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이경복 |
생년월일 | 1970년 11월 19일 |
출신지 | 광주광역시 |
학력 | 순천상고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9년 해태 타이거즈 연습생 입단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89~1998) |
1 소개
한국의 야구 선수.
광주진흥고로 진학했지만, 진흥고에서 실력이 썩 빼어났던 것은 아니었는지 갓 창단한 고등학교 야구부인 순천상고로 전학하여 여기서 졸업했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의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2 프로시절
타격 실력은 제법 있었는지 1989년부터 간간히 출전했고, 키워볼만한 선수로 인정을 받았다. 다만 수비력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던지라 내야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는 못했고, 주된 포지션은 결국 대타로 고정이 되었다. 1994년에 그래도 대타와 백업, 준 주전 등으로 나오면서 205타석에서 0.327 4홈런 25타점을 기록하면서 1995년 시즌 개막 당시에는 주전 2루수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결국 선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 끝내 주전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대신 왼손 투수의 공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친다는 평가가 있어 대타로서 상당히 중용되었고, 나름대로 입지도 있는 편이었다.
10년의 선수 생활에서 가장 빛난 순간은 크게 두 차례였다. 하나는 1996년 한국시리즈 3차전 0:0으로 맞선 5회초 1사 1,2루에서 현대가 동봉철을 상대로 좌완 김홍집을 올리자 이에 맞선 대타로 나와 2타점 적시 2루타를 친 것이었다. 해태는 이 3차전에서 단 4안타만 쳤지만, 이 때 낸 2점을 이강철이 끝까지 지켜 완봉승으로 장식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경복은 대타로서의 효용성을 인정받아 1993년, 1996년, 1997년 모두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고, 1996년 한국시리즈 3차전처럼 나름대로 활약도 하면서 우승 반지 3개를 얻었다.
다른 하나는 1998년 정규시즌 개막 직전에 치뤄진 프로야구 슈퍼토너먼트였다. 1998년 당시 프로야구는 선동렬, 이종범의 일본 진출과 1997년 14승을 거두면서 한국 땅에 메이저리그 붐을 일으킨 박찬호의 활약으로 인해 찬밥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었다. 그리고 사실 이 우려는 틀리지 않아 프로야구의 암흑기가 열리고 만다. 어쨌든 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이벤트로 개막 직전 8개 구단이 토너먼트로 경기를 벌여 팬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것이 프로야구 슈퍼토너먼트였다. 1998년 슈퍼토너먼트 결승전은 해태와 OB의 대결이 되었는데, 결승전에서 9회초까지 1:0으로 끌려가던 해태는 OB 2루수 이종민의 실책으로 동점을 만들고 2사 2루의 찬스를 잡았다. 그리고 여기서 대타로 나온 이경복은 적시타를 치면서 팀에게 우승을 안기며 자신은 대회 초대 MVP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 수상했다고 감격에 겨운 인터뷰까지는 참 좋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게 그의 마지막 영광이었다.
먼저 프로야구 슈퍼토너먼트는 1998년을 끝으로 폐지되었고(...) 이경복은 1998시즌을 타율 0.138로 마치면서 전년도에도 타율 0.158로 부진했던 것에 이어 최악의 시즌을 보내면서 1998년을 끝으로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3 은퇴후
이경복은 방출 이후 개인 사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5년 현재 남양주에서 야구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