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1 개요

資治通鑑

중국 북송대의 정치가사마광이 주체가 되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다스리는(治) 도리에 자료(資)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된다'는 뜻으로, 영종의 뒤를 이은 송신종이 사마광을 치하하며 내린 제목이다. 총 294권, 현대에 번역된 한국어 번역본으로도 32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2 편찬 배경

사마광 개인이 모두 편찬한 것은 아니고 시대별로 나눠서 다른 학자들이 편찬하기도 했고 북송 황제 영종도 편찬국까지 설립해 지원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도 받았다. 기본적으로는 사마광이 지어 올렸던 통지 8권을 기초로 하여 구오대사를 따라서 춘추의 규범을 모방하였으며 춘추좌씨전의 서법을 따라서 완성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전문분야를 맡아서 정리했다는 부분은 사서편찬에 있어서 선구적인 방식으로서 한나라 파트는 유반, 삼국시대-남북조시대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인 유서가 맡고[1] 당나라 파트는 사마광의 제자 범조우가 맡았다.[2] 고군분투하여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보다는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마광 본인이 "본인의 정력을 이 책에 다 썼다"라고 할 정도로 내용에 열과 성의를 들였다. 자치통감은 삼국사기사기의 중간 위치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사 최고의 명 역사서 중 하나이며 중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사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역사서로 꼽힌다.

송영종이 그간 정리되었던 역사서들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느껴 사마광에게 편찬을 명해, 1065년 통지 8권을 저술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후 1084년까지 19년에 걸쳐 전국시대(중국)의 시작인 주나라(周) 위열왕 23년(기원전 403)[3]에서 시작하여 송이 건국되기 바로 전에 존재했던 후주의 세종 6년(959)에 이르기까지 무려 1362년에 걸친 역사를 294권 분량의 편년체로 기록했다. 대개 동양 역사책 중 기전체의 대표는 사기, 편년체의 대표는 자치통감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듯하다.

송영종이 사마광에게 사서의 편찬을 명한 것은 당시 지나치게 격화되어 있던 구법파와 신법파의 갈등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구법파라고 보수적이고 꽉막혔다고 볼 수 없고 신법파라고 검증된 확실한 방법도 아니었다기 때문에. 갈등은 격화되었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완전히 척살할 상황도 아니었던 송영종은 일단 구법파의 필두였던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파의 신료들을 귀양 보내거나 혹은 그들에게 사약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정계에서 영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서편찬이 꼭 구법파에게 불리하였다고 여길 수만 없는 이유는 사서 편찬을 통해 과거의 가치를 고수하는 견해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치통감은 전체적으로 과거의 가치, 윤리, 도덕, 사회제도를 옹호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치통감 편찬은 송영종의 절묘한 정치적 타협안이었던 샘이다.

3 특징

주요 사건들에 대해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은 말한다)'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탈고한 후에도 스스로 '이건 따로 고증이 필요하겠는걸' 이라고 생각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료 고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자치통감연표 30권도 존재하고 사마광 본인이 본편의 목록과 범례를 정리한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이나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도 있다. 계고록(稽古錄) 20권의 경우엔 본편에서 사마광 본인이 '이 부분은 좀 부족하지?' 싶은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삼국시대를 정통으로 보지 않은 역사서라는 점에서 삼국지(삼국시대(중국))를 다룬 사료에서는 특기할만 한다. 단지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서 위, 진의 연호를 채용했을 뿐, 위를 정통으로 내세우고 촉과 오를 폄하한 것은 아니다. 이는 이른바 "무통설(無統說)"로서 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대립을 어느정도 일단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사 삼국지 번역이 김원중역이 하도 안좋은지라. 그러나 이 책이 위정통론을 주장한다고 착각하는 위빠 이들과, 이 책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떡밥론자들 때문에 퇴색된 감도 있다.

이후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학자들은 물론 공부를 좋아하는 군왕들의 No.1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가장 가까운 예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왕 마오쩌둥이 있다 주석 가운데는 송말원초의 문인 호삼성의 주석인 이른바 '호주'가 가장 유명한데 본편의 기사를 보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덧붙이는 등 훌륭한 주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호삼성 본인의 평론은 다분히 흥망에 대한 감개가 많이 담겨 있다는 평가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으로 사신들이 떠날 때면 임금님들이 꼭 통감 한 질 챙겨오라고 당부하거나, 명나라 황제들이 조공의 답례품으로 쏘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통감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경연에서 자치통감을 강하게 했고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만큼 세종대왕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집현전의 인재들을 총동원해 펴낸 이 주석서가 바로 '자치통감훈의'로, 이것을 간행하기 위해서 세종대왕은 전국을 수소문해 호삼성이 음주를 단 자치통감 일부를 간신히 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걸 바친 사람은 훗날 이걸 바친 덕분에 연좌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4 편집본

4.1 통감강목

과거에도 분량이 엄청난게 사실이라서 보통 주자가 정리한 자치통감강목(총 59권)이 더욱 퍼졌다. 약어로는 "강목." 야사에서 홍국영정조를 구하기 위해 영조아킬레스건인 책을 잘랐다니, 가렸다니 하는 책이 이 책. 편년체인 통감과는 달리 사실에 대해 큰 제목인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체로 작성되었다. 지금보기엔 강목도 분량이 엄청나고, 잘라먹은 부분도 꽤 되지만 원본을 읽은 사람들의 평으론 꽤나 성공적인 편집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나온 남송 무렵엔 첨삭된 부분이 많다고 비판도 많았던 모양으로[4] 이후 명나라때부터 중요시 여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분량에 압도된 사람들은 이거라도 시도해보자. 다만 주자가 강목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춘추필법을 통해 오리지널 통감의 무정통론을 까면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 조선에서도 강목을 많이 접하면서 촉한에 동정적인 여론이 널리 퍼지는 결과가 나왔다. 이 역시 세종대왕의 애독서로 세종은 강목에도 훈의를 달아 '자치통감강목훈의'로 간행했다.

4.2 통감절요

한국에서는 고려 원 지배기 때 유입된 '소미가숙통감절요(小微家熟通鑑節要)' 약칭 '통감절요(通鑑節要)'가 조선말기까지 더 많이 읽혔다. 이 책은 송나라 휘종 때 사람인 강지(江贄)가[5] 집안 애들 전용교재로 편집한 버전이었는데 편찬 자체는 주희의 통감강목보다 이전에 편찬되었지만 출간은 더 늦은 1237년에 간행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간행되었을 때는 이미 강목이 퍼진 뒤라 중국에서는 인지도가 형편없었고 이후 명청대에 가면 이미 이 책에 대해 아는 사람은 멸종되어 자치통감의 다른 축약본들은 알아도 이 책은 이런 책이 있는지 존재조차 모르게 된다. 그에 비해 유독 조선에서는 통감과 강목을 처박아두고 이것만 읽는 선비들이 많아서 통감이라고 하면 자치통감 원본이나 통감강목보다 이 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학자 이덕무정약용은 원전을 놔두고 축약본에 매달리는 이런 세태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했다.[6]

다만 조선 후기에 자치통감 원본보다 통감절요가 더 널리 읽히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재정 문제다. 양란 이후 조선의 문물이 초토화되면서 그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치통감과 강목을 인쇄할 만한 재정이 뒷받침되기 힘들었다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강목을 인쇄하는 데 소요된 종이의 양만 해도 959첩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16세기 기준 종이 한 첩이 20장이었으니 강목 한 질을 완간하는 데만 거의 2천 장이 소요된 셈이다. 물론 간행과정에서 버려지는 양은 제외한 것. 편집본인 강목도 이정도인데 전 294권이나 되는 원전 통감을 인쇄하는 데 드는 물자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 하나 통감절요가 널리 읽힌 이유는 서당이나 가숙에서 아동이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는 기초 교과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조선시대판 성문종합영어인 셈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 완질을 다 읽지 않고 제 7권인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까지만 읽히고 이때 문리가 트이면 재능이 있다고 여겨 다른 책으로 들어가고 여기까지 배우고도 문리가 트이지 못하면 가난한 집안 아이의 경우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여겨 공부를 중단했다. 그리고 문리가 트여도 통감절요를 더 읽지 않고 다른 경서로 넘어갔다. 어차피 축약이 심해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더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5 한국어 완역본

워낙 분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전권을 읽기 어려웠으나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권중달 교수가 무려 14년의 세월에 걸쳐 완역하여 출판했다.[7] 출판사가 힘들어져서 관둔 적도 있었으나 자치통감을 완역 출간하겠다는 열정이 엄청나, 끝내 자신의 사재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후 받은 퇴직금을 털어 자치통감 하나만을 출판하기 위한 출판사를 스스로 설립하고 2009년에 완간. 진정한 대인배. 총 32권으로 삼화출판사에서 출판 중이다. 총 32권의 정가가 90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의 압박이 있으나 수십년의 노력과 집념이 깃든 완역본이라 그런지 권중달 교수 찬양글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북으로도 나왔다. 총 295권. 종이책 한권을 10권으로 나눈듯[8]. 가격은 리디북스 세트가 58만원. 단권을 다사면 82만원. 대학 도서권에 하나씩은 들여 놓도록 압력을 넣어보자 특히 사극 만드는 방송국에... 사실 이미 웬만한 대학 도서관에는 다 비치된지 오래다 전자책이 출간되면서 일부 전자도서관에서 대여해 볼 수 있으며, 앞으로 지원되는 도서관의 수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한다. 지원된다면 이용해 보자.

참고로 자치통감 완역은 번역계의 선두주자인 일본도 아직 못 이뤄낸 일이라고 한다. 다만 통감 원문만을 완역했다는 것이지, 호삼성이나 세종대왕이 달아놓은 주석까지 번역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편.[9] 그래도 원문만으로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이를 홀로 완역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호삼성 주석은 권중달 교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만 조금씩 달려있다.

2015년 10월에는 권중달 교수가 2009년 완간본을 보완한 '평설 자치통감'을 새로 출간하고 있다.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실어 바로 원문대조가 가능하도록 하고,[10] 역사지도와 권교수의 평설을 함께 실었다고 한다. 현재 5권(전국시대)까지 출간 중. 다만 출판사 문의결과 6권 이후의 집필은 2016년 4월 현재로서는 계획에 없다는 듯.

여담으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둘 다 성이 똑같고,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의 이름인 중달은 사마광의 선조인 그 분의 자. 그러나 仲達이 아니라 重達인 게 함정 친척 같아보이지만 완전한 남남. 사마씨야 조상 하나에서 갈라지기는 하지만 사마천은 사마씨 시조의 첫째 아들 계통이고 사마광은 차남 계통이다.

자치통감의 요약본인 통감절요와 강목 역시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중이다. 통감절요는3가지 완역본이 존재하는데, 2015년 충북대 김정화 교수가 번역한 충북대출판부 판본과 2006~2010년 한학자인 성백효 선생이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 판본, 1987년 고려대 철학과 故 김충렬 교수가 다른 다섯 명과 함께 공역한 삼성출판사 판본이 있다. 김정화판은 총4권, 성백효판은 총 9권, 김충렬판은 총 3권이다.[11][12] 통감강목은 2015년부터 전통문화연구회를 통해 '사정전훈희 자치통감강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고 있는데, 2016년 5월 15일 현재 5권까지 출판되었다. 1, 2권은 성균관대 신승운 교수가 책임 번역자로 참여하였고, 3~5권까지는 한학자 성백효 선생이 책임번역으로 참여하였다.[13] 참고로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으로 바로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주석이 달린 강목의 국역본이라는 뜻.

6 기타

마오쩌둥이 무려 17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 ㅎㄷㄷ 읽으라는 공산당 선언은 안읽고![14] 특히 자세한 뜻을 알기 위해서 고대어 사전을 여러권 놓고[15] 꼼꼼히 읽었다고.

고려시대에는 이 책을 자통감(資理通鑑)이라고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려의 제6대 임금인 성종의 휘가 치(治)였기 때문에 피휘를 했기 때문. 이는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부분의 원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말엽 급진개화파의 리더로 유명한 김옥균홍종우에게 암살당하기 직전에 읽었던 책도 바로 이것. 김옥균은 방에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다가 홍종우에게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속자치통감>이란 것도 있다. 송나라 때부터 원나라까지를 다루고 있다.
  1. 특히 남북조 파트의 완성도가 대단해서 사마광 본인이 '나는 이걸 그냥 받기만 하면 되겠는걸'하고 평가했다고 한다.
  2. 특히 수, 당 부분은 신당서 이후 새로 수집한 자료도 써서 사서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평가.
  3. 진나라를 멸망한 대부들이 자신들을 제후로 승인해달라고 낙양에 사신을 보내 위열왕이 이를 승인해 조, 위, 한이 건국되는 기사로 자치통감의 첫 부분은 그 배경인 , , 의 대부들이 지백을 재거하고 진나라(晉) 땅을 갈라먹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4. 애초에 강목체라는 역사 서술 방식이 중국 본국에서조차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않는데, 역사가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고 기록의 원문이 역사를 집필하는 사람에 의해 임의로 깎이거나 바뀌거나 하다가 원래 뜻이 바뀌기도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다. 당대의 실록 및 관련 기록을 거의 복붙해 짜맞추다시피 한 구당서가 후대에 문장면에서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원문을 여러 가지로 첨삭을 가했다고 알려진 신당서보다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
  5. 소미는 강지의 호다.
  6. 사실 이런 세태는 요즘도 비슷하다(...)
  7. 권중달 교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치통감에 관심을 갖고 출판하기 전까지 번역하기 위한 작업기간까지 합치면 40년의 세월을 자치통감과 함께 했다고 한다. 진정한 근성가이. 참고로 원저자인 사마광의 집필기간은 19년이고 권중달의 번역기간은 14년이다.
  8. 원본 구성에 따른 294권 + 별책1권이다.
  9. 안타깝게도 중국 역사서를 번역함에 있어 주석이 홀대 받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처지가 가장 나은 사기만 봐도 번역자들이 삼가주를 날려 먹어서 그 주석들에 반영된 여러 사료 비판, 참고 자료, 주석자의 부연 설명들에 대해서는 번역서를 읽는 사람이 알 길이 없게 된다. 그 다음으로 사정이 괜찮은 정사 삼국지는 역자가 배주에 대해 아예 대놓고 좋지 않은 소리를 했었고.
  10. 단순히 자치통감 원문만 실은 것이 아니라, 강목과 통감절요의 원문도 실어 놓았다. 오오오오...
  11. 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1995년, 한학자인 故 김도련 선생의 번역으로 통감절요 1권을 출간한 적이 있다. 아마 완역을 목표로 하였던 것 같지만 아쉽게도 후속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2년 김도련 선생이 타계하면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김도련 선생이 아세아문화사를 통해서 통감절요의 전통방식으로 한문(한자가 아니라 한문이다.) 주석(두주)을 달았던 적이 있었던 만큼 통감절요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
  12. 이 외에도 완역은 아니지만, 1996년 홍신문화사에서 출간된 조수익 번역의 신역통감이 있는데, 일부만 번역한 것이므로 역시 제외.
  13. 공동번역자도 있는데 교체가 많은지라 주석에 달아두었다. 1~3권 까지는 서정문, 4권은 이종덕, 윤은숙, 5권은 이난수, 윤은숙 등이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14.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의 원본을 상대적으로 적게 읽은 편이었다. 공산당 초기시절 보구에게 책을 빌려 읽었던일도 있었지만 보구는 그가 시골촌놈이 마르크스서적을 읽어 뭐 알겠냐고 뒤에서 비웃은 일도 있었다고한다.
  15. 사실 한문은 현대 중국인도 읽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다. 그리고 중국 내에서도 고대 한자를 읽는 수업까지 따로 있을정도로 한문은 수 없이 많고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