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억겸

兪億兼 (1896~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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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한성부에서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교토 관립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상과에서 법학을 강의하였다. 조교수, 학감을 거쳐 1934년에 부교장을 맡았다. 특히 체육에 관심이 깊어 그의 주선으로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중학교 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기도 하였다.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으로 일제에 의하여 서대문경찰서에게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기소유예로 나와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1937년부터 변호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윤치호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면서 서무부장으로 복직되었는데 1942년 9월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이 가중되자 다시 사임하였다.

광복후 연희전문학교의 제5대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어 기독교청년회 회장을 지냈으며, 1946년에는 미군정의 문교부장(지금의 교육부장관)에 취임하였다. 당시 문교차장 오천석이 제안한 국대안을 실현시키는 등 대한민국 교육정책 수립의 기초작업을 하였다.

또한 1927∼1947년까지 제8대·12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제17회 광복절을 맞아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유억겸기념관이 있다. 묘는 하남시 덕풍동에 있다가 그 지역의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는 창우동에 이장되어 있다.

일제 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