군들은 내가 극의 가지창 부분을 쏘는 것을 보시오. 적중하면 제군들은 응당 화해한 후 떠나고 적중하지 않으면 남아서 결투하시오.

여포가 활을 들어 극을 쏘았는데 극의 가지창 부분을 정확히 맞췄다. 제장들이 모두 놀라 말했다.

장군은 제왕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다음 날, 다시 연회를 베푼 뒤 각자 군을 물렸다.

영웅기에 따르면 고순은 사람됨이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선물을 받지 않았다. 칠백 여 군사를 거느렸으나 천 명이라 일컬었는데, 갑옷, 싸움 도구가 모두 잘 연습하고,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陷陳營)이라 불렀다. 고순이 매번 여포에게 간언했다.

장군께서 몸을 움직이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196년 6월, 밤중에 여포의 장수 하내인 학맹을 반란을 일으켜 군사들을 이끌고 여포의 치소인 하비부로 쳐들어왔다. 청사의 합문 밖에 이르러 함께 함성을 지르며 합문을 공격했는데, 문이 견고해 들어가지 못했다. 여포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누군지 몰랐기에 곧바로 부인을 이끌고 관을 쓰지 않은 맨머리에 옷을 갖춰 입지 못하고 측간으로 들어가 벽을 밀어내고 빠져나갔고, 도독 고순의 군영으로 가 고순의 군영 문을 곧바로 밀어젖히고 들어갔다. 고순이 말했다.

장군께서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여포가 말했다.

하내 놈들의 말소리였소.

고순이 말했다.

이는 학맹이로군요.

고순은 즉시 엄병(嚴兵)하여 하비부로 들어가 학맹의 군사들에게 일제히 궁노를 쏘았다. 학맹의 군사들은 어지러워져 패주했는데 날이 밝자 그들의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학맹의 장수 조성이 학맹에게 반기를 드니, 학맹은 조성을 찌르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 고순이 학맹을 참수하고는 조성을 수레에 태워 여포에게로 보냈다. 여포가 묻자 조성이 대답했다.

학맹은 원술의 모책을 받들었습니다.

함께 모의한 자가 모두 누구인지 묻자 조성이 말했다.

진궁이 공모했습니다.

이때 진궁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얼굴이 붉어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였다. 여포는 진궁이 대장이므로 이를 불문에 부쳤다. 조성이 말했다.

학맹이 늘 이에 관해 물었으나 저 조성은 여장군은 대장으로 비범하니 공격할 수 없다고 했으나 뜻밖에 학맹이 미쳐서 혹되어 그치지 못했습니다.

여포가 말했다.

경이 건아(健兒)요!

조성을 잘 치료하고 보살폈고 상처가 다 낫자 학맹의 옛 군영을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하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또한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원술은 여포와 결탁해 원군으로 삼고자 하여, 이에 자신의 아들(원요)을 위해 여포의 딸(여씨)을 청하니 여포가 이를 허락했다. 원술은 사자 한윤을 보내 제호를 참칭한 일에 관해 여포에게 고하고 아울러 며느리를 맞이하고자 했다.

패상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혼인으로 맺어지면 서주와 양주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는 것이니 장차 나라 전체의 어려움이 되리라 여겼다. 이에 여포에게로 가서 설득했다.

조조가 천자를 봉영해 국정을 보좌하니, 장군께서는 의당 그와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혼인을 맺으면 천하에 불의의 이름을 덮어쓰게 되니 필시 누란지위가 있을 것입니다.

여포는 또한 원술이 당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딸이 이미 길을 떠났으나 이를 뒤쫓아 되돌아오게 하여 혼인을 끊고, 한윤을 형구에 묶어 보내니 허도의 저자거리에 참수되어 목이 내걸리게 되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당초 천자(헌제)가 하동에 있을 때 손수 붓으로 판서를 써서 여포에게 와서 영접하도록 했다. 여포의 군에는 비축된 양식이 없어 능히 응하지 못하니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여포를 평동장군으로 삼고 평도후에 봉했는데, 사자가 산양의 경계에서 문서를 잃어버렸다. 또한 조조가 손수 서신을 보내 여포를 후하게 위로하고 몸을 일으켜 천자를 영접하여 응당 천하를 평정할 뜻을 품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조서를 내려 공손찬, 원술, 한섬, 양봉 등을 상을 걸고 체포했다.

진규는 아들인 진등을 조조에게 사자로 보내고자 했으나 여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사자가 당도해 여포를 좌장군에 임명하자,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진등이 가는 것을 들어주고, 아울러 장(章)을 받들고 가서 은혜에 감사하게 했다.

진등이 조조를 접견하며 진술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꾀가 없고 행동거지가 가벼우니 의당 조기에 도모해야 한다.

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이리 새끼와 같은 야심을 가진 자로 실로 오래도록 기르기 어려우니, 경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 실체를 통찰할 수 있겠소.

이에 진규의 관질을 중(中) 2천석으로 올리고 진등을 광릉태수로 삼았다. 헤어질 때 조조는 진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동쪽의 일은 경에게 부탁하오.

그리고 진등에게 명해 은밀히 부하의 무리를 모아 내응하도록 했다.

당초 여포는 진등이 서주목을 받아오기를 원했었는데, 진등이 돌아오자 분노하여 극을 뽑아 탁자를 찍으며 말했다.

경의 부친이 내게 조조과 협력하길 권하여 공로(원술)와의 혼사도 끊었소. 내가 구하던 것은 지금 하나라도 얻은 것이 없는데, 경의 부자는 나란히 지위가 오르고 권세가 중해졌으니 경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오!

진등이 태연하게 천천히 여포를 깨우치듯 말했다.

제가 조조를 만나 장군을 대우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니, 배부르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부릴 수 있으나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라 했습니다.

이에 여포가 노기를 풀었다.

여포가 크게 기뻐하며 다시 사자를 보내 천자에게 글을 올렸다.

신이 예전에 조조와 더불어 싸웠기에, 이제 조조가 폐하를 보위하고 보좌하니 스스로 뒤따르려 했으나 의심과 원한이 남아있을까 두려워 서주에 있으며 스스로 안녕하지 못합니다.

조조에게 답서를 보냈다.

내가 남에게 죄를 지었으나 손수 노고를 위로받고 후하게 칭찬과 장려를 받았소. 거듭 원술 등을 상을 내걸고 범인을 잡으라는 조서를 받았으니 나는 목숨을 다해 힘쓰겠소.

조조는 다시 봉거도위 왕칙을 사자로 보내 조서와 평동장군의 인수를 가지고 가서 여포를 임명하게 했다. 또한 조조가 손수 써서 여포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했다.

원술이 천자를 칭하니 장군이 이를 제지하고 원술의 장(章)이 통하지 못하게 했소. 조정에서는 장군을 믿고 있고 거듭 중임했으니 서로 충성을 밝히도록 합시다.

이에 여포가 진등을 보내 장(章)을 받들고 가서 은혜에 감사하게 하고, 아울러 좋은 인끈 하나를 보내 조조에게 답례했다.

원술이 분노하여 한섬, 양봉 등과 세력을 연결하고 대장 장훈을 보내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가 진규에게 말했다.

지금 원술 군이 쳐들어온 것은 경 때문이오. 이 일을 어찌해야 되겠소?

진규가 말했다.

한섬, 양봉과 원술은 졸지에 합해진 군사일 뿐입니다. 책략이 평소에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니 능히 서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인 진등이 이미 이를 헤아렸으니, 가히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채용해 사람을 보내 한섬, 양봉을 설득하길, 자신과 힘을 합해 원술 군을 공격하고 빼앗은 군자금은 모두 한섬, 양봉에게 준다고 했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여포가 한섬, 양봉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원술이 반역하니 함께 토벌해야 하는데, 어찌 힘을 합해 도리어 이 여포를 공격하시오? 나는 동탁을 죽인 공이 있어 두 장군과 더불어 공신이오. 함께 원술을 공격해 공을 세울 만하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오.

한섬, 양봉이 이 서신을 받고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랐다. 여포가 진군하여 장훈 등의 둔영과 백보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공격해 열 명의 장수를 참수하고, 살상되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원환전에 따르면 여포가 부릉(阜陵)에서 원술을 공격하자, 원환은 먼저 원술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여포에게 억류되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그 뒤 여포는 또 한섬, 양봉의 2군과 함께 양주 구강군 수춘현으로 향하니,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했다. 양주 구강군 종리현에 이르러 크게 노획하고 되돌아갔다. 회수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한 뒤 원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귀하는 군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하기를, 맹장, 무사들을 억제한다고 하셨소. 내가 회수 남쪽에서 한 때의 시간동안 거닐으나 귀하는 수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 조차 없으니 맹장,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귀하는 큰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여포 군이 모두 건넌 뒤에 원술이 친히 보병과 기병 5천을 일으켜 이를 이끌고 회수 가에 이르자, 여포의 기병들이 모두 회수 북쪽에서 크게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

선주전에 따르면 양봉, 한섬은 서주, 양주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유비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유비는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다.

이때 동해 사람 소건이 낭야상이 되어, 서주 낭야국 거현를 치소로 삼고 성을 보전해 스스로 지키며, 여포와 서로 통하지 않았다. 여포가 소건에게 서신을 보냈다.

거는 하비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의당 서로 통해야 하오. 그리하지 않는 그대는 마치 스스로 황제 노릇하고 왕 노릇하는 것과 같소이다. 내 서신을 받거든 지혜로운 자들과 잘 의논해보도록 하시오.

소건이 서신을 받자 주부(主簿)를 보내 서신을 지니고 가게하고 좋은 말 다섯 필을 바쳤다. 그 뒤 장패가 소건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소건의 군수물자를 빼앗았다. 여포가 이 일을 듣고 친히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거현으로 향했다. 고순이 간언했다.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여 위세를 떨쳤으니 자연 두려워서 복종할 것입니다. 가벼이 친히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혹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을 손실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여포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장패는 여포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과연 성 위로 올라가 맞서니 여포는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군을 이끌고 하비로 되돌아왔다. 그 뒤 장패는 여포와 다시 화해했다.

원환전에 따르면 여포는 처음에는 유비와 친하게 지냈으나, 나중에 틈이 벌어졌다. 여포가 원환에게 유비를 꾸짖고 모욕하는 편지를 쓰게 하고자 했으나, 원환은 응하지 않았다. 여포가 두세 차례 그에게 강요했으나, 원환이 허락하지 않자 매우 화가 나서 무기로 위협하며 말했다.

이 일을 하면 살려주고,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원환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유비가 정말로 군자라면, 장군의 말에 치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유비가 소인이라고 해도 장차 장군의 생각에 대해 보복할 것이니, 치욕은 이쪽에 있는 것이지, 그 쪽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하물며 나 원환이 다른 날 유장군(유비)을 섬겼던 것은 마치 오늘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요. 만일 내가 하루 아침에 이곳을 떠나 장군을 욕하면 괜찮겠소?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2.7 하비 공방전

선주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시켜 금을 지니고 사례 하내군으로 가서 말을 사오게 했는데, 유비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포는 중랑장 고순, 북지태수 장료 등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198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을 보내 패(沛)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선현행장에 따르면 조조가 하비에 도착하자 진등은 광릉군의 군사들을 이끌고 군의 선두에 섰다. 이때 진등의 동생들이 하비성 안에 있었는데 여포는 진등의 세 동생을 볼모로 잡고 화친하기를 청했다. 진등은 뜻을 굳게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니, 진격하여 포위함이 날이 갈수록 급박해졌다. 여포의 자간(刺姦) 장홍(張弘)은 뒤에 처벌받을까 두려워하여 밤중에 진등의 세 동생을 이끌고 달아나 진등에게로 나아갔다.

조조가 친히 여포를 정벌해 그 성 아래에 도착하고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재앙과 복에 관해 진술했다. 여포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진궁 등이 스스로 죄가 깊었으므로 그 계책을 저지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조조군이 팽성에 이르자 진궁이 여포에게 말했다.

역격하여 편안히 쉰 군으로 지쳐있는 군을 들이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여포가 말했다.

저들이 와서 공격할 때를 기다려 사수 속으로 몰아넣는 게 더 낫소.

조조군의 공격이 급박해지자 여포는 백문루 위에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서로 공격하지 마시오. 나는 응당 명공에게 자수할 것이오.

진궁이 말했다.

역적 조조가 어찌 명공과 같습니까! 오늘 항복하는 것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는 것과 같으니 어찌 몸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허사, 왕해를 보내 원술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원술이 말했다.

여포가 내게 딸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치상 패하게 되어 있소. 어찌 다시 와서 알리는 것이오?

허사와 왕해가 말했다.

명상(明上)께서 지금 여포를 구원하지 않으면 실패를 자초하게 됩니다! 여포가 무너지면 명상 또한 무너질 것입니다

이때 원술이 제호를 참칭했으니 이 때문에 그를 명상(明上)이라 부른 것이다. 이에 원술은 엄병(嚴兵)하여 여포를 성원했다. 여포는 자신이 딸을 보내지 않은 일로 원술이 구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비단으로 딸의 몸을 얽어 말 위에 묶은 뒤 밤중에 친히 딸을 데리고 나가 원술에게 보내려 했는데, 조조의 군사들과 조우해 그들이 활을 쏘며 가로막아 통과할 수 없자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여포가 사람을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고 스스로 천여 기를 이끌고 출전했다 패주하고 성으로 돌아가 보전하고 감히 출성하지 못하였고 원술 또한 능히 구원하지 못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출격해 조조의 군량 수송로를 끊으려 했다. 여포의 처(엄씨)가 말했다.

진궁, 고순은 평소 서로 불화하니 장군께서 한번 나가시면 진궁, 고순은 필시 합심하여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첩이 옛날 장안에 있을 때 이미 장군에게 버림받았으나 다행히 방서가 사사로이 첩의 몸을 숨겨주었으니, 지금 첩을 돌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포는 처의 말을 듣고 고민하며 결단하지 못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진궁이 여포에게 말했다.

조조가 멀리서 왔으니 사세상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밖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안에서 성문을 닫고 수비하다가, 적군이 장군께로 향한다면 제가 그 배후를 치고, 성을 공격한다면 장군께서 밖에서 구원하면 됩니다. 열흘을 지나지 않아 적군의 군량이 다할 것이니 이를 들이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여포가 이를 옳게 여겼다. 여포의 처가 말했다.

지난 날 조씨(조조)는 공대(진궁)를 어린아이처럼 귀하게 대했는데도 오히려 그를 버리고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지금 장군이 공대를 대우함이 조조보다 더 후하지 않은데, 성 전부를 그에게 맡긴 채 처자를 버리고 멀리 나가려 하십니다.

이에 여포가 그만두었다.

순유전에 따르면 조조의 군은 하비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조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무릇 진궁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기수와 사수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 여포를 사로잡았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당초 여포의 기병의 장수 후성은 객(客)을 시켜 말 15필을 방목하게 했는데, 객이 이 말들을 모두 몰고 떠나 패성으로 향하면서 유비에게 귀부하려고 했다. 후성은 스스로 기병을 이끌고 이를 뒤쫓아 말들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제장들이 모여 하례하자 후성은 5~6곡의 술을 빚고 사냥해서 잡은 10여 두의 돼지를 내놓았는데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돼지 반 마리와 다섯 두의 술을 가지고 여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장군의 은덕으로 잃어버렸던 말을 뒤쫓아 되찾았습니다. 제장들이 와서 하례해서 직접 술을 조금 빚고 사냥으로 잡은 돼지를 내놓았습니다. 감히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작으나마 장군께 바칩니다.

여포가 대노해 말했다.

내가 술을 금했는데 경은 술을 빚어 제장들과 형제처럼 함께 먹고 마시니, 나를 죽이기로 공모라도 하는 것이오?

후성이 크게 두려워하며 떠났다. 빚은 술을 버리고 제장들을 되돌려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조가 하비를 포위하자 후성은 마침내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여포가 비록 사납고 용맹했으나 꾀가 없고 의심하고 꺼림이 많아 그 무리들을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장들을 믿고 의지했는데, 제장들은 각각 뜻이 달라 스스로 의심하니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패전이 많았다. 조조가 참호를 파고 성을 포위한지 석 달이 지나자 위아래의 마음이 흐트러지니, 여포의 장수 후성, 송헌, 위속이 진궁을 포박하고 그 군사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2.8 백문루

여포는 그 휘하들과 함께 백문루에 올랐으나 군사들이 둘러싸 위급해지자 내려와서 항복하니,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았다.

여포가 말했다.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시오.

조조가 말했다.

범을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조조에게 말했다.

내가 제장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소.

조조가 말했다.

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여포가 조조에게 물었다.

명공은 어찌 이렇게 수척해 지셨습니까?

조조가 말했다.

그대가 어찌 나를 알아보시오?

여포가 말했다.

예전 낙양에 있을 때 온씨원에서 만났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 일을 잊었었소. 내가 수척해 진 것은 좀 더 빨리 그대를 사로잡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기 때문이오.

여포가 말했다.

지금 나 여포로 하여금 힘을 다하게 한다면 공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포가 꽉 조이게 포박되어 있었으므로 유비에게 말했다.

현덕, 경은 빈객으로 앉아 있고 나는 사로잡힌 포로 신세가 되었구려. 느슨하게 묶어달라고 한마디 해줄 수 없겠소?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어찌 내게 말하지 않고 사군(使君)에게 호소하시오?

여포를 살려주려는 뜻을 품고 포박을 느슨하게 해주라 명했다. 주부 왕필이 달려와 진언했다.

여포는 사나운 포로이고 그 무리들이 가까이 밖에 있으니 느슨하게 해주면 안 됩니다.

조조가 말했다.

본래 느슨하게 해주려 했으나 주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하겠소?

여포가 청했다.

명공(明公)이 근심하던 것이 나 여포인데 이제 내가 이미 항복했으니 천하에 걱정할 게 없소이다. 명공이 보병을 이끌며 내게 기병을 이끌게 한다면 어찌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겠소이까?

조조는 의심하는 기색을 띄었다. 유비가 진언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한서 여포열전에 따르면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 큰놈(大耳兒)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

전략에 따르면 진궁은 여포를 위해 계책을 세웠으나 여포는 매번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하비에서 패하자 군사들이 여포와 진궁을 붙잡았는데, 조조가 그들 모두를 만나보고 평생에 관해 말하니 여포는 살려 달라는 말을 했다. 조조가 진궁에게 말했다.

공대, 경은 평소에 늘 스스로 지모를 갖추어 남음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제 결국 이리 되었으니 어찌된 일이오?

진궁이 돌아보며 여포를 가리켜 말했다.

다만 이 사람이 내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그가 내 말을 따랐다면 필시 사로잡히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무어라 하시겠소?

진궁이 말했다.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않고 자식이 되어 효도하지 않았으니 죽는 것이 그 운명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경의 노모는 어찌하시려오?

진궁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 장차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 했으니, 노모의 생사는 명공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경의 처자는 어떠하오?

진궁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 장차 천하에 인정을 베풀려는 자는 남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 했습니다. 처자의 생사 또한 명공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조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진궁이 말했다.

청컨대 저를 밖으로 내보낸 뒤 죽여서 군법을 밝히십시오.

그리고는 내보내기를 재촉하니 제지할 수 없었다. 조조가 울면서 전송했으나 진궁은 다시 되돌아보지 않았다. 진궁이 죽은 뒤 조조가 그 일가를 대우함이 당초보다 더 후했다.

조조가 명을 내려 그의 노모를 죽을 때까지 보살피게 하고 그의 딸을 시집보내 주었다.

이에 여포를 목을 매어 죽였다. 여포는 진궁, 고순 등과 함께 모두 효수되어 허도로 보내졌고 그 뒤 매장되었다.

장료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깨뜨리자 장료는 자신의 군을 이끌고 투항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미남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정사에선 외모에 대해 특별한 서술이 없어서 실제로 미남이었는지 알 수 없다. 또 여포가 방천화극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지만 화극과 같은 형태의 무기는 송나라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하며 살상용으로는 실용성이 떨어져 제사 의식용으로 많이 쓰였다. 그러니까 연의의 창작. 그래도 정사에서 여포가 극을 세워서 활을 쏘아 맞춘 장면이 있다.

처음에 정원이 여포의 양아버지로 나온다. 정사에서 여포가 양아버지로 섬긴건 동탁 뿐인데 여포의 의리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원도 양아버지로 설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숙도 여포와 고향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동탁의 적토마를 여포에게 주어 여포를 매수, 여포는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 귀부한다.

삼영전여포는 창작된 장면이지만 여포를 최강 무력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장비가 여포와 50합정도 싸웠는데 밀리지 않았다. 관우가 중간에 끼어들고 유비도 끼어들어 여포는 유비 삼형제와 3:1로 붙으면서 수십합을 싸운다. 이후 관우, 장비가 불세출의 무장으로 묘사되니 그들과 싸운 여포도 엄청 강하게 인식되었다. 다만 유비는 이후 무력을 강조하는 묘사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몇몇 판본에서는 유비가 망쳤다(?)는 묘사도 나오는데 본래 연의에서는 이 장면에서 유비의 무용이 뒤떨어진다는 묘사는 없다.[3]

관우가 손권을 욕한 '강동의 쥐새끼'란 말이 있다면, 장비가 여포를 욕한 유명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호뢰관에서 여포와 싸울 때 여포를 욕한 '세 성 가진 종놈(三姓家奴)'. 원래 여씨인데 양부로 정원과 동탁을 모셨기에 성이 세 개라는 이유로 이렇게 욕한 것이다.[4]

왕윤이 여포에게 금관(金冠)을 선물하고 여포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정사에서 여포는 금관을 썼다는 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장면 때문인지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여포가 더듬이(?)가 달린 금관(金冠)을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연의에서는 여포가 동탁을 배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왕윤의 미인계라고 설명하나, 초선의 존재를 포함하여 그것은 허구에 가깝다. 초선은 정사에서 여포와 눈이 맞은 시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 볼 수 있다. 연의에서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 연환계는 여포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해준 장면. 당시에 이 에피소드의 서술 시 왕윤의 계략에 넘어간 것에서 여포를 띄워줄 의도는 없었겠지만, 초선을 되찾기 위해 동탁을 배신했다는 점이 사랑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정서에는 오히려 여포에게 낭만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더하게 되었다.[5]

서주를 공격하던 조조를 뒷치기하여 여포와 진궁은 연주를 차지하고 돌아온 조조군과 싸운다. 이 복양 전투에서 신캐 보정을 받은 허저가 여포와 20합을 싸워 밀리진 않았지만, 조조는 여포를 혼자서 꺾을 수 없다며 전위,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을 보내면서 여포를 퇴각시킨다. 창작된 장면이지만 6명이랑 맞닥뜨리면서 달아난 자체가 엄청난 무력이긴 하다. 덕분에 여포에게 무력 최강 이미지를 한번 더 부여.

여포는 유비에게 의탁한다. 유비의 아랫사람인 관우손건 등이 "무엇이 아쉬워서 여포를 받아들이냐?"고 묻자 유비는 "나도 싫기는 하지만, 이러이러하여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조표의 사위가 여포라는 설정이 붙었다. 유비가 원술을 요격하러 나간 사이 평소 여포를 안 좋게보던 장비가 술에 취해 조표를 때리자 조표는 사위 여포에게 도망간다. 여포가 서주를 점령하자 유비는 서주를 여포에게 맡기고 자신은 소패로 간다. 그 후 나오는 원문사극 장면은 실제 정사에서도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정사에서 여포의 본처는 성씨조차도 나오지 않았지만 연의에서는 엄씨라고 나온다. 연의에서는 기령이 '소불간친지계'라는 이름으로 원술의 아들과 여포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계책을 내놓으며, 여포의 아내 엄씨가 원술과 사돈이 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유비가 위험해질 것 같다고 여긴 진등의 아버지 진규가 병든 몸으로 직접 여포를 찾아가 반대한다.

나중에 서주성에서 장비가 말도둑질(...)을 했을 때 여포와 장비가 리벤지 매치를 갖는데 여기서는 1대 1로 100합을 넘게 싸웠어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6] 조조군+유비군에게 패퇴된 여포는 하비성에 고립된다. 진궁이 계책을 내지만 본처 엄씨와 첩 초선이 반대하여 무산된다.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원술이 딸부터 보내라고 하자 여포는 딸 여씨를 직접 업고 출전했다 패주한다.

조조군이 하비성을 물에 잠기게 하자 여포는 매일 엄씨와 초선을 끼고 술만 마신다. 자신의 몰골이 추해진 것을 깨달은 여포는 술을 끊고 금주령을 내린다. 후성이 여포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다가 화난 여포에 의해 매를 맞는다.

후성 등의 배신으로 여포군은 패배하고 사로잡힌다. 진궁은 스스로 처형당하길 원했고 고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참수되었다. 여포는 유비에게 자신을 위해 조조에게 말해주라고 하지만 정사처럼 유비는 정원과 동탁의 일을 들먹인다. 이에 여포가 외친다. "귀 큰 놈아! 내가 원문에서 활을 쏴준 것을 잊었느냐!" 정사와 다르게 원문사극의 일화를 언급하는데 원래 마지막 말을 극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바뀌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장료가 여포에게 죽는 것이 두렵냐면서 일갈하며 조조의 질문에 기백있게 답해서 노한 조조가 장료를 죽이려는 것을 백문루에서 관우유비가 말려 조조의 부하가 된다. 하지만 정사에서의 장료는 여포가 패하자 병사들을 정돈하여 조조에게 투항한거다.

정사에서는 여포가 죽은 후 여포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엄씨, 초선, 여씨 등 여포의 가족들은 허도로 이송되었다고 나온다. 그럼에도 여포의 가족들은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4 평가

4.1 통솔

전술적으로 보면 제법 뛰어난 면모를 보인적도 여럿 있다. 그런데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며 관련 기록을 보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겁을 먹은 기록이 많다.

  • 손견에게는 이긴 적이 없다. 호진과 같이 나간 손견과의 싸움에서 갑자기 손견이 기습해온다고 겁을 먹고 오인 보고를 해 진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패배했다.
  • 장연과의 싸움에서 적은 전력으로도 잘 싸워 큰 성과를 올렸다. 여포를 상징하는 말인 '인중여포 마중적토' 역시 정사에 주석으로 붙은 조만전의 서술로 명마 적토마에 여포를 비유한 것이다.
  • 조조가 도겸과 싸우는 사이 뒷치기로 연주를 빼앗았다. 조조와의 싸움에서 조조를 몇번이고 위기로 몰아 넣었다. 치명타를 못 넣었을 뿐. 흣날 조조가 자신의 업적 중 여포와 싸워 이긴 일을 자랑으로 삼았을만큼 여포의 야전 능력은 확실했던 것 같다.
  • 연주에서 조조와 싸울 때도 갑자기 복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물러난 기록이 있다.
  •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사이 서주를 뒷치기로 빼앗았다.
  • 학맹의 반란 때도 겁을 먹고 도망쳤다가 고순이 뒤늦게 해결했다.
  • 이후 원술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도 진규가 양봉과 한섬을 회유해 군영이 혼란스러워지자 격파한 적도 있다. 제대로 세력을 가진 군사 집단과 싸워 이긴 것은 원술 정도이며 이 때도 진규가 한섬과 양봉을 회유해 내분을 일으킨 덕이다. 더구나 원술의 파멸은 순착적으로 여포의 파멸로 이어졌으니 전략적 고려가 없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 당시 소규모 군벌 수준이던 장패에게 패한 적도 있다. 앞에서 보인 군사적 성과를 보면 의외로 약할 때는 너무 약했는데 후술할 여러 문제점들이 원인인 듯.
  • 무적 수준은 아니라서 조조가 서주로 공격해오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하비성에 갇혔을 때도 항복하려고 하다 진궁이 말리는 등 초인적인 무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겁을 먹고 상황을 그르치거나 전략적 고려 없이 행동한 적이 많다.

더구나 전체적인 큰 흐름을 보는 전략적인 판단력이 상당히 떨어져서 그 때 그 때 즉흥적으로 강자에게 빌붙고 약자를 배신하는 수준으로 행동하니 몇 번 전투에서 이긴들 그 성과가 제대로 있을리 없다.

4.2 무력

힘이 세고 궁마술에 능숙하여 한무제 때의 명장인 이광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고 사람들에게 불렸다.

곽사와 여포의 일기토는 정사에 몇 안되는 진짜 일기토의 기록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정사 기록은 아니고 영웅기의 기록인데, 영웅기 역시 당대 인물인 왕찬이 기록한 것이므로 상당히 신뢰할만한 사료이기는 하다.

유비에게 쳐들어 온 기령군을 돌려보내기 위해 활을 쏴서 극에 명중시킨 일화도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무예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일화 때문인지 천자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천자문의 구절 중에서 '포사(布射)'가 바로 여포가 활을 잘 쐈다는 의미다. 근데 조건달죽여버린 탓에 중국 양궁이 한국에 밀렸다고 한다.

다만 연의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정사에서는 유관장 삼형제, 조조군의 장수 6명과 단신으로 맞짱을 뜰 정도로 초인적인 강자라고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4.3 지력

개인의 무력과 전투에서의 지휘 능력은 제법 있었으나 전략을 짜거나 계략을 세우는 등의 총사령관으로서의 군략은 떨어진다.

연주에서 조조는 서주에서 연주까지 오는 동안 험지를 통해 전혀 견제하지 않은 것을 보고 여포를 금방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여포의 전술 능력을 너무 얕본 생각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조조가 하비로 여포를 치러 왔을 때 진궁이 이제 막 도착해 조조군이 지쳤으니 여포가 본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고, 자신과 남은 무리가 성에서 호응하는 식으로 지친 조조군을 치자고 권유하나 여포는 아내의 말을 들어 따르지 않았고, 쉴 시간을 번 조조군과 싸워 대패해 성안에 틀어박혀 농성을 하게 됐다. 학맹과 공모했었던 진궁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하나 먼길을 오느라 지쳤을 적군이 그냥 쉬면서 모든 준비를 할 수 있게 내버려둔 것은 그의 총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강대한 군세가 오는데 제대로 막거나 견제하지 않은 기록이 연달아 있는 걸 보면 최소한의 전략, 작전적 식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의에서는 이런 점이 한층 더 부각되어 전형적인 힘은 쎄나 머리는 나쁜놈으로 아예 이미지가 굳어진다.

4.4 정치

여포는 무엇보다 용인력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을 다루는 데는 영 빵점이었다는 것이다. 군주로서의 자리에 올라서려면 사람을 잘다뤄야 하기에 군주로서의 그릇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충성스럽고 훌륭한 장수인 고순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병사를 빼앗아 자신의 친척이기만 할 뿐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위속에게 주는 등 영 함부로 대한 것. 그렇다고 위속을 신뢰한 것도 아니라서 싸움이 있자 다시 위속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하는 등 이랬다 저랬다 식의 태도를 보였다. 조조하후돈에게 한 것같은 친족을 우대한 군부 장악책도 아니고 뛰어난 장수를 기용해 충심을 얻고 능력을 이용하는 용인술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순은 아무 불만도 나타내지 않았고 뒷날 여포가 조조와 싸울 때도 끝까지 함께했으며 결국 항복하지도 않고 죽었다. 이에 비해 위속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송헌, 후성과 함께 진궁을 잡아 조조에게 항복했다.

또한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며 진궁을 비롯한 부하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고, 이 바람에 모반이 일어나고 부하들 사이에 내분이 생겼다. 고순과 진궁의 경우 패망 직전까지 둘이 사이가 좋지 못했다.

4.5 인격

성격이 좀 많이 이상한데,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기가 잘해준 것만 기억하고 자기가 남한테 피해를 준 것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특징이 있다.

  • 문자 그대로 배신아이콘. 정원을 섬기다가 동탁의 후한 대우에 이끌려 정원을 죽인다. 여포가 지금까지 몇 차례 배신을 하기는 했는데 나머지는 변명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정원의 경우는 확실하게 배신이다.
  • 동탁과 사이가 틀어져 그 동탁마저 어명에 의해 역적을 친다면서 죽여 버렸다. 그래도 동탁은 사적인 의리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미 동탁이 여포에게 창질을 하며 목숨을 위협했던 시점에서 좀 애매해진 바가 있는데 워낙 개막장을 쳐놓은 역적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 원소나 원술을 대할 때의 자신이 동탁을 죽여서 원씨의 원수를 갚아줬다는 태도가 있는데 원씨가 몰살당할 때 여포가 동탁의 부하였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 자신에게 잘해준 유비의 뒤통수를 쳐서 서주성을 빼앗았다. 연의와 다르게 조표를 비롯한 서주의 호족 일부가 여포와 결탁해 유비가 없는 틈을 타 서주를 빼앗은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닌 그냥 뒷치기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기반을 잃고 원술과 여포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 여포가 유비를 도와준 원문사극의 일화도 따지고보면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지만 않았으면 유비가 그 지경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니 그렇게 고마운 것도 아니다.
  • 유비가 소패에서 간신히 정착하는데, 정착하고 나서 다시 힘을 얻는 듯 하자 여포는 이걸 꺼려서 다시 공격한다. 결국 유비는 서주 대학살을 일으켰던 조조 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남들을 쉽게 배신하고 남의 뒤통수만 쳐댔으며 약속을 하면 어기는게 일상이니 인망이 땅에 떨어진 것도 당연하다.

백문루의 상황에서도 여포는 유비에게 한 마디 해주라고 부탁하거나 조조에게 내가 조공을 위해 싸우면 천하가 평정된다는 식으로 자기가 두 사람에게 한 짓을 까먹은 듯 한 태도를 보인다. 유비가 정원과 동탁의 일을 기억하라고 조조에게 말한 것이 괜한 이유가 아니다. 유비에게 이걸 물은 조조도 남의 의견 하나에 자기 결정을 덜컥 내릴 정도로 줏대 없는 인물도 아니고 그도 여포가 그동안 해온 행동들을 잘 알 테니 처형을 결정한 것이다.

다만 자치통감에서는 백문루에서 포위당하자 측근에게 자기 목을 잘라서 조조에게 가라고 했지만 좌우에서 차마 그러지 못하자 내려와 항복했다고 기록했다.참고 의외로 부하들에게는 의리있는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4.6 색욕

그리고 초선이라는 캐릭터로 인해 로맨티스트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초선은 허구의 인물이고, 실제의 여포는 성적으로 대단히 방종했던 인물로 보인다.

  • 초선의 모델이 된 동탁의 시녀와 통정했다는 기록부터 시작해 여포가 남의 여인을 탐내다 척을 지게 된 사례는 꽤 많다.
  • 유비 앞에서 아내를 불러낸 것도 성적으로 방종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듯하다.
  •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자신을 살려두고 수하로 두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하는 시점에 조조가 언급하길 여포는 부하들의 아내를 사랑했다(...). 한두명의 부인과 바람 피우고 끝난 일이면 저런 상황이 이루어질까? 강제로 겁탈했다는 표현은 없긴 한데, 간통 자체만으로 충분히 지탄받을 행동이다. 게다가 부하들을 보호해야 할 위치에 있는 주군이 되려 부하 아내들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파렴치한 짓이다.

어느 정도는 현대 시점에서 보면 당시 사람들이 지나치게 꽉 막힌 것도 있지만, 부하의 아내들을 탐했다는 기록에 이르면 현대 시점에서도 용납이 어려운 합법드립 수준. 난세이다 보니 별별 해괴한 일이 다 있었지만 적의 포로도 아닌 자기 부하의 아내들을 탐했다는 기록은 드물다. 조조도 성욕이 왕성하고 유부녀도 좋아했지만, 자기 부하의 아내는 건드리지 않았다. 당장은 좋았을지 몰라도 이런 무분별한 처신은 그의 형편없는 용인술과 더해져 부하들의 배반을 불러왔다.

김품석원균이 좋은 대접 받기가 힘든 것도 권력으로 부하의 아내들을 탐했다는 것임을 생각하면, 도무지 두둔되기가 힘들고, 두둔하는 이들 인성이 우선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존의 여포 캐릭터 때문인지 이런 모습이 묘사되는 작품은 드물다. 사실 여기까지 묘사하면 여포라는 인물 자체가 거의 개쓰레기 수준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뭐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어쨌든 워낙에 '무신' 이미지를 강조하려다보니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초선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이미지를 포장하고 있다.

4.7 여포와 유비의 복잡한 관계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면 두 사람에게서 살펴 볼 수 있는 다소 이중적인 면모나 여러 특이점 때문에 의구심이 들게 되는데, 이유는 정사에도 적혀 있다시피 인의의 대명사인 유비가 여포의 죽음을 거들었고, 또한 인간 통찰의 대명사인 유비가 인간 관계에 처음으로 실책을 했던 사례이기 때문이었다.

신기한 건 정사를 기준으로 볼 때 여포는 이미 정원, 동탁을 배반한 전력이 있어서 배신의 명수인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능력이 있는지 사람보는 눈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던 유비를 제대로 등쳐먹는데 성공했다는 것. 조표, 허탐 같은 서주의 권력자들과 손을 잡았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들이 굳이 여포를 선택한 것을 보면 여포가 당대에 상당히 군웅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 유비가 배신으로 유명한 여포를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일단 이 시기에 여포와 유비에게는 '조조'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조조 등 주위 군웅에 대항하기 위한 전력 보강에 눈이 멀어 자신이 여포를 능히 제어할 수 있으리란 착각을 해버린 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당시 서주가 조조에 의해서 두 차례 개발살이 났고 더군다나 대학살까지 벌어진 점을 감안하면 유비로서는 비록 신의는 없지만 무장으로서 검증된 여포를 그냥 뿌리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서주 호족들 중 유비에게 반대를 표하는 무리들이 있고, 서주가 이미 두 차례의 전란으로 황폐화된 상황에서 조조의 재침을 겪으면 막기 어렵다고 판단해 여포를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유비가 여포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지도 알 수 없다. 여포가 비록 근거지가 없이 떠도는 장수로 전락했다고 해도 여전히 휘하에는 용맹하기로 이름높은 동료 무장들과 잔여 병력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근거지를 내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결국 갈 곳이 없는 여포는 정말 필사적으로 유비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근거지를 갖추고 있는 유비가 훨씬 유리하겠지만, 여포의 공격에 병력 손실이 누적이 된다면 유비의 앞날은 알 수 없다. 이미 원술, 원소, 조조와 사이가 틀어진 여포에게는 살아남으려면 딱히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필사적일 것이다. 그리고, 여포가 만일 서주의 군현을 일부나마 점령하여 기지를 만들고 원술 등의 후원을 받아 세력을 유지한다면 유비에게는 내장에 우환이 박히는 격이다. 유비 역시 조조, 원술과 같은 강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포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또 당시의 관례를 보는 시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후한말의 난세에는 이러한 류의 객장(客將)이 자주 등장했는데, 여포 이외에도 유표에게 의탁한 장수, 공손찬, 조조, 원소, 유비 본인(...), 장로유비에게 의탁했던 마초를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객장을 받아들이는 군웅 역시 객장들을 경계하기는 하였고, 군웅과 객장과 충돌이 벌어지는 사례도 많기는 했으나, 이러한 객장이 존재했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의(義)로서 따져볼 때 자신에게 의탁하는 객장을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포가 의탁하러 왔을 당시에는 유비로서는 여포가 설사 의심스럽다고 해도 여포를 배척하지 못할 이유가 더 많았다. 나중에 배신했으니 '여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은 다소 결과론적인 흑조 이론인 것이다.

아무튼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번번히 뒤통수를 치면서 사방에서 어그로를 끌어모았으니 끝이 좋을리 없었다. 결국 여포에게 연주를 날려먹은 적이 있는 조조와 여포에게 서주를 날려먹은 유비의 협공에 사로잡혀 목이 매달린다.

묘하게 마초와 유비의 관계도 언뜻 유비와 여포의 관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마초는 끝까지 유비를 배신하지 않고 팽양의 모반을 고변하는 등 신의를 지켰고 그덕에 높은 대우를 받았다. 비교하기 미안할 지경.

5 미디어 믹스

여포/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반동탁 연합군이 봉기하자 동탁이 원외, 원기 등 원씨 일가를 살육했으니 그 원수를 갚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시 여포는 동탁과 붙어먹고 있었으니 원술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다.
  2. 원소의 수하들은 원소가 내리는 관직을 받았는데 여포 자신은 황제가 직접 내린 관직을 받았다고 무시한 것이다.
  3. 2ch 등지에서는 이 싸움의 무력 계산은 '관우+장비-유비=여포'라고 말한다. 지못미 유비.
  4. 보통 이건 재혼을 여러 번한 모친에 대한 욕이다.
  5. 정사에 나오는 제장들의 아내와 사통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은 것도 크다.
  6. 연의는 고정된 파워 밸런스를 상정하고 집필된 작품은 결코 아니다.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서 무장들의 전투력이 오락가락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