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로마의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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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vius Valerius Constantius ; Constantius Chlorus
(서기 250년 3월 31일 출생 - 추정 -, 306년 7월 25일 사망.)

1 개요

로마 제국의 1차 4두정치 시대의 서방 담당 황제(부황제 293 ~ 305, 황제 305 ~ 306), 본명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지만 흔히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혹은 콘스탄티우스 1세로 불린다.

클로루스(Chlorus)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불린 별칭인데, 창백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명칭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의 사망 원인이 백혈병이나 폐결핵이 아니었는가 추측하기도 한다. 흰 피부가 트레이드마크인 게르만 족 혈통이 로마 최고 권력층에도 드물지 않던 당시 정황을 생각해 볼때, 어지간히 하얗지 않았다면 창백한 황제라고 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느냐는 것.그것도 아니면 쉐이머스급의 핑두 인남캐였을 듯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순전히 본인 실력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에게 인정받아 부제 그리고 황제까지 출세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2 생애

황제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하면 그는 선대 군인황제들 중 한 사람이었던 클라우디우스 2세, 즉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조카딸 클라우디아와 지방 귀족 에우트로피우스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후세의 역사가들 대부분은 이것이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가문을 황가와 연결짓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의심하며 사실 신빙성도 거의 없다.

카루스 황제 시대에 달마티아의 총독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상당한 재능을 보였는지 카루스 황제 생전에 일시 후계자 후보에도 거론되었다고 하는데 실은 이것도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콘스탄티우스가 최고 권력에 참여하게 된 것은 카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카리누스가 사망한 뒤 권력을 장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일이다.

황제의 지상책무를 군의 장악과 국경 방위로 생각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4분하여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제(正帝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부제(副帝 ; 카이사르)를 배치하는 새로운 형태의 통치제도를 고안했는데, 이것을 흔히 4두정치(테트라키Tetrarchy)라고 한다. 콘스탄티우스는 이 새로운 통치제도 하에서 서부 제국의 부제위를 맡게 되었는데, 그 대가로 원래의 처였던 헬레나(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서부 제국의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재혼한다.

이후 그는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에 해당되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지역의 통치를 담당하게 된다. 제국 방어에 있어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라인 강 방어선을 관할하는 갈리아를 통치하는 것은, 비교적 안정된데다 부유했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밑에서 설명하듯 브리타니아는 초반에만 좀 어려웠지 일단 장악하고 난 후에는 상대적으로 지키기 수운 지역이었고 3세기의 위기 때도 아프리카와 함께 가장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본 지역에 들어가는 부유한 땅이어서 어느 정도 이 부담을 덜어줬던 것으로 생각된다.

293년, 그가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때까지 무려 7년 동안 북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황제로 군림하던 카라우시우스(Carausius)를 무찌르는 일이었다. 콘스탄티우스의 군대에 밀린 카라우시우스는 그의 부관격이었던 재무장관(rationalis) 알렉투스에게 살해되었는데,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의 근위도독(a prefect of the Praetorian Guard) 아스클레피오도투스를 파견하여 296년에 알렉투스까지 처단하고 서부 제국 전역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또 알렉투스가 처형된 해인 296년,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의 링고나이(랑그르)에서 게르만 족의 분파인 알레만니 족을 격파하는데 이때 그는 무려 여섯 시간이나 링고나이 성벽 안에서 몇 안되는 병사들과 함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근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스위스 빈디쉬에 해당되는 빈도니사에서 알레만니 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그의 재위기에 로마 제국은 라인 강 방어선의 평화를 확정할 수 있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퇴위하면서 두 정제는 각자의 부황제를 맡던 갈레리우스(동부)와 콘스탄티우스(서부)를 각각 자신들의 후임 정제로 승격시켰고, 부제는 세베루스(서부)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동부)가 선발되었다. 이때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만 부제로서 통치하던 콘스탄티우스는 막시미아누스에게서 에스파니아 및 서아프리카 관구를 넘겨 받았고, 갈레리우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아나톨리아 전부를 받아 부제 때보다 넓은 영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진영에 합류한다. 권력욕이 강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군대에 종군하며 몇차례 군공을 세워 병사들의 신망을 모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에게 충성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이런 아들의 권력욕을 상당히 경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306년, 지금의 영국 요크에 해당되는 브리타니아의 에부라쿰에서 급사하고 군인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옹립하는 사태가 일어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차 사두 정치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욕이 이유였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애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른 두 카이사르 후보들은 본인들마저 놀랐을 정도로 매우 의외였고 사실 공감대도 널리 얻지 못한 조치였음을 간과한 채 결과만 두고 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정제가 되기 꽤 오래 전에 막센티우스와 함께 이미 카이사르 후보로 언급되는 처지에 있었던 반면, 세베루스는 이렇다할 인망이나 지지도가 전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누나의 아들이었음에도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스스로들의 힘으로 권좌를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지 못하면 그들에게 닥칠 장래는 목숨마저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3 관련 전승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황제의 아버지이자, 서부 제국 제일의 오지였던 브리타니아에서 생을 마감한 황제이기 때문인지 기독교 측에서는 그가 잠재적인 기독교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1], 영국에는 그가 영국의 추장이었던 코엘의 딸 헬레나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1. 카이사레아 주교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우스 황제전"이 출전, 그의 첫 아내격인 헬레나 태후는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많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