僞勳削除
조선에서는 임금의 즉위에 공이 있거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종묘사직을 지키는 데에 큰 공이 있는 신하들을 공신으로 임명하여 관직 승진은 물론 막대한 토지와 재물, 노비를 하사하고 이를 세습하게 하였다. 위훈삭제는 조선 중종 시절 정계에 진출했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제기한 주장으로, 중종반정에 의해 임명된 공신 중 실제로는 공이 없으면서 공신으로 서훈을 받아 이익을 챙긴 무리를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받은 작위와 재물을 반납케 하자는 내용이었다.
중종반정의 공으로 서훈된 공신을 정국공신(靖國功臣)이라 하는데, 이들은 1등부터 4등까지 모두 총 117명이었다. 이는 개국공신(조선 개국), 정사공신(1차 왕자의 난), 좌명공신(2차 왕자의 난), 정난공신(계유정난), 좌익공신(세조 즉위), 적개공신(이시애의 난), 익대공신(남이의 옥사)을 통틀어 그 숫자가 가장 많았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반정이었던 만큼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많은 수의 공신을 책봉한 것이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반정에는 공이 없는 자들이 공신으로 책봉된 경우가 많았다.
반정 3대장이라 불리는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위시하여 반정 주도세력들은 자파 세력을 늘리기 위하여측근이나 지인들에게 반정에 공이 없어도 공신 자리를 뿌렸다. 여기에는 국왕인 중종마저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종이 대군시절 자신을 잘 섬긴 자가 있는데 비록 반정에 공은 없지만 의리를 봐서 공신에 책봉하자고 추천할 정도였다.
사림파가 이런 사정 속에서 위훈삭제를 주장한 것은, 말 그대로 조정에서 소위 훈구파라 불리는 세력들을 몰아내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중종 또한 내심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집단이었던 훈구파의 약화를 원치 않는 것은 아니었겠으나, 훈구파를 적으로 돌렸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으므로 일단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당시 조정 역학상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훈구파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파가 117명의 공신 중 2등과 3등 일부, 4등 전부 해서 총 76명의 위훈삭제를 상계하였다.
처음에 중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 조정에서 훈구파를 한번에 몰아내고, 정권을 사림파로 넘기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산군이 백성을 상대로 학정을 펼 때에도 보고만 있던 훈구파였지만, 백성들을 착취하다 모자라 훈구파의 재산에 손을 대려 하자 반발하여 임금을 갈아치운 세력이 훈구파였다. 중종 또한 스스로도 훈구파를 섣불리 건드렸다가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는 물러서지 않았고, 사흘 밤낮을 대전 앞에 엎드려 위훈삭제를 주청하였다. 사실 이 시기는 이미 중종이 사림파의 이와 같은 비타협성과 융통성의 부재 등으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자신이 안된다 하는 것을 신하인 사림파들이 떼를 쓰며 요구하니, 국왕의 입장에서는 사림파가 왕권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을 할 개연성이 존재했다. 어쨌든 중종은 사림파의 압력에 떠밀려 위훈삭제에 찬성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중종은 사림파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고 나흘 만에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 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