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

中宗反正

조선 시대의 반정
무인정사계유정난
중종반정인조반정
문체반정
"지금 위에서 임금의 도리를 잃어 정령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는 위태롭기가 철류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진성 대군은 대소 신민(臣民)의 촉망을 받은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의 분부를 여쭙니다."

-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1506년) 9월 2일 무인 1번째기사[1]

1 개요

1506년(연산군 12) 음력 9월 2일(양력 9월 18일) 막장의 극을 달리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막장을 막장으로 몰아낸 사건이다.

평소 연산군에 불만이 있던 유순정, 성희안, 그리고 무인 박원종의 주도와 연산군의 협박과[2] 임사홍의 견제[3] 아래 밑에서 아부해 목숨을 부지하다가 기회를 노리던 유자광, 그리고 연산군 밑에서 윤당한 분부라고 아부하며 숨죽이며 살던 영의정 류순, 그밖에 뭔가 건수가 없나 기웃거리던 인물들의 연합이 이루어낸 쾌거.

2 전개

무오사화 당시에만 해도 훈구파는 비교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 연산군을 부추겨 사림파를 몰아내었고, 그 이후 연산군의 학정이 슬슬 시작되나 이에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4][5] 이런 상황에서 훈구파는 신수근, 임사홍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파와 유자광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부중파로 자체 분열하게 되었다.

이는 궁중파가 부중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독차지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난 분열로, 이후 일어난 갑자사화는 원래 훈구파의 적이었던 사림파는 물론 궁중파가 적으로 지목한 부중파 소속의 훈구파까지 함께 대거 화를 입었다. 그러나 연산군과의 혈연 등으로 맺어진 궁중파는 여전히 소수였고 부중파가 다수였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사림파는 물론 대다수의 훈구파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린다. 연산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락 비용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백성들을 쥐어 짜는 것에 한계가 있자, 훈구파들의 재산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의 어려움은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재산이 강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훈구파는 더 이상 연산군의 난행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이 풍자시로 간언했다가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되자[6] 여기에 앙심을 품고 박원종을 끌어들여 반정을 모의했다.

박원종의 거사 동기를 누이인 월산대군(연산군의 큰아버지) 부인 박씨가 연산군한테 겁탈당했다는 데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우선 50이 넘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연산군이 뭐가 좋다고 범했는지도 그렇지만, 애초에 연산군은 박씨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박원종을 보내 간호하게 했다. 만약 정말로 간통 내지는 강간이 있었다면 연산군이 그 사람의 남동생을 보내 간호를 시킬리가 만무하다. 워낙 또라이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박씨가 임신 당하여 수치심에 자살했단 이야기도 근거는 없다.

박원종이 중종반정에 참여한 이유는 박원종과 연산군 사이의 알력 때문이었다. 당시 박원종은 연산군에게 유일하게 바른말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만큼 무인 내에서 가장 끗발있던 권력자였다.[7] 그도 그럴 것이 박원종 아버지였던 박중선과 더불어 근 반세기동안 병조를 장악한 집안이 이 집안이다. 고로 이 사건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연산의 의도를 눈치챈 박원종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해석하는게 더 옳다. 이미 연산은 한번쯤 경고를 한 상황. 연산을 비판하던 이장곤이 유배된 제주도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전라도에서 유빈, 이과 등 역시 반정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에 먼저 선수를 쳤다는 설도 있다.

이 반정에 부중파 소속의 훈구파가 다수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아도 심정적으로 지지했으므로 반정 이후 소수의 궁중파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훈구파가 그대로 정권을 잡았다. 이는 부중파였으며 연산군 시대에도 국정에 중신으로 참여한 유자광이 반정에 참가하여 반정 1등 공신 자리를 차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반정 3공신인 류순정, 성희안이 모두 김종직의 직계이므로 사림 역시 당당히 자리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8]

3 의의와 영향

중종반정은 조선왕조 최초로 순전히 '신하'가 주도하여 '왕'을 몰아낸 반정 사건이다. 이전의 태종, 세조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으나 왕위에 오른 왕족이 반정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반면에 중종은 가만히 있다가 순전히 신하들에 의해서 옹립된 왕이다. (물론 중종도 선왕의 적자(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이므로 후대의 인조반정 정도로 크게 훼손당한 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반정에 비해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파급이 적고 반정의 충격이 조기에 수습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동인물인 박원종 등부터가 연산군 집권기에도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들 이외에도 연산군 치하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중종반정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반정이 일어나던 날서야 비로소 반정군에 아부하고 은근슬쩍 끼어들어 살아남은 자들이 한두명이 아니다. 당시 이미 연산군 본인과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한 조정의 대부분의 신하들 사이에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같은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도 은근슬쩍 끼어든 인간이 한둘이 아닌 걸로 나온다. 심지어 반정 중에 고개한번 안내밀고 반정 끝난 후에 립서비스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공신으로 책봉된 인간도 수두룩하다.[9]

연산군이 너무 막장이라 대부분의 신하들에게도 간단히 배신당해 손쉽게 제거된 반면, 결국 연산군과 극소수의 최측근만 제거당하고 대부분의 부패한 인물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의외로 이들은 권신치곤 빨리 사라졌다. 원인은 수명이 다했기 때문.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거 때문에 축출되어 귀양지에서 71세로 사망하였고,[10] 이후 박/류/성의 반정 3대신이 줄줄이 사망하면서[11]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키울 틈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났어도 백성들의 삶에는 별로 큰 변화가 없었다. 반정 성공 이후 선포한 금표 철폐가 얼핏 보면 연산군이 빼앗은 백성들의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금표로 연산군이 빼앗은 땅의 대부분의 원주인은 훈구대신들이나 전현직 관료들이었다.[12] 게다가 연산군이 유흥비용 마련을 위해 내수사를 과세기관으로써 초법적,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종시기에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여기에 연산군이 일시 중지했던 승과 폐지를 비롯한 불교 탄압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본래 연산군 시기에 백성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공물이었다. 본래 토지세인 전세와 개인 현물세인 공물, 노동력 제공인 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금체계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것은 전세였다. 그런데 연산군 시기에 연산군이 스스로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재정 지출을 크게 늘리고 그 결과 공물의 양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백성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공물은 재산의 다과라 할 수 있는 토지와 관계없이 개인당 부과되는 인두세 같은 개념이었기 때문에 빈한한 계층일수록 공물의 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따라서 연산군 시기의 폐정을 개혁하는데 있어서는 이러한 공물 수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지만 중종반정 이후로도 이러한 공물 과다 수취의 형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늘어난 재정에 따라 그 사용처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이를 다시 없애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공물 대신 다른 세금, 즉 전세의 비중을 높여야 했지만 이것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공물 과다 수취의 형태는 이미 세조대의 보법의 실시로 인한 군역부담 증가로 인해 붕괴하고 있던 양인 층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양인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 공물 수취의 모순이 공물의 전세화-대동법을 통해서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야말로 연산군의 자리에 반정공신들이 대신 들어앉은거나 다름이 없었다.[13] 중종도 초반에는 반정공신들에게 밀려서 제역할을 못했으니...반정에 참여했던 채수는 이런 현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설 설공찬전에서 중종반정을 주전충에 빗대어 그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4 중종반정을 다룬 사극들

연산군 ~ 중종 시대가 워낙 사극의 배경으로 많이 쓰이는 시기라서 사극에서도 제법 자주 나오는 사건이다. 연산군이 주인공일 경우 사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엔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중종 시대의 인물이 주인공일 경우[14] 사극의 도입부(오프닝)로 나오곤 한다. 즉 사극에서는 누가 드라마의 주역이냐에 따라 사극의 오프닝 아니면 엔딩으로 쓰이는 사건.

  1. 참고로 중종실록의 기사다.
  2. 연산군은 유자광을 집권 내내 겁주고 달래는 식으로 길들이려 했다.
  3. 무오사화 당시 임사홍의 아들이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유자광에 의해 투옥되어 옥사하였고 임사홍은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유자광과 협력하면서도 이후 그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4.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씀씀이가 커지고 국가재정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이때까지만 해도 연산군의 통치가 아주 막장은 아니었다.
  5. 이전 서술에는 "백성들의 삶은 훈구파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지나치게 훈구파를 부정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에 가깝다. 훈구파 대신들이 개인적으로 치부에 열을 올린 것은 사실이나, 이와는 별도로 세도정치 이전까지의 조선시대 집권세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나름대로 많은 신경을 썼다.
  6. 그냥 시를 썼는데 연산군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7. 게다가 박원종의 다른 누나는 제안대군(예종의 외아들) 부인이었다. 한마디로 겹사돈. 다만 제안대군부인 박씨는 제안대군의 계실로, 순정파 제안대군에게 소박을 맞았다.
  8. 훈구파와 사림파는 사실 혈연이나 학연관계에서 딱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 사림이 훈구되고, 또 훈구의 자제가 사림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굳이 따지면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맥은 사실 김종직의 직계는 아니다. 김종직이 사장(글쓰기)을 경학보다 중시한다고 김굉필이 그를 떠났기 때문.
  9. 대표적인 인물이 연산군이 총애했으며 열렬히 시를 지어 임금에게 아부했던 문사(文士) 김감과 강혼. 이중 강혼은 영의정 류순의 비호로 살아나 슬쩍 반정에 참여했고 김감은 장인 채수를 억지로 술취하게 한 후 반정 당일에 합류해 장인과 사위 둘다 공훈을 받았다.
  10. 유자광의 아들 두 명은 중종의 배려로 유자광의 사후 공신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11. 각각 중종 5년,7년,8년 사망한다.
  12. 다만 백성들이 경작하던 땅이 금표 안에 있던만큼 약간은 백성들에게 이득이 돌아갔을수도 있다. 땅도 없는 백성이 농사지을 땅마저 없으면 유랑민이 되는것 외에 길이 없다.
  13. 정국공신들을 보면 거의 다 연산군 치하에서 벼슬하던 자들이다.
  14. 사실 중종 치세가 사극의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나 중종 본인이 사극의 주인공으로 나온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