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1 개요

乙卯倭變

조선시대 명종 시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1555년 음력 5월 11일부터 동년(同年) 음력 6월 27일까지 현 전라남도에 있었던 여러 현(縣)들을 유린한 사건. 조선이 건국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왜구의 침입이었다.

2 배경

세종 때의 계해약조를 시작으로 조선은 왜구에게 세견선과 쌀과 같은 물자를 주고 달래는 계약을 맺어왔으나 삼포왜란, 사량진왜변과 같이 계약을 자꾸 어기자 명종 때에 정미약조를 맺어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이는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이에 왜구는 불만을 품고 1510년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하였다.

3 경과

1555년 5월 16일(음력), 전라도 관찰사 김주(金澍)로부터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達梁)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워 버렸고 결국 성이 포위되고 말았다.'는 내용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왔다. 기록에 의하면 왜구들이 해안가로 상륙해서 행패를 부리자,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세린(李世麟)이 즉각 병사(兵使) 원적(元績)에게 이를 알려서 원적이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그를 구원하려고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온은 전사하고 달량은 버티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화친하자고 했다가 점령당하고 해안가 일대는 순식간에 장악당하고 한온을 대신해서 온 장군은 대군을 이끌면서도 겁먹어 꽁무니 빼고는 조정에는 '부하들이 말을 안들어요. ㅠㅠ' 라고 거짓 장계를 올리고 이에 기세가 오른 왜군이 "이 길로 걍 서울까지 가자!" 라고 하는데 이때 이준경이 오면서 급변한다.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데 그런데도 겁먹어하는 남치근[1]에게 호통치는등 준비를 갖춰 적을 물리친다...만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하고 적은 유유히 사라지는데 이유는 그렇게 이겼는데도 인근의 장군들이 무서워서 나올 궁리를 하지 않았다. 결국 왜구만 좋은 일 시켜준 셈.

4 결과

왜구들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중종 때 만들어진 임시기구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승격했다. 공조 판서를 제외한 5조 판서가 모두 참석한 비변사는 이후 권한이 점점 막강해져 세도 정치때에는 다른 모든 기구를 초월한 강력한 부서가 되어버렸고, 따라서 흥선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비변사를 없애버렸다.

이 일은 임진왜란 직전의 모델(?)이 되었는데 을묘왜변당시의 군사 숫자는 5000~7000명이었는데 그래서 조정은 "어? 그래? 그럼 일단 만명 정도 올정도의 대비를 해야겠다." 라고 해서 대비를 한다. 실제로 전라도 일대에 방비를 어느정도 갖추는등 전라도에 좀 투자를 했다. 일단 전라좌수사만 봐도 조선역사상 먼치킨 장군이다.[2] 일본군이 경상도를 친것도[3][4] 좀 치기 괜찮은곳을 노린것이다.[5][6]
  1. 임꺽정때문에 난리가 났을때 조정에서 백성들 위로하라고 보냈더니 가혹한 처벌만 일삼은 인물이다.
  2. 다만 이건 진짜 실력을 알아서 보냈다기엔 뭣하다. 유성룡이 추천해서 보내긴 했는데 같은 당파+같은 스승을 둔 김성일이 "일본 대비한답시고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그리고 이순신 그 친구를 거기 앉힌거 잘못이에요." 라고 할 정도 다행히(?) 전자는 좀 받아들여졌는데 후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사실 전라도를 치는데 좀 더 유리하긴 하다. 당장 조선군이 전라도를 지키려고 용을 쓴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4. 물론 일본이 경상도 일대를 잘 알기도 했지만
  5. 그렇다고 경상도 해군은 진짜 한심한건 아니다! 규모는 오히려 전라도보다 컸다. 다만 거기 앉은게 무다구치 원균, 박홍이라서 문제지.
  6. 참고로 원균은 이순신 전임 전라좌수사이나 하루만에 이순신으로 교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