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시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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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William James Sidis, 1898~1944)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연구원으로, 역대 최연소 하버드 대학교 입학, 졸업자이다.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는 1898년 4월 1일 뉴욕에서 러시아 유대계 이민자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보리스 사이디스는 1887년 정치적 박해를 받아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보리스는 불과 몇 개월만에 영어를 할 수 있었고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 조기 졸업했다. 이후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로서 하버드에서 여러가지 책과 논문을 쓰며 심리학을 가르쳤다.

어머니인 사라는 1889년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 1897년 보스턴 대학교 메디컬 스쿨을 졸업한 뒤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사이디스가 태어나면서 양육을 위해 의사직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사이디스의 부모는 사이디스에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교육과정을 밟게 하는 대신에 아이만을 위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조숙하게 길러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이디스에게 체벌을 하지 않았고 아이에게 공감하며 아이가 학문자체를 사랑하게 만들려는 형태로 영재교육을 시작했다. 이러한 형식의 교육은 당시 미국에서 매우 획기적이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사이디스는 생후 6개월 때 처음으로 말할 수 있었고 18개월 때 뉴욕 타임즈를 읽었다. 세 살때 자신이 살 장난감을 주문하기 위해 타자기로 장난감 회사에 편지를 쓰고 네 살때는 라틴어를 배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낭독했다. 6살때 브루클린에 있는 통합 학교를 7개월만에 졸업했다. 그는 하버드대 심리학 박사이자 의무박사인 아버지에게 수학, 천문학, 해부학 등을 배웠다. 사이디스는 8살 때까지 독학으로 9가지 언어(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터키어, 아르메니아어, 영어)를 익혔다. 그리고 스스로 벤더굿(Vendergood)이라는 이름의 인공어를 만들었다.

어린시절의 사이디스가 한 일은 다음과 같다.

  • 생후 6개월때 숟가락을 사용하여 스스로 식사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2개월 뒤에는 성공했다.
  • 생후 6개월에 문(Door)이라고 말했다. 2개월 후, 어머니 사라를 향해 문, 사람들, 움직이는 것들이 좋다고 말했다.
  • 생후 7개월에 달을 가리키며 "달"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달을 갖고 싶어했다.
  • 1살 때 철자법을 익혔다.
  • 3살 때 타이핑을 시작했다. 타자기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높은 의자를 사용했다. 처음 입력한 것은 장난감 회사에 장난감 주문하는 편지였다.
  • 4살 때 아버지의 생일 선물로 라틴어로 된 갈리아 전기를 낭독했다.
  • 4살 때 고대 그리스어로 된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었다.
  • 6살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습득했다.
  • 6살 때,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히브리어를 습득. 또한 터키어와 아르메니아어를 습득했다.
  • 6살 때 어떤 날짜를 지정하면 요일을 계산하고 맞출 수 있었다.
  • 6살 때 의대 해부학 교과서인 '그레이 해부학'(그레이 아나토미)를 배웠다. 대학 수준의 수학 시험에서 합격점을 맞췄다.
  • 6살에 브루클린에 있는 통합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이해도가 빠르기 때문에, 3일만에 3학년에 진급. 7개월 만에 졸업했다.
  • 7살 때 의대 해부학 필기시험을 보아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 8세 때 9개 국어를 구사했다.
  • 8세 때 스스로 자신만의 인공언어인 벤더굿을 만들었다.
  • 8세 때 수학과목에 있어 아버지 보리스를 추월했다.
  • 8세 때 하버드 대학 교수 E .V 헌팅턴이 쓴 수학 교과서를 교정했다.
  • 4세에서 8세 사이에 4권의 책을 집필했다. 해부학과 천문학 책도 썼지만, 분실되고 현존하지 않는다.
  • 10세 때 하버드 대학의 논리학 교수가 쓴 논문을 정정했다.
  • 11세 때 굉장히 고차원적인 수학과 천문학을 익혔다.


사이디스의 부모님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다. 그들은 어린 사이디스를 하버드에 보내고 싶어했다. 1906년, 8살의 사이디스는 하버드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하버드는 사이디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거절했다. 그는 10살 때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터프츠 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1909년 11살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하버드 대학교 역대 최연소 입학이다.

1910년 초, 12살의 그는 수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수학클럽에서 사차원 물체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MIT의 다니엘 컴스톡(Daniel Frost Comstock) 교수는 사이디스가 미래에 수학계를 이끄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사이디스는 1910년에 정규 대학과정을 시작해 1914년 16살에 하버드 대학교를 수학 전공으로 우등(cum laude) 등급으로 졸업했고 바로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수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대학원생 사이디스를 몇몇 하버드 학생들이 괴롭히자 사이디스의 어머니는 휴스턴에 위치한 라이스 대학의 수학과 대학원생 겸 조교 자리를 구해주었다. 거기서 그는 대학생들에게 유클리드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삼각법 3가지를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들보다 나이 어린 선생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 언론의 과도한 주목, 사이디스 본인의 교직생활에 대한 실망 등으로 인해 몇개월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

이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서 3학년까지 좋은 성적으로 다녔으나, 졸업을 앞두고 중퇴했다.

그 와중 사회주의자, 무신론자, 좌익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노동절 전쟁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징역 1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는데, 그 자신이 전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1] "하나님을 믿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대해 사이디스는 "나는 어떠한 신도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2]


석방 이후 사이디스의 부모는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겠다고 협박했다. 이 말에 화가난 그는 부모와 의절한 뒤 미국 동부로 도주, 그곳에서 마켓 점원 등 단순노동의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는 언론들을 상대로 사생활 침해로 고소했지만 법원이 '당신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공인이다.' 라고 판정해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에서 패소했다. 7년여간의 힘든 법정싸움 끝에, 그는 연방정부 대법원에서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35살에는 뉴욕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으나 석차는 254등이었다.[3]

성인이 된 이후의 사이디스는 40여개 국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익명으로 여러가지 논문과 책을 저술했는데 분야는 다양해 우주, 공간, 언어, 사회, 전차, 교통, 심리,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등이 있다. 또한 발명을 통해 특허도 받았다. 기존의 퍼페추얼 캘린더 구조에서 윤년까지 계산되는 퍼페추얼 캘린더를 새로운 형식으로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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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디스가 개발한 새로운 형식의 퍼페추얼 캘린더

그는 실패한 천재로 평가받는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그의 천재성에 비해 알려진 업적이 미미하고, 학회와 동떨어져 있었다.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한 불우한 인생을 살았으며 46세에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그 자신이 굉장히 많은 사회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이에 대해 뉴욕 타임즈는 "과학적인 강제 교육의 멋지고 아름다운 승리입니다" 라며 비꼬았다.
  1. 한국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99% 이상이 종교적인 이유로 이루어지는 데 비하면 매우 특이한 것.
  2. 20세기 초반의 미국 사회에서 무신론자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생각해보면 정말 대담한 발언이다.
  3. 당시의 미국 공무원 시험의 난이도를 보았을 때 이 등수가 그의 지능저하를 나타낸다기 보단 고득점, 상위권으로 합격했을시 받게 될 언론의 주목을 꺼려 의도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