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조선)


조선의 역대 국왕
12대 인종 이호13대 명종 이환14대 선조 이연
묘호명종(明宗)
시호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공헌(恭憲)
본관전주(全州)
능묘강릉(康陵)
이환(李峘)
대양(對陽)
출생지
사망장소한성 경복궁 양심당
배우자인순왕후(仁順王后)
아버지조선 중종
어머니문정왕후(文定王后)
생몰
기간
음력1534년 5월 22일 ~ 1567년 6월 28일
양력1534년 7월 3일 ~ 1567년 8월 2일.(33년 30일, 1만 2,083일.)
재위
기간
음력1545년 ~ 1567년 6월 28일
양력1545년 8월 13일 ~ 1567년 8월 2일.(21년 11개월 20일, 8,024일.)

조선 제13대 .

1 소개

중종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경원대군(慶原大君)이었으며, 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전왕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의 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만에 급사함으로서 왕이 되었다. 어릴 때 양눈에 안질이 있었다는데 인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이 대군은 안질 때문에 눈이 안보이니 왕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를 후계 선상에서 제외시켜 보려 했지만 이언적 등이 대군의 승계를 지지하고 문정왕후가 강력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포기하게 됐다.

따라서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을사사화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권세를 얻은 소윤(왕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부정부패는 엄청나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덤으로 보우를 통한 불교 중흥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그야말로 사대부 입장에서는 외척 + 사화 + 불교 + 여자의 막장 4종 세트.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의적(?) 임꺽정의 활약도 바로 이 명종 재위 기간이었다.

20세가 되어 문정왕후가 스스로 수렴을 거둠으로 친정이 시작된다. 야사에선 문정왕후의 간섭이 심하였으며, 심지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며 또 명종의 행동을 궁녀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을 욕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불러 야단을 쳤다고도 하는데 이건 뭐 그냥 야사다. 아들 순회세자의 죽음 이후론 신하들 없는 곳에선 상당히 성격이 괴팍해져서 실록에서는 명종이 조울증홧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기록이나 야사 때문에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하지만 정사상으로는 근거가 없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에 크게 개입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없다.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근데 이량은 스스로 부패하여 전횡을 부리며 다른 외척들을 해치려다가 열받은 명종에게 윤원형보다도 먼저 숙청당했다.) 그 뒤로 손꼽히는 개입이라 해봐야 명종이 윤원형을 지칭하여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하자 명종을 불러 "주상, 이 어미와 외숙이 없었으면 왕이 됐을 것 같습니까?"라고 나무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게다가 일이 상당히 공교롭게 돌아간 것이,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허자 등 소윤 일파의 좌장들 중에서 윤원형과 이기를 제외한 소윤들은 윤임이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환상에 시달리다가 명종 즉위 3년도 못되어 다 죽고 말았다. 유일한 생존자 허자의 경우는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을 탄핵했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숙청당했다.

윤원형 급의 세도를 누린 이기는 이상하게도 그 존재가 윤원형에 묻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대윤 유인숙, 유관 등을 죽인 명종 집권의 주역 중의 주역이다. 그는 77세까지 장수하며 권세를 누렸는데 그도 명종의 친정 전에 죽었다. 명종이 본격적으로 무엇을 해본 시점에서 남은 사람은 윤원형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종은 윤원형을 이량을 등용해 견제하는 등 권세를 이미 문정왕후가 죽기 전에 많이 약화시켜놓았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들자면 문정왕후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댄 모습 정도. 문정왕후가 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저건 일상적인 수렴 거부의 쇼이고, 저 모습과 달리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다만 재정은 어려움이 많았다. 외척의 득세도 득세이지만, 친정을 시작한 1553년 경복궁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게다가 1550년에는 더이상 줄 땅이 없어 직전법을 폐지해야했다. 좋게 보면 공신, 대신들의 땅 불리기가 공적으로는 중단 된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미 그러지 않아도 될만큼 부패가 극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명종은 경복궁 재건을 엄청나게 닥달함으로서 불과 1년 만에 모두 복원해낸다.

명종은 주로 내시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문제는 명종이 앓고 있는 조울증에 따라 총애하는 내시가 툭하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외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은 이후로 더 심해졌다. 단순히 총애의 정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서 하옥시키고 국문하고, 내시들이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우리들에게는 걸주나 다름 없다"고 투덜거렸을 정도라고...

2010년대에야 드러나는 인식은 어쩌면 문정왕후윤원형의 실정이라고 여겨진 것이 사실은 명종이 방치, 동조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어머니와 외삼촌 쉴드로 잊혀진 진정한 암군이 아니었느냐는 것.

1555년 왜구가 전라도 서남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는데 이게 왜변 중 가장 최대이며 마지막인 을묘왜변이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삼포왜란 이후 생겨난 비상기관인 비변사는 이때부터 상설 정치기구화 된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해군력을 크게 강화하게 되고 판옥선의 도입, 총통의 개량, 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이는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된다. 또 줄어든 군마를 명나라에서 수입하려고 해서 사림 계열 신하들의 비판을 심하게 받는 등, 알고보면 명종도 밀덕후 기질이 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 정책에 돌입하는 등 정치가 안정되나 1567년 명종도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신의 정치는 물론 후사를 구상하기에도 너무 짧은 2년이었다.

한편,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방에서 힘을 기르던 사림은 문정왕후윤원형 등의 척신들이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는 성종 때처럼 훈구파도, 연산군 때처럼 반사림적인 임금도, 중종 때처럼 신진 사림을 제어할 세력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순수 지방사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조정을 가득 채운 사림은 조광조 일파처럼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성종 시절의 따박따박이 부활하게 되었으므로 명종은 이래저래 힘을 쓸 수 없었다.

교과서나 일반적인 서적에는 사림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명종은 그것을 지원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그것이 명종 자신의 색깔인지 아니면 주위에 휘둘린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례로, 당시 관료들은 진정한 현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보고 대학자 이황을 등용하기를 줄기차게 간청했는데, 나중에는 '뭐 적당한 자리 있음 알아보든가'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는 '현자를 초대하나 오지를 않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불러도 오지않는 이황에 대한 섭섭함은 사림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볼 여지가 있다.

외아들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14살의 나이에 중병으로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중종의 7남인 덕흥대원군[1]의 3남이자, 명종 입장에선 조카인 하성군이이었으며 그가 바로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죽고 아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는데, 꿈 속에 한 노인이 어느 여자를 얻으면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했고 그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지만,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여담으로 순회세자의 정실었던 공회빈 윤씨[2]는 남편이 가례를 올린 지 2년만에 죽어 그 후 30여년을 청상과부 덕빈(德嬪)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임진왜란 직전인 임진년 3월 3일 죽었고 남편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역내에 위치한 순창원(順昌園)에 묻히게 되었으나, 그해 4월 말 왜란이 일어나, 어가가 한성을 버리고 피난 가게 되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어가가 벽제관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왔을때 왜군에 의해 가매장한 무덤은 파헤쳐져 있었고 시신은 없었는데 궁궐이 불에 탔을 때 같이 탔던 것으로 보인다. 또 병자호란때는 종묘에 있던 신주마저 없어진 불행한 여인이었다.

명종은 조선의 정식 국왕 중 거나 임금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종묘 정전(正殿)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지지 못한 왕이기도 하다.[3] 22년이나 왕위에 있었는데 심지어 추존왕인 문조나 망국의 군주인 순종에게도 밀렸다.[4] 원래 위패를 옮기지 않고 매년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의 경우[5] 신하들이 "모모대왕께오서는 나라에 큰 공이 있으므로 정전에 불천위로 모시옵소서"라고 주창하고 왕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다시 말해 명종은 후대의 신하들이나 임금에게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

참고로 이 사람의 어릴 적 친구가 정철. 하지만 정철의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2

파일:강릉.jpg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으로 중전 인순왕후 심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태릉선수촌과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 문정왕후태릉이 위치해 있고 이 능의 오른편에는 삼육대학교가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게 도굴당한 선릉정릉과 달리 강릉과 태릉은 워낙 단단해서 도굴에 실패했다고 전한다. 또 2007년까지는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8년에 40년만에 부분 개방제로 바뀌었다. 매주 금요일, 토요일 오전 9시~11시, 오후 2시~4시까지 하루 2차례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단 주의할 점은 7월과 8월, 12월~2월까지는 산불 예방과 관람객 안전을 위해 개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릉을 가려면 한여름과 한겨울은 피해서 방문해야 한다.

어엿한 왕릉이건만 바로 옆에 붙은 어머니의 능인 태릉이 훨씬 더 유명하다. 접근이 제한된 탓도 있겠지만 그저 안습하다고밖에....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신상옥 감독의 영화 내시에서는 후궁을 밤마다 갈아채고 경복궁 지하에 고문실을 운영하는 변태 폭군으로 나온다. 배우는 남궁원. 역사 고증과 무관한데 대비가 고승이랑 가까웠다는 설정과 대비와 주상이 억울한 선비들을 도륙했다.는 설정 및 갑자기 죽어서 세자 없이 다른 종손이 이었다는 설정을 넣기 위해서 일부러 명종으로 하였다.
  • 남궁원이 내시감으로 나온 이두용 감독의 리메이크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종이 아닌 가상의 조선 왕 길용우로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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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추증된 것이며 어머니는 창빈 안씨.
  2. 윤옥(尹玉)의 딸이다. 윤원형의 인척인 황대임의 딸이 숨은 병이 있어서 책빈례를 마치고 양제(良娣, 세자의 후궁)로 강등되었다.
  3. 대신 한 단계 급이 낮은 영녕전(永寧殿) 동협에 경종, 추촌왕인 원종, 진종, 장조, 그리고 의민태자와 함께 모셔져 있다.
  4. 다만 본래 정전에는 현 왕의 5대조까지는 모셔둔다.
  5. 퇴계 이황 종가는 놀랍게도 500년(!)이 지난 지금도 퇴계의 제사를 모신다. 사실 안동에는 그런 불천위 제사가 한두 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