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소

동음이의어에 대해서는 사마소(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서진의 추존 황제
고조 선황제 사마의세종 경황제 사마사태조 문황제 사마소
300px
사마소 초상화 (오른쪽 인물. 왼쪽 인물은 사마유)
묘호태조(太祖)
시호문황제(文皇帝)
사마(司馬)
소(昭)
자상(子上)
생몰기간211년 ~ 265년 9월 6일

1 개요

사마의장춘화의 차남으로 사마사의 친동생이다.[1] 211년 출생, 265년 사망. 을 건국한 사마염의 부친. 아들 사마염이 진왕이 된 후에는 사마소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후 조환에게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된 후에는 묘호를 더해 태조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하였다. 진왕으로의 재위 기간은 264년부터 265년 9월 6일까지. 자는 자상(子上)이고 연의에서는 자상(子尙)이라고 나온다.

2 생애

238년 의 대신으로 신성향후(新城鄉侯)라는 지위를 받았다. 249년에는 사마의, 사마사와 함께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사마의는 모든 획책을 사마사와 함께 도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차남인 사마소는 완전히 소외당했고 그가 아버지와 형에게 전말을 듣게 된 것은 거사 바로 전날(!)이었다고 한다.

연의에서 그려지는 그의 모습은 그가 아버지와 형과 함께 자주 종군했다고 그려지지만, 형과 마찬가지로 사마의 생전의 종군 경험 중 대부분은 나관중의 창작이다. 실재하는 그의 군 경력은 낙곡대전에 참전한 것을 시작으로, 북벌을 시도하는 강유와 교전하거나, 왕릉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사마의의 출병에 동행하는 등 나름대로 군사 경험을 쌓아나갔다. 다만, 252년에 있었던 동흥전투에서 그는 독회북제군사(督淮北諸軍事)로서 준 사령관급 위치에 있었으나, 제갈각, 정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는 부하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직언을 듣고는 격노하여 직언을 한 그 부하를 처형하였다.

아버지의 쿠데타로 인하여 형과 함께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죽자, 자신이 그 직위를 계승했다. 직위명은 대장군(大將軍) 시중(侍中)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史) 녹상서사(錄尙書事).

정사에 따르면, 사마사가 관구검문흠의 반란을 진압하고 회군 중에 사망하였기에, 사마소가 대신 군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한다. 낙양의 조모는 군을 수도 밖에 머무르게 하고 사마소로 하여금 홀로 입궐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종회의 건의를 채용한 사마소가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군과 함께 수도 낙양으로 향하였고, 때문에 조모는 할 수 없이 사마소에게 사마사가 생전에 가졌던 모든 직위를 그대로 물려주게 되었다.

257년 제갈탄의 난이 일어나자, 종회, 가충을 참군으로 삼고, 왕기, 주태, 석포, 호분를 이끌고 진압했다. 그 과정중에 토벌군 소속인 만위, 만장무가 병으로 인해 되돌아가는 것을 빌미로 만위를 서민으로 강등하고 만장무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반면 제갈탄이 죽자 남은 병사들도 같이 죽겠다고 말하자, 그대로 죽이고 항복했던 문앙, 문호, 당자, 전단등 오나라 인물들을 살려주는 이중적인 태도를 하고있다.

260년 4월 사마소는 진공, 상국의 지위와 구석을 조모로부터 하사받았다. 그러나 조모가 이에 분노를 느꼈는지, 아니면 258년 동오의 실권자 손침이 황제 손휴에 의해 토벌된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사마소를 토벌하려 했다. 조모는 5월에 갑자기 '사마소의 마음은 행인들도 알고 있소 {사마소지심로인소지(司馬昭之心路人所知)의 유래} 짐은 이대로 계속 치욕을 감당할 수 없소. 오늘이야말로 경들과 함께 사마소를 치러 나가겠소'라면서 사마소를 참살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상서 왕경,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며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조모는 이들을 믿었기에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지만 왕침과 왕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경은 홀로 말렸다. 그래도 조모는 꿋꿋히 강행했으나, 병권이 이미 사마씨에게 장악된 상황이라 변변한 병사들을 모을 수 없었고 조모가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노복이나 환관들뿐이었다. 왕침과 왕업은 왕경에게 자신과 함께 사마소에게 알리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왕경은 거절했다. 이에 둘은 사마소에게 일러바쳤고 계획은 누설되었다.

할 수 없이 조모는 그나마 모인 소수의 부하들을 데리고 친히 북을 울리며 사마소를 치러 출병했다. 도중에 둔기교위 사마주를 만나자 고함을 질러 물리치고 운룡문과 지거문을 나섰다. 그러나 동화문 앞에서 사마소가 보낸 가충이 지휘하는 정예 병력에 가로막히고 겁먹은 병졸들이 흩어지자 스스로 검을 빼들고 싸웠다. 하지만 병사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 없어 이러저리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이 때 가충의 부하였던 성제가 망설였으나, 가충이 '사마공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뭘 망설이는가?'라며 다그치자 병사들은 그제서야 공격했다. 이 때 성제가 닥돌하여 조모를 창으로 찌르고 칼로 등을 꿰뚫었고 조모는 연(輦)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황제를 죽인 꼴이 되자 사마소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졌다. 이를 무마하고자 사마소는 조모가 곽태후를 시해하려 했다고 둘러대며 조모 시해의 책임을 모두 성제, 성쉬 형제에게 떠안겼다, 이후

"신이 듣기로 신하의 절조는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고 군주를 섬기는 도의는 감히 재난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 일에 발생한 변고는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재앙은 마치 화살이 발사된 것 같으니 신은 진실로 몸을 바쳐 죽음을 지키고 오직 운명의 판단을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략이 위로는 황태후를 위험하게 하고 종묘를 전복시킬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신은 부끄럽게도 신하의 우두머리이고 대의는 국가를 편안히 하는데 있는지라 끝없이 경고를 하며 황제의 수레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성제가 망령되이 진중에 들어가 이로써 커다란 변고가 발생하게 됐으니 신은 슬프고 고통스러워 오장육부가 찢어질 것 같습니다. 성제는 국군을 범하고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혔으니 죽여도 부족하므로 그의 가족들을 잡아다 정위에게 넘겨야합니다”

라고 하였다. 황태후는 이 말을 들어 성제의 삼족을 멸하였다. 공경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왕 조우의 아들 상도향공 조환을 황제로 세웠다. 하지만, 성제가 단지 실행자에 불과하다는 건 사마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다 알았으므로, 이 후 선양의 정당성이 크게 떨어진 사마씨의 영향력은 사족들에게 밀려 약화될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마씨의 왕조는 대의명분과 정당성이 건국 이전부터 이미 사라진 상태였던 것이다.

사마소는 조환을 황제로 옹립한 뒤, 3월 조서를 내려 대장군부에 사마 1명, 종사중랑 2명, 사인 10명을 증치했다. 이후 사마소는 오 보단 촉을 처야한다고 말하고 촉을 취하고 3년 뒤에 파촉의 순류를 따라 수륙으로 양동작전을 펼친다면 이것은 우나라를 멸망시키고 괵나라를 평정하는 것이요 한나라를 삼키고 위나라를 겸병하는 형세라고 했다 사마소가 계산해보건대 촉나라의 전사는 9만명 정도 되는데 성도를 수비하고 나머지군을 지키는 군대는 4만명보다 적지 않을것이고 나머지는 불과 5만명 정도이니 강유를 답중에 묶어 놓아 그로 하여금 동쪽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고서 곧바로 낙곡에 이르러서 촉나라의 공허한 지방으로부터 출병하여 한중을 습격하여 병력을 분산시키고 검각과 관두의 험요지를 떨어뜨리면 유선은 우매하므로 항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등애와 종회로 하여금 촉한을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2]

이후 등애와 종회의 갈등으로 혼란이 발생하자, 함희 원년 봄 정월 감거를 보내 등애를 잡아왔다. 을축일 사마소가 천자와 함께 서정을 위해 장안에 주재하였다. 이때 여러 왕후들이 모두 업성에 있었는데 종사중랑 산도에게 군사사무의 처리를 명하고 업성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호군 가충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여러 군대를 감독하며 한중에 거수하도록 하였다. 종회가 이에 촉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감군 위관, 우장군 호열이 종회를 공격하여 죽였다.

당초에 종회가 촉국을 공격하던때 서조속 소제가 사마소에게 말하길 “종회는 믿기 어려운 사람이니 그로 하여금 출병하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사마소가 웃으면서 말하길

“촉나라를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것처럼 쉬운데도 여러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안된다고 했지만 유독 종회만이 나와 의견을 같이 하였네. 촉을 멸망시키고 난 후에 중원의 장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촉국의 남겨진 백성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품을테니 비록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한들 그렇게 할 능력이 없네”

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마소의 예견처럼 되었다.

그 후 조환은 3월 기묘일 촉한을 멸망시킨 공으로 사마소의 작위를 왕으로 올리고 이전의 봉토를 합해 20군으로 증봉하였다. 여름 5월 계미일 천자는 무양선문후를 진선왕으로 무양충무후를 진경왕으로 올렸으며 이후 중무군 신창향후 사마염을 진나라의 세자로 봉했다. 본디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가충의 반대로 장남인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것. 이후 사마소는 12개의 끈이 있는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출입할 때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금근거를 타며 6마리의 말을 묶고 오시부거를 갖추어 쓰고 모두와 운한을 설치하며 팔일무를 악무로 쓰고 악대는 종을 4열로 늘어놓고 쓸 수 있으며 지위를 연왕보다 높게 하였다.

왕비를 왕후로 높이고 세자를 태자로 높이며 왕녀, 왕손의 작호를 전부 황제의 예법과 동일하게 하였다. 궁중의 금기중에 번잡하고 세세한것들과 법식중에 실행하기 어려운것들은 모두 사마소가 주청을 올려 없앴다. 진나라에 어사대부, 시중, 상시, 상서, 중령군, 위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 가을 8월 신묘일에 중풍으로 쓰러져 노침에서 죽으니 당시 나이가 55세였다. 9월 계유일 숭양릉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문왕이라 하였다.

3 기타

사마유가 후계자가 될 뻔했는데, 사마유는 본래 사마사의 자식이 아니라 사마소의 차남인데 사마사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그렇기에 사마소는 본래 진은 형님이 세운 나라라고 하면서 사마유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것이다.[3]

권력자가 되기 전까지는 다른 사마씨들과는 달리 분명 어딘가 어수룩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인물[4]이었는데,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나서는 아버지와 형에 뒤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그 이상으로 냉혹한 인물이 되었다. 사마사가 권신일 당시에 사마사 본인은 자신의 패배의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고 부하들의 패전 책임을 자신이 책임지는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다. 그에 비해 사마소는 당시 동흥전투의 패전 책임을 묻는 왕수의 아들 왕의를 죽이는 행보를 보이며 다소 감정적인 일처리를 보였다. 이 때문인지 후에 제갈탄이나 종회가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그의 행적을 보면은 조조와 비슷하다. 단, 조조는 황후를 죽였지 황제를 죽이지는 않았을 뿐이다.

2016년 2월 16일 중국정부는 사마소지심 로인개지(司馬昭之心, 路人皆知)라는 성어[5] 를 들며 한반도의 사드 배치에 대해 반발했다. 이것을 봐도 중국에서 사마소가 어떤 취급인지 알수 있다.

4 가족 관계

5 미디어 믹스

  1. 첩의 아들이 아니라 본부인의 아들이라는 의미.
  2. 결과적으로 사마소의 예상 자체가 완전히 들어 맞진 않았다. 사마소가 이렇게 나올것은 강유도 알고 있었기에 고립을 피하려고 음평과 양안교두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유선이 씹었음에도 등애와 제갈서는 강유를 붙잡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검각을 위군의 주력이 돌파하지 못했다. 또 촉한의 병력은 사마소의 예상보다 많은 10만 2천명+@(제갈첨이 이끌다가 등애와의 싸움에서 전멸한 병력) 정도였으니 이 역시 예상이 빗나갔다고 할 수 있다.
  3. 일부 사람들은 사마소가 일부러 떠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신하들에게 사마염이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각인시키고 후에 일어날 수 있는 후계자 분쟁을 조기에 제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우애도 챙기고 후계도 챙기고
  4. 아버지의 정변 계획을 하루 전에 안다던가, 하후현과의 친분 등 진삼의 그 캐릭터랑도 부합하려나 물론 절대 좋은 의미에서의 인간미가 아니고 사마씨 인물치고는 냉정한 판단을 보이지 않는 모습이 더러 보인 의미에 가깝다.
  5.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안다’는 뜻으로 사마소가 겉으로는충성하는 듯하지만 길가는 사람도 그게 아니라는 걸 잘안다는 의미로 한반도사드는 북한을 겨냥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