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

朴泓(1534~1593). 울산 출생.

조선 중기의 무장.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재직하다 왜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기습을 받아 경상좌수영 진포 태반이 쓸려나가며 제때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동래성으로 향했으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패했다. 그 뒤로 여러 전투에 참가 하였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하다 병사하였다.[1]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

야사에서는 능력 없고 비겁한 장수라는 오명도 가득하지만 미처 예상 못한 대규모 침략[2]으로 경상우수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경상좌수영의 태반이 쓸려나가는 상황[3]에서 어찌어찌 병력을 소집해서 어떻게든 싸우려고 했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아주 무능하거나 겁쟁이는 아니었다.

박홍이 도망치고 난 뒤 병사와 마을 주민 25명은 끝까지 남아 싸웠다고 하는데 이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 옛 좌수영터에 있는 25의용단이다. 이 분들에 대한 제사는 일제시대때에도 지내졌으며, 9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안내문에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치자...'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그 부분이 삭제되었다.

80년대 각종 책자에선 겁쟁이 장군으로 너무 자주 나오곤 했다. 1981년 삼성당출판사에서 낸 이순신위인전 만화책에선 겁에 질려 배를 불태우고 달아나는 것만 나오며, 1982년에 나왔던 만화책 《성웅 이순신》에선 더 겁쟁이로 나와 배를 불태우고 서둘러 달아나는데 왜군들이 보고 "저런 비겁한 놈 다 봤나?" 하면서 비웃기까지 한다. 1986년 한국일보 연재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장수 이일과 더불어 찌질이로 나온 바 있듯이 오랫동안 겁쟁이 장군으로 자주 나왔다. 박홍에겐 꽤나 억울한 평가인데 세계적으로 졸장으로 알려져있다.

이일이 조선 백성을 죽여 왜군으로 위장시켰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일은 상주에서 병사들을 한창 수습하던 차에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사방에 떠들어대며 병사들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백성을 참수한 적은 있어도 조선 백성을 죽여 왜군으로 위장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 참수에 관해서는 이일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데, 최초의 지상군 소집이 있었던 대구는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함락되면서[4] 흩어져 버렸고 상주에서 현장모집을 통해 간신히 방어선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정식 보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 훈련도가 부족한 병사들 사이에 그런 말을 퍼뜨렸으니 당시 군법상 죽어도 할 말은 없다. 실제 조선인을 죽이고 적으로 꾸미는 짓을 한 지휘관은 원균, 우복룡 등이다. 이일도 박홍처럼 억울한 오명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128쪽을 보면 박홍은 왜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겁먹고 배와 기지를 불태우고 달아난 졸장으로 소개하면서 원균과 같이 조선 수군을 망친 졸장으로 나와있다. 지은이들이 미국과 영국 해군 교본집필에도 참여한 해군학 전문가들로 이순신을 엄청나게 호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무래도 임란 초기 최전방을 맡은 것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싸우다 전사한 것 때문에 크게 비교될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대다수가 도망가거나 패해서 후퇴했고[5] 박홍에게 이들보다 훨씬 깊은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동래성은 원래 근처 병력이 모두 집결해야 됐고, 여기서 이각과 박홍이 도주함으로써 원래 있어야 할 방어병력보다 훨씬 적어졌다. 성 함락은 어쩔 수 없었다 하나 단 몇 시간만에 함락된 것은 이각과 박홍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실제 평양에 도착한 후 탄핵되기는 했으나 죄를 공으로 씻으라고 봐 주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박홍의 평가는 임란 초기 도망갔다가 다시 전투에 나선 많은 장수들 중 하나로 봐도 될 것이다. 다만 동래성에서 합류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것에서 가중치를 둬야 될 듯.
  1. 일부 사전의 예: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전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병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2. 임진년 이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은 예상했지만 적의 규모나 침공루트에선 좀 더 규모가 큰 왜구 정도로 생각했지 수십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민족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당시 조선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건 이상할 게 없다.
  3. 부산포, 다대포, 서생포 등이 후퇴하지 않고 싸운 것으로 보아 이게 기본 방침인 듯하며 박홍이 동래성에서 집결한 것 역시 병사 이각과 울산성의 병력이 집결한 걸 보아 제승방략에 따른 기본 방침인 듯하다.
  4. 이것은 왜군의 진격이 기형적으로 빨랐던 탓이지 이일이 늦장을 부려서는 아니다.
  5. 경주성을 탈환한 박진도 패퇴했고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도 김성일이 부르기 전까지는 산에 숨어 있었다. 사실 끝까지 맞서 싸운 장수는 모두 전사했다. 원균이 경상우수영 전력을 통째 날려버리고도 자리보전이 가능했던 이유도 여기 있다. 도망간 장수가 하도 많아 다 처벌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