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삼국지)

魏舒
(209 ~ 290)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양원(陽元). 위화존의 아버지.

임성 번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어 외갓집 영씨에 양육되었으며, 영씨가 저택을 지을 때 점술가가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라 했다. 외조모는 마음 속으로 외손이 어리지만 지혜로워서 점술에 부응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위서는 외갓집을 위해 이 저택에 대한 점술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위서는 신장이 8척 2촌으로 용모가 뛰어나고 위대하면서 술을 섬으로 마셨으며, 성격이 꿈뜨고 미련하면서 수수해 고향 친척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숙부는 그에게 물방아를 관리하게 하면서 800호의 장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지만 위서는 개의치 않았으며, 보통 사람의 절도를 지키지 않고 결백하고 엄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의 재능을 들어 그 인물을 키워주려고 노력하면서 남의 단점이 있으면 이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젊어서부터 활 솜씨에 뛰어나 가죽 옷을 입고 산 속으로 들어가 사냥할 때마다 많이 잡아왔다.

40여 세에 군의 상계연을 지내다가 효렴으로 천거되었다가 대책(對策)으로 상서랑으로 옮겼으며, 조정에서는 낭관을 걸러 쓰고자 해서 재목이 아닌 자를 파면했고 위서는 자신이 곧 그런 사람이라면서 짐을 싸가지고 나갔다. 종육의 장사를 지내다가 종육이 참모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면 늘 옆에 앉아서 산가지를 놓고는 했는데, 나중에 한 번은 인원이 부족해 위서를 넣어 충원했다.

활을 쏘아 명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행동거지까지 고상해 그 묘기를 거의 다 보여줬는데, 종육이 감탄하고 미안해하면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활 솜씨가 뛰어나다고 감탄했다.

상국참군으로 옮겼다가 사마소가 매번 조회가 끝나면 배웅하면서 위서는 위풍당당하니 사람들의 영수라고 말했으며, 극양자에 봉해졌고 형양의 두 군의 태수, 산기상시, 기주자사를 지냈다. 기주에 근무한 지 3년이 되어 중앙으로 들어와 시중이 되었고 진무제 때 특별히 비단 백 필을 하사받았으며, 상서로 옮겨졌고 태강 초에는 상서우복야가 되었다.

283년 정월 14일에 상서좌복야가 되었고 겨울 11월에는 사도가 되었으며, 286년에 병이 들었다면서 물러나기를 요청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위서가 한 일은 반드시 먼저 시행한 다음에 말을 했으므로 재상의 자리를 그만둘 때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290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