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육

鍾毓
(? ~ 263)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치숙(稚叔)[1]. 종요의 아들이자 종회의 형.

14세에 산기시랑이 되었고, 기민하고 농담을 잘해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228년에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군했을 때 조예가 직접 나서려고 하자 종육은 다음과 같은 말로 조예를 말린다.

대체로 책략은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조정에서 세운 계략만으로도 승리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며, 전공은 장막에서 세우는 것을 숭상합니다. 전당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가가 중앙을 지키고 있어야 사방을 그 위세로 지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대군이 서쪽으로 원정에 나선다면 비록 위세는 백배로 강해지겠지만, 관중의 비용이 증가되어 손실을 입는 것이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또 더운 날씨에 행군을 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소중한 소재가 되겠지만 천하의 지존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후 황문시랑으로 직책을 옮기고 조예가 온갖 공사를 지어 백성들이 힘들어지니 종육은

수해나 가뭄으로 들지 않았을 때에도 창고는 텅텅 비어야 합니다. 대체로 이러한 일은 풍년에가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관내의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하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니 조예가 그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239년에 조방이 즉위하자 산기시랑으로 임명되어 정시 연간[2]에는 호소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천했다. 244년 조상이 촉을 공격하고 여의치 않아 구원군을 요청하자 종육은 조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묘승지책(廟勝之策)이란 화살과 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자의 군대는 정벌에 나서도 전투를 하지 않습니다. 방패나 도끼로 유주목 묘증을 굴복시킬 수가 있었지만 물러나서 적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오한을 강관에 풀어놓고 한신을 정형으로 초빙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능하면 진격하고, 어려우면 물러나는 것이 예로부터 당연한 병법이었습니다. 공후께서는 이러한 점을 잘 살피십시오

조상이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니 종육은 이 일로 미움을 사 시중으로 좌천되었다가 위군태수로 밀려났으며, 249년에 조상이 죽자 중앙으로 돌아와 어사중승, 시중, 정위 등으로 승진한다.

254년에 하후현 일당이 사마사의 암살을 꾀하다가 붙잡히자 종육이 하후현을 심문한 뒤 형의 집행을 했으며, 255년에 관구검의 반란 때는 지절을 들고 양주와 예주로 가서 사면령을 반포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상서로 임명되었다. 257년에 제갈탄의 반란 때는 사마소와 함께 계책을 논의했으며, 손일이 항복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오나라가 이 일로 큰 피해를 입어 더이상 구원을 보내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종육은 손일이 이끌고 온 병사가 300명에 불과하니 수춘의 포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258년에 제갈탄의 난이 평정되자 종육은 청주자사, 후장군이 되었다가 259년 4월에 서주도독에 봉해져 서주의 군사를 총괄한다.

263년 겨울에 사망해 시호는 혜후라 했으며, 아들 종준이 뒤를 이었지만 동생 종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조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후혜와 논쟁을 많이 했지만 하후혜의 견해가 채택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관로와의 일화도 전해진다.

세설신어에는 어려서부터 동생 종회와 함께 명성이 있어 조비가 찾아오자 종육은 무섭고 떨려 식은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조비가 어찌 땀이 흐르냐고 묻자 두렵고 황공해 땀이 국물처럼 흐른다고 대답했다. 종회는 그대는 어찌 땀이 흐르지 않냐고 하자 두렵고 떨려서 감히 땀이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또한 아버지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종회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종육은 배례하고 마셨지만 종회는 마시면서 배례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 종요가 왜 배례했냐고 하자 종육은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으로써 예가 되기 때문에 감히 배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지만 종회는 왜 배례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훔치는 것은 본래 예가 아니기 때문에 배례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세설신어에 나온 조비를 만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지만 종회는 225년에 태어났고 조비는 226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종회는 2세에 말도 하고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식견이 있다는 것이 되지만 세설신어의 성격으로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조비가 아닌 그의 아들 조예라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세설신어에는 동생인 종회보다 한살 많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28년에 조예에게 간언을 한 점을 보면 아마도 관직에 있었을 것이고, 14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는 점을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종회보다 진짜 한살 많았으면 고작 한국 나이로 5세에 한 나라의 황제에게 요지있는 설득을 한 것이 되므로 신빙성이 없다[3].

2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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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나 평범한 문관. 동생인 종회와 많이 비교된다.

삼국지 9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26/13/70/74의 능력치를 가진 문관이다. 병법은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어 나름 쓸만하다. 아비와 동생에게 큰절이라도 해야 하나...

삼국지 10에선 223년 생으로 등장. 능력치는 27/11/71/74/70에 아버지와 동생을 잘 둬서 짤리지도 않고 명사 특기까지 가지고 있다. 나머지 특기는 농업으로 그나마 정치가 74라 특기를 살릴 수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32/12/71/76/72의 전형적인 문관형에 특기 기원을 소유하고 있다. 238년 등장이라 종회와 마찬가지로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얼굴 구경할 일이 별로 없고,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특기 덕에 영입 순위가 약간 높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아버지인 종요최유기현장 삼장으로 패러디 되었기 때문에 전생인 금선 동자로 등장한다. 광명 삼장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광명 삼장이라기엔 눈매가 다르며 꽁지머리도 없다. 거기다 장집 역시 아버지인 장기의 패러디인 저팔계의 전생인 천봉원수로 등장했으니 금선으로 보는게 확실할 듯 이것으로 종회가 손오공으로 확정인가?
  1. 자에 '숙(叔)' 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아, 4남 중 3남인 것 같다.
  2. 240 ~ 249년이다.
  3. 삼국전투기에서도 만약에 종회와 고작 1살 차이였으면 출세에 중심을 맞췄으며 실제로 승진속도가 매우 빨랐던 종회보다도 승진이 빠른 셈이라며 회의적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