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의 역대 황제 | |||||
조위 5대 원황제 조환 | ← | 초대 세조 무황제 사마염 | → | 2대 혜황제 사마충 |
역대제왕도권, 염립본 | |
묘호 | 세조(世祖) |
시호 | 무황제(武皇帝) |
연호 | 태시(泰始, 265년 2월 4일 ~ 274년) 함령(咸寧, 275년 ~ 280년 4월) 태강(太康, 280년 4월 ~ 289년) 태희(太熙, 290년 1월 ~ 290년 4월) |
성 | 사마(司馬) |
휘 | 염(炎) |
자 | 안세(安世) |
생몰기간 | 236년 ~ 290년 5월 16일 |
재위기간 | 265년 2월 4일 ~ 290년 5월 16일 |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 중국 역대 통일왕조 초대군주 중 집안 덕을 가장 많이 본 인물. 반대로 자수성가의 대표격 인물은 빈농 고아 출신의 명 태조 주원장.
이 사람만큼 통일왕조를 거저먹은 군주도 없다. 역시나 부친의 죽음 이후에 마치 당연한 절차를 밟듯이 선양받은 조비의 경우는 10살에 종군했다가 죽을 뻔 했던 적이 있었고 한참 뒤에야 조씨가 패권을 잡지만 사마염은 11살때 조부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사마씨가 실권을 틀어잡는다. 그래도 조비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는게 조비는 이릉대전을 겪고 골골대는 오와 촉을 무찌르지 못했지만 사마염은 독발수기능의 난까지 진압하고 오도 무찔러 천하통일을 이루긴 한다. 사치와 향략으로 다 말아먹어서 그렇지.
1 개요
생몰년도 236년 ~ 290년. 자는 안세(安世). 위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왕원희.
머리카락이 땅까지 닿을 만큼 길고 두 팔이 무릎까지 왔다고 한다. 머리카락 묘사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계속 장발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그리고 유비 또한 팔 길이에 과장된 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유비와 사마염을 일치시키려고 한 사가들의 의도 같다는 의견이 있다. 후연의 창업자 모용수도 이런 묘사가 있는데 아마 당시에는 7척 5촌과 더불어 제왕의 필수요소였나보다.
굳이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팔이 긴 게 유리하므로 무력 쓸 일이 많은 고대의 군주로서는 긴 팔이 유용하긴 하다.
2 서진의 시조
아버지 사마소가 사망한 뒤, 사마염은 황제 조환을 폐하고 자신이 제위에 오른 뒤 국호를 진(晉)으로 바꾼다. 이것이 서진의 건국으로 왕년에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은 것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나 조조와 사마의의 찬탈은 결코 같은 급으로 논할 수 없다. 조조는 이미 쇠약하던 후한 정권을 황제를 대신하여 20여년 간 유지시켰다. 또 그는 반대파와 황후를 제거했지만 황제를 폐위하거나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마의는 비록 어린 황제 조방이 즉위하고 권력자 조상이 무능했으나 그래도 쇠약하지 않은 위나라를 기회를 보아 권력을 잡고, 사마사는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며 사마소는 황제 조모를 죽였다. 실제로 그럭저럭 평화스럽게 마감한 조위의 말로에 비하면 서진의 말로는 훨씬 비참하다.
15년 뒤인 280년에는 독발수기능의 난이 진압되자, 오까지 멸망시키고 결국 삼국을 통일하면서 삼국시대를 마감한다. 이것이 삼국지의 끝. 하지만 그 뒤에 그 자신도 말년에는 부패했고 거기다 아들과 며느리가 나란히 막장이었다. 끝내 그가 죽은 뒤 서진의 말년은 팔왕의 난으로 동족간 대혈전이 벌어진 다음, 영가의 난으로 이민족들에게 쫓겨나서 중국의 북쪽 지역은 이민족이 차지하고 한족은 남쪽에서 동진을 건국한 오호십육국시대였다.
2.1 암군
천하통일을 하기 전이었던 즉위 초반에는 태의령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 또는 가죽옷인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청렴하고 유능한 이미지였다. 사마염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여성으로 이름 높았던 사마소의 아내 문명황후 왕원희가 태후로 있었으니, 사마염도 '엄마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태후가 직접 베를 짜고 진수성찬을 멀리하며 몸소 검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니, 아무리 황제라도 아들이 되서 치두구 같은 사치품을 가까이 하기에는 눈치보일 만도 하다. 하지만 문명황후는 진나라가 건국되고 3년 만에 52세 나이로 죽었으니 사마염은 곧 '엄마 눈치'를 안 보고 황제 답게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으리라.
특히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인데 1만여 명의 처녀를 잡아와서는 몽땅 후궁으로 만들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지낸 것이 유명. 일부 후궁은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뿌리거나 잎사귀를 꽂아놔서 자기 방만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사마염의 사치와 관련된 일화가 몇 있는데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사마염은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
한번은 노신이었던 사도 위관이 술자리에서 옥좌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합니다'라고 했을 때도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다. 한마디로 사마충의 자질이 개판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으로 '황제 자리가 사마충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것으로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문제를 만들어 사마충에게 문제를 던져 주었는데 그걸 가남풍이 가로채서 학자를 매수하여 답변을 쓰게 했다. 가남풍은 그 답변을 받아내어 너무 잘 쓰면 사마염이 오해할까봐 잘 쓴 것도 아니고 못쓴 것도 아니고 중간 수준으로 사마충에게 받아쓰게 했다. 사마염은 이것만 믿고 사마충을 인정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면서 '나는 어떤 군주인가?'라고 묻자 사예교위로 있던 유의가 '폐하는 후한의 환제와 영제와 같사옵니다.'라고 폭풍디스를 했다. 이에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옵니다!'라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사마염은 대노해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대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더구나 서진 시대보다 후한 말기 시대가 더 개념있는 신하들이 많았다. 영가의 난 당시에 숙청당한 청류파 인사들만 봐도... 그래도 사마염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환제나 영제는 이런 직언을 훨씬 더 많이 들었는데 그 직언을 나오는 족족 씹어버리면 다행이지 목을 날리거나 유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사 통틀어 창업군주이자 대륙 통일을 이룩한 황제 본인이 대놓고 암군급이라는 욕을 들어먹은 인간은 사마염이 유일하다. 대표적인 예로 망국인 촉한의 신하였던 번건에게 "어디 제갈량 같은 사람 없나?" 하자 "등애도 똑바로 못 쓴 주제에 무슨 제갈량입니까."뜬금없이 간접 디스 당한 등애이라고 까였을 정도이니. 이제 유선 재평가론이 나올 때가 되었다.
왜 등애가 나왔는고 하니 종회의 난 당시 억울하게 일족이 주륙당한 등애의 신원도 못하는데 제갈량 같은 신하가 있어 제대로 쓰여지겠느냔 뜻이다. 이에 사마염이 등애의 신원을 해주었고 자손들도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사마염이 통일 과정을 주도해 실적을 쌓았다면 그나마도 욕을 덜 들었을 테지만, 그는 중국 역대 통일왕조 초대 황제중 가장 천하를 거저먹은 케이스라서 평가가 더욱 박하다. 할아버지 사마의대에 조위의 전권을 얻었고 큰아버지 사마사 대에 친황세력을 몽땅 쓸어냈으며 아버지 사마소 대에 마지막 반란분자 제갈탄과 국적 촉한을 멸망시켰다. 사마염이 한 거라곤 선대가 거의 다 만들어둔 제국을 이어받아 손호의 폭정으로 거의 망해가던 손오를 집어삼킨 공적밖에 없었다.
통일을 하는 것도 자기가 생각이 있었다면 동오의 대도독이고 육손의 아들 육항이 죽고 그 틈을 노리자고 진나라의 충신인 양호의 일찍이 손오를 정벌하자고 했다면 280년이 아닌 몇 년전에 달성을 했고 양호의 유언대로 따르지 않았으면 천하통일은커녕 천하통일 직후처럼 똑같은 일이 벌어질거라 짐작이 된다.
그 밖에도 오나라 국경을 지키던 대사마 석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해, 전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석포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석포를 소환했는데, 이때 석포가 뜻밖에 순순히 오자 석포의 관직을 사도로 올려버렸다는 미담도 있다. 그런데 이 아저씨의 막내아들이 석숭이란 인간이다.
사실 가장 큰 업적인 천하통일조차도 사마염 본인에게는 그다지 의욕이 없었던 모양새였다. 물론 손호의 후궁과 애첩들을 모두 끌어다가 자신의 후궁에 넣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마염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면 독발수기능의 난을 꼽을 수 있다. 호열과 견홍이 서량통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건의 간언을 씹어서 1차적인 원인중 하나를 제공했으나 당시 무명에 불과했던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후에도 신하들의 온갖 모함을 무시하며 끝까지 지지해서 독발수기능의 난을 동오정벌 이전에 종결시킬 수 있었다. 진서 <마륭전>만 참조한다면 사마염은 아예 성군으로 보인다. 이 순간의 사마염이 꾸준히 이어졌다면 어떨까 싶은 심정이 들긴 하다.
통일 뒤에는 부패하고 무능해져서 암군으로 바뀐 사례다. 사마염은 그래도 능력이 있어서 황제 노릇은 제대로 하고 살았으며, 그 생전에는 서진이 막장 부패를 달렸어도 큰 문제는 없이 나라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사마충은 백치라고 지칭할 만큼 훨씬 무능하고 능력도 없어서 나라를 말아먹는다. 다만 사마충은 원래 지적장애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묘하게도 손권과 비슷하다. 초기의 모습은 정상인데 말년은 흑역사에 후계 인사를 잘못했다는 점까지도...
2.2 진정한 통일 군주?
드립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삼국지의 세 축이던 군주들의 특성을 하나씩 이어받았으니 삼국지의 끝을 장식할 통일 군주로는 나름대로 합당한 사람이라 볼 수도 있다. 세 영걸의 단점과 오점만 이어받은 데다 더욱 막장을 달려 문제지만.
3 가족 관계
아내 | 자녀 | 봉작 | 이름 | 탄생 | 사망 |
무원황후(武元皇后) 양염(楊艷)[1] | 장남 | 비릉도왕(毗陵悼王) | 사마궤(司馬軌)[2] | ? | ? |
차남 | 혜제(惠帝) | 사마충(司馬衷) | 259 | 306 | |
3남 | 진헌왕(秦獻王) | 사마간(司馬柬) | 262 | 291 | |
7녀 | 평양공주(平陽公主) | ? | ? | ? | |
8녀 | 신풍공주(新豊公主) | ? | ? | ? | |
9녀 | 양평공주(陽平公主) | ? | ? | ? | |
무도황후(武悼皇后) 양지(楊芷)[3] | 16남 | 발해상왕(渤海殤王) | 사마회(司馬恢) | 283 | 284 |
효회태후(孝懷太后) 왕원희(王媛姬)[4] | 17남 | 회제(懷帝) | 사마치(司馬熾) | 284 | 313 |
귀인(貴人) 좌분(左棻)[5] | 자식 없음. | ||||
귀빈(貴嬪) 호방(胡芳)[6] | 11녀 | 무안공주(武安公主) | ? | ? | ? |
부인(夫人) 제갈완(諸葛婉)[7] | 자식 없음. | ||||
미인(美人) 심씨(審氏) | 4남 | 성양회왕(城陽懐王) | 사마경(司馬景) | ? | 270 |
8남 | 초은왕(楚隠王) | 사마위(司馬瑋) | 271 | 291 | |
16남 | 장사려왕(長沙厲王) | 사마예(司馬乂) | 277 | 304 | |
재인(才人) 서씨(徐氏) | 5남 | 성양상왕(城陽殤王) | 사마헌(司馬憲) | 270 | 271 |
재인(才人) 궤씨(匱氏) | 6남 | 동해충왕(東海沖王) | 사마지(司馬祗) | 271 | 273 |
재인(才人) 조씨(趙氏) | 7남 | 시평애왕(始平哀王) | 사마유(司馬裕) | 271 | 277 |
미인(美人) 조씨(趙氏) | 18남 | 대애왕(代哀王) | 사마연(司馬演) | ? | ? |
부인(夫人) 이씨(李氏) | 9남 | 회남충장왕 (淮南忠莊王) | 사마윤(司馬允) | 272 | 300 |
15남 | 오효왕(呉孝王) | 사마안(司馬晏) | 281 | 311 | |
보림(保林) 엄씨(嚴氏) | 10남 | 신도회왕(新都懐王) | 사마해(司馬該) | 272 | 283 |
미인(美人) 진씨(陳氏) | 11남 | 청하강왕(清河康王) | 사마하(司馬遐) | 273 | 300 |
제희(諸姫) | 13남 | 여음애왕(汝陰哀王) | 사마모(司馬謨) | 276 | 278 |
재인(才人) 정씨(程氏) | 14남 | 성도왕(成都王) | 사마영(司馬穎) | 279 | 306 |
생모 미상 | 장녀 | 상산공주(常山公主)[8] | ? | ? | ? |
생모 미상 | 차녀 | 장광공주(長廣公主)[9] | ? | ? | ? |
생모 미상 | 3녀 | 형양공주(滎陽公主)[10] | ? | ? | ? |
생모 미상 | 4녀 | 형양장공주 (滎陽長公主)[11] | ? | ? | ? |
생모 미상 | 5녀 | 번창공주(繁昌公主)[12] | ? | ? | ? |
생모 미상 | 6녀 | 양성공주(襄城公主)[13] | ? | ? | ? |
생모 미상 | 10녀 | 만안공주(萬安公主) | ? | ? | ? |
생모 미상 | 12녀 | 영천공주(潁川公主)[14] | ? | ? | ? |
생모 미상 | ? | 영수공주 | 사마수려 | ? | ? |
- 18남 7녀로 총 25인. 그러나 이 많은 자식들은 지들끼리 죽고 죽이면서 사마치와 사마안 둘만 남는다. 그리고 이마저도 영가의 난으로 몰살 크리.
- 이들 빼고도 역사에 기록한 첩은 10여 명이 더 있다. 또 못 기록한 수천여 명의 첩들도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자녀가 없었다.
- 또한, 진나라에서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이다. 사마충은 가남풍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고 팔왕의 난에 휩싸여 죽고 만다. 진회제, 진민제는 전조의 포로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죽는다. 진나라가 남쪽으로 이동한 후에 즉위한 진원제는 왕돈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진명제 때 황제권을 되잦는 것 같았지만 요절하고 이후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환온, 환현 같은 신하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효무제 때 잠시 황제권을 되찾는 듯 싶었으나 효무제가 어이없이 죽고난 후 진안제와 진공제는 유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어 유유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진나라는 멸망당한다. 그리고 진나라 황족들은 유유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다.
4 미디어 믹스
- 사마염/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 ↑ 양문종의 딸로 사마염이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다.
- ↑ 2세에 요절해서 차남인 사마충이 사실상 적장남이었다.
- ↑ 양준의 딸로 무원황후의 당질녀이며 사마충의 계모다. 가남풍이 쿠데타를 일으켜 양준 일족을 처리할 때 무도황후는 그의 어머니 방씨를 살리려고 황태후 체면에 며느리 앞에서 무릎꿇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가남풍은 방씨를 죽였으므로 이에 절망해 스스로 굶어죽었다. 참고로 그녀는 259년생으로 256년생인 며느리 가남풍보다 3살 연하다.
- ↑ 원래는 사마염의 첩 중에서 재인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아들 사마치가 황제를 하자 효회태후로 추증되었다. 사마소의 아내 왕원희(王元姬)와는 다른 인물이다.
- ↑ 좌분 또는 좌빈. 좌옹의 딸이자 좌사의 누이.
- ↑ 호분의 딸.
- ↑ 제갈충의 딸.
- ↑ 두 눈이 먼 장님. 남편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를 사마염에게 대접하기로 유명한 왕제(王濟).
- ↑ 남편은 진덕(甄德).
- ↑ 남편은 노심(盧諶).
- ↑ 언니 형양공주와 작위가 같은 걸 보면 동복 자매일 수도 있다. 참고로 '공주'는 황제의 딸에게, '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에게,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에게 붙여지는 칭호. 남편은 화항(華恒).
- ↑ 남편은 위선(衛宣). 하지만 이혼했다.
- ↑ 남편은 동진 초기의 권력자이자 반역자인 왕돈(王敦).
- ↑ 남편은 왕수(王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