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己卯士禍

조선 시대의 4대 사화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1 개요

죠광죠의 기묘한 사화 1화, 2화[1]

1519년(중종 14년) 일어난 사화(士禍).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림파들이 다시 한번 정계에서 밀려 나간 사건으로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김구 등이 사형당했고 나머지 사림들도 대부분 귀양가거나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 밖에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이들과 친분관계가 있던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정계 복귀는 다시 한 세대가 더 걸리게 된다.

조선 4대 사화 중 가장 사화라는 이름에 들어맞는 사화다. 무오사화는 처음부터 사림파가 죽을 짓을 자초했고, 갑자사화는 오히려 훈구파가 더 크게 당했으며, 을사사화는 외척 세도가 간의 권력 다툼에 더 가까웠다. 반면 기묘사화는 왕과 대신들이 작정하고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2 일반적 인식

조광조 등 신진 사류가 펼치는 깨끗한 정치과연 조광조도 깨끗했을까에 대한 훈구파의 반감이 기묘사화로 발전했다고 본다. 이 시각에 따르면 때묻고 구태의연한 훈구파에 대항해 일어난 사림파들이 원칙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중종이 이에 동조하자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사림들을 모략한 결과라는 것.

결정적 계기는 위훈삭제 사건으로 중종반정으로 공신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 실제 참여가 없었던 자들의 공신첩을 회수하자는 사림파의 주장이 관철되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가 공작을 펼친 결과라는 것. 홍경주의 위치에 주목하여 아직 군부에 세력이 남은 훈구 세력이 군사력으로 중종을 협박했다는 시각도 있다.

기묘사화를 상징하는 문구중 하나인 주초위왕(走肖爲王)은 이 같은 시중의 인식을 드러내는 장치다. 훈구파 중 한 명인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여 사화를 일으켰다고 한다.[2]

3 실제로는?

KBS 역사스페셜팀이 실제로 실험을 해봤는데 결과 벌레는 그런 거 신경 안 썼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즉 실제로는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3]

실제로 기묘사화의 전개과정을 보면 일반적 인식과는 다른 상황들이 나타난다. 우선 기묘사화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조정회의에서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종 단 한 명뿐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은 물론이고 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져있는 남곤도 조광조의 사형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조광조가 사형을 면하고 능주로 귀양간 것도 남곤과 정광필의 극렬한 결사반대에 따른 결과였다.[4] 훗날 권신이 되는 심정, 이행 등도 조광조를 죽일 필요까진 없을 것이라고 사사에는 반대했고 정책적으로는 조광조의 반대파이지만 대쪽같은 정승이던 정광필의 경우 "신은 임금을 살육의 길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저들은 조금도 삐뚤지 않은 사람들인데 어찌 죽음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며 아예 모가지를 내어놓고 중종을 만류했다. 하지만 중종은 기어코 추가 죄목을 찾아내 조광조를 죽여버린다.

따라서 기묘사화는 중종 자신의 의지로 일이 촉발되었다고 봐야한다. 중종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기묘사화의 주역은 남곤이나 심정이 아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1519년 11월에 대신들을 은밀히 소집한 것도 중종이고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조광조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린 것도 중종 혼자 저지른 일이다. 남곤이나 심정이 한 건 그냥 중종의 발표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일 뿐이다. 중중과 훈구파 사이에 뭔가 섬씽이 있었던 건 확실하지만.

거기다가 리더라고 불렸던 남곤은 훈구파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인물이다. 그는 정통 관료 출신으로 연산군 시절에는 연산군에게 대들다가(!) 귀양 간 전력이 있었다. 중종 즉위 후에는 성희안, 박원종 등 기존 공신들과 대립각을 세웠고, 나름 청렴하고 깨끗한 인물이기도 했다. 능력도 출중해 대중국외교 서신을 이 사람 혼자 전담했다.[5] 어찌 보면 조광조의 선배격 되는 사람이 남곤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남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귀양 정도면, 한 몇 년 정도 정계에서 축출하면 되지 않을까?'가 기묘사화 당시 남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실록 기록을 보면 남곤의 발언은 어느 순간 부터 기묘하게 달라져 그래서 '기묘'사화 나중에는 조광조 일파로 보일 정도로 그들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당시 남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결국 기묘사화는 주연 중종, 조연 남곤·심정·홍경주, 피해자 조광조로 봐야한다. 주·조연이 바뀐 셈.

4 추측들

핵심은 '중종이 왜?'라는 점에 쏠린다. 중종 본인이 당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아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세간의 추측처럼 너무 딱딱했던 조광조 등 사람들의 태도에 질려버려서 일 수도 있고, 애당초 '쓰고 버릴 카드'로 조광조를 사용했다는 추측도 있다. 반정으로 왕위에 등극했던 중종은 관료층을 분열시킬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떠오르던 신진세력인 조광조를 이용해 기존 관료층을 분열시킨 다음, 효용가치가 사라진 조광조를 버렸다는 추측이다. 이는 임용한 연세대 국사학과 강사가 주장한 내용으로 자세한 것은 임용한씨의 '조선국왕이야기'에 실려 있다.

또한 왕실에서 전통적으로 존중해왔던 도교풍의 제사기관인 소격서 철폐를 놓고 중종과 조광조가 격심한 의견대립을 보였는데 이때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에 두고 강경하게 폐지를 요구했다. 수차례 폐지 논의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성종 같은 역대 왕들이 지켰던 소격서가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폐지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중종은 체면이 깎였고 그로 인해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조광조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받아쳤다.

선대 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당시 시대에는 사안에 따라서는 역모로 몰리기도 충분한 언행이었을 것이고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은 중종이 그 앙금을 오래도록 기억할 만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은 이전이나 이후나 조선역사에서 넘사벽급 왕인데 오점 그것도 유일한 오점이 어쩌고 하는것 자체는 왕 입장에서는 꺼림찍할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기묘사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위훈삭제 사건으로 왕가의 지지세력이 흔들리게 되자[6] 중종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있다.[7]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종이 형 연산의 폐위과정을 눈으로 목격하였고, 그때문에 지나친 신권의 강화를 매우 경계했기 때문에 조광조와 일당들이 숙청되었다고 추측했다. 후에 조광조 이상의 권력을 갖는 권신 김안로의 숙청에 대해서도 이런 이유라고 서술하였다.

이 같은 추측들 중 중종이 어떤 의도로 숙청을 밀어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명했다시피 중종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위의 추측 중 하나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거나 혼합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 의지는 매우 강력했을 것이다. 조정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한 걸 보면 중종의 조광조 숙청 의지는 예전부터 확고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충동질에 의해 멋대로 결정한 게 아니라는 소리.

5 후일담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입궐명령을 내렸고, 남곤, 심정, 정굉필은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8] 갑자기 소집된 조정회의에 놀란 조광조 등 사림파는 부랴부랴 경복궁으로 들어왔지만 회의는 이미 끝난 뒤였고 곧바로 체포된다. 어리둥절했던 조광조는 감옥 안에서 배신감을 가졌고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고 한다.[9] 다음 날 취조를 위해 조광조를 끌어냈을 때는 이미 너무 취해 있어서 심문이 불가능했고, 조광조는 심문관이었던 병조판서 이장곤에게 "희강(이장곤의 자)아! 나한테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 못난이 같으니라구!"라는 반말도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남곤과 정광필의 만류로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당했지만 한 달도 못돼 바로 사사당했다. 이 외에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됐다. 현랑과는 폐지되었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긴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이라 불리게된다. 다만 조선 당대에도 비판이 있어서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했고, 퇴계 이황 또한 조광조에 대해 공부가 부족했다고 비판한다. 대체로 조광조가 너무 과격하게 이상정치를 추구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허나 이들의 행보를 비교해보면 선조대 조정 주류가 된 사림들이 조광조의 개혁을 못 따라가서 발생한 인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전론과 노비종모법을 중심으로 연산군 이후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국역의 이완, 지배층의 모랄해저드와 토지잠식, 양소천다 현상을 해결하려 했고 훈구와의 격렬한 충돌끝에 절충론이라 할 수 있는 급양자 3자 첨입까진 이끌어 낸다. 이 시기 조선 인구의 50%가 노비였다. 국가가 내부에서 완전히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대에 집권한 후대 사림들 중에 이정도로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사람이 없다. 제대로 언급이나 관련된 개혁논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치부에만 열을 올렸다. 사림, 특히 서인을 중심으로 개혁논이 제기되고 사족들이 동감하게 된건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 이후다. 개혁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걸 절실히 깨닫고 나서야 움직였다. 이이야 살아 생전 늘 경장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이 300여년간 모든 개혁론의 뿌리가 되었으니 조광조의 논의에 대해 할 말이 있다지만 물려받은 재산으로 부유하게 살며 초야에 묻혔던 이황은?

선조 1년에 조광조는 신원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 추증되는 등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선왕인 중종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왕조 국가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초위왕' 날조설이 공식화 되고 모든 책임은 남곤과 심정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 때 이순신의 조부인 이백록도 기묘사화에 휘말려 처벌을 받았다. 단,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처럼 사약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 생활을 한다. 그러니 이순신더러 역적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틀린 말.

게다가 이순신이 벼슬 생활을 시작한 선조 시대에는 여론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사림들에게는 더욱 오래전부터 기묘사화가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묘사화 때 해를 입었다"면 수치스러운 역적의 자손이 아니라 오히려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만한 일이었다. 당장 인조 때 명신인 김육만 해도 기묘사화 피해자 후손이다.(증조할아버지가 조광조때 같이 피해입은 김식이다.) 김육의 가문은 송시열과 대대로 대립하며 김석주까지 번영을 누렸다.
  1. 물론 만화의 내용은 각색이 심하게 들어갔으니 개그로만 받아들이자.
  2. 이 이야기는 중종실록에는 없지만 선조실록 1568년 기사에 "남곤 등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라 하여 추가로 기록되어 있다.
  3. 자세한 내용을 적자면 먹는다 해도 나뭇잎에 발라진 꿀만 먹지 나뭇잎까지 꿀로 쓴 글자 그대로 갉아먹지는 않는다는 것.
  4. 심지어 훗날 조광조 사사명이 내려졌을때 사관은 정광필이 가장 슬퍼하였고 남곤 또한 슬퍼했다고 기록했다.
  5.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과의 외교 서신 교환 때는 제한도 많고 이래저래 걸리는 것도 많아서 웬만큼 문장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이면 아예 맡기지를 않았다. 따라서 이 일을 전담한다는 건 조정 내에서 이 사람이 문장력 하나는 킹왕짱이라는 의미. 실제로 세조 때 대 중국 서신 교환을 전담했던 최항은 개차반같은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조정 신료들이 꼼짝을 못했다.
  6. 조광조 일파가 주장했던 삭제 명단에는 종친들도 많이 있었다.
  7. 물론 위훈삭제가 정당치 않은게 아닌게 수가 너무 많고개국공신도 40명 남짓인데 정난공신은 100명 엉뚱한 잡놈이 많이 껴 있어서 위훈삭제 자체는 정당하다.
  8. 그래서 기묘사화를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 부르기도 한다.
  9. 조선시대의 감옥은 사식이 없으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사식에 극도로 의지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잘살던 사람이 옥에 들어갈 때 다른 가족만 멀쩡하다면 그만큼 사식이 잘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래도 술은 너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