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KIA 타이거즈 소속 현역 내야수 박찬호에 대해서는 박찬호(내야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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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11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첫 완투승을 결정짓는 순간.2014년 올스타들이 쏘아올린 '전설 박찬호!'
이름박찬호 (朴贊浩 / Chan-Ho Park)
생년월일1973년 6월 29일[1]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충청남도 공주시
본관충주 박씨[2]
신체185cm, 95kg, O형
가족아내 박리혜, 슬하 3녀
출신학교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한양대[3]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LA 다저스)
소속팀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4~2001)
텍사스 레인저스 (2002~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2006)
뉴욕 메츠 (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뉴욕 양키스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
오릭스 버팔로즈 (2011)
한화 이글스 (2012)
응원가서진필 - 사나이 순정[4]
LA 다저스 등번호 61번
얼 로빈슨(1958)박찬호(1994~2001,2008)조시 베켓(2012~2014)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61번
제임스 허스트(1994)박찬호(2002~2005)케빈 리차드슨(200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61번
-박찬호(2005~2006)닉 헌들리(2008)
뉴욕 메츠 등번호 61번
제프 던컨(2003)박찬호(2007)리반 에르난데스(2009)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61번
케인 데이비스(2007)박찬호(2009)션 오셜리번(2014~)
뉴욕 양키스 등번호 61번
로이스 링(2010)박찬호(2010)스티브 개리슨(2011)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등번호 61번
션 버넷(2004~2008)박찬호(2010)제프 로크(2011)
오릭스 버펄로스 등번호 61번
-박찬호(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61번
-박찬호(2012)김주(2013)

1 개요

코리안 특급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역대 최고의 한국인 투수[5][6], 대한민국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한국의 前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이자 KBO 국제홍보위원. 역대 2번째 아시아인 메이저리거[7]이다. 불같은 강속구[8]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아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때 다저스의 1선발 에이스[9]까지 올라갔던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을 달성한 투수. 2001년에는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이력을 남긴 역대 최강의 투수.[10] 또한 한국인 야구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때린 타자이기도 하다.[11][12]

주무기는 빠른 강속구와 파워 커브, 슬로 커브, 슬러브. 특히 파워 커브는 메이저 최고의 명품 구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13] 그 외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은 투심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14] 박찬호의 커브는 2000시즌과 2001시즌 2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들 선정 최고의 커브 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구질이었다. 그리고 내야수(3루수) 출신답게 수비 실력도 훌륭한데, 특히 번트 대처능력은 귀신급.

게다가 저 기록들은 소위 말하는 스테로이드 시대[15]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 더 빛난다.

2005년에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딸 셋을 두고 있다. 부인은 박리혜씨로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인 미국 CIA(보통 당황하기 쉽지만 예전에 다큐멘터리에도 나왔다...)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과 같은 은퇴해도 바로 명예의 전당에 들수 있는 레전드급 투수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기도 했지만, 전성기때는 리그에서도 1~2선발급 실력을 보유했던 선수이다.[16][17][18]

탈삼진의 경우, 랜디 존슨에 이은 2위[19]를 마킹한 시즌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LA다저스가 아닌 리그 중위권 수준의 팀에서 활약했을 시,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저스의 1선발은 아니었지만 1선발급 수준이었다고는 주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어차피 투수의 탈삼진 능력에 부여하는 개개인의 평가는 상당히 다채롭고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이하는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타격도 투수치고는 상당하여 통산 3홈런을 기록하였고, 번트가 특히 정교한 편이었다. 2006년엔 시즌 중반까지 3할 초반대의 정교한 타율을 기록하면서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투수부문 컨텐더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었다.[20] 이 해에 박찬호는 선발투수로 풀시즌을 보냈음에도 대타로 2번 등장하여 한 번은 무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기록했고, 나머지 한 번은 연장전에서 2사 주자없을때 펜스앞에서 잡힐정도로 큰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을 정도. 그외 A.J 버넷의 99마일 직구를 깨끗하게 받아쳐서 안타를 만들었다거나, 브랜든 웹을 상대로 3타수 3안타 2타점을 올렸다거나 한 일이 모두 2005~2006년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비슷한 수준의 통산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로 실제로 선수 간의 커리어 유사성을 비교하는 Similarity Score가 952점으로 서로에게 가장 높은 점수다.

2 생애

2.1 유년기

1973년 7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전파사[21]를 하던 가정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어린시절 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는지 교사의 추천으로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22]
공주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공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어려웠던 집안 사정상 그렇게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어릴적부터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이 있었고 타석에 들어섰을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아직도 종종 회자되는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 겸 스윙훈련을 했다고 하고 ,하체단련을 위해 공주산성을 토끼뜀을 하며 오르내렸다는 트레이닝 일화가 유명하다.

2.2 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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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고등학교 시절 고3이었던 1991년에 한미일 청소년 야구대회에 청소년대표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고, 그때부터 MLB에 대한 꿈을 가졌다. 공주고등학교 당시에는 4번타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초특급 유망주였던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등 이른바 Top 3에 비해서는 그리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당시 같은 팀 동기로는 손혁홍원기가 있었다. 링크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금 5,000만원에 거의 합의했으나[23][24]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한양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십수년 만에 고향으로 귀환했다.

한양대 2학년 시절이었던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나가 활약했으며 이 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에서 오퍼가 들어왔다. 먼저 박찬호는 애틀랜타와 접촉을 했고 애틀랜타 측에서 계약금 30만 달러를 제안했다.[25]

그런데 현지 사정에 밝지 않았던 박찬호는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 때 숙소를 제공해 준 것으로 인연을 맺은 스티브 김(훗날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됨)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받았음을 확인했고, 스티브 김이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 구단과 밀당을 할 것을 주문한 끝에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 달러 오퍼를 받았다. 이후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 프랭크 조브 박사[26] 등이 계약 문제로 한국으로 오면서 계약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병역 문제 등으로 인해 계약이 불투명하기는 했으나 대승적 차원에서 병역 문제 등을 눈감아주면서[27] 1994년 1월 11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고 정식으로 입단하게 된다.[28]

2.3 LA 다저스 1기

1993년 다저스 입단식. 왼쪽은 토미 라소다 당시 감독

다저스 입단 당시 그가 원했던 등번호는 16번이었다. 공주고와 한양대 시절 달았던 등번호가 16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저스에 와서 보니 16번은 당시 투수코치였던 론 페로나스키가 달고 있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온 새파란 신인이 선배도 아니고 코칭스태프의 번호를 뺏는 것은 하극상으로 보일까봐서 아마추어 시절의 등번호를 뒤집어(...) 61번을 달게 된다. 다저스에서 61번을 단 선수는 1958년 뛰었던 얼 로빈슨 이후 36년 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은퇴할 때까지 61번을 본인의 분신처럼 등에 달고 활약했다. 박찬호는 등번호 61번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방송에서 수차례 언급했다.
그가 당초 원했던 16번은 이듬해 론 페로나스키 코치가 팀을 떠나며 자리가 비었고 이 번호의 주인은 공교롭게도 박찬호와 같은 시대에 다저스에서 활약했던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에게 돌아갔다.

첫해인 1994년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데, 이 기록은 당시 기준 17번째 진기록이었다.[29] 그러나 역시 당시 구위로는 MLB에서 버티기 어려웠고 17일만에 바로 AA로 내려가게 된다. 이 당시 MLB 직행은 LA의 한국인들을 노린 마케팅이었다는 설도 적지 않게 들리고 있다. 이후 AA와 AAA를 거치고 난 뒤 1995년 9월 40인 로스터 확장에 맞춰 다시 MLB로 승격되었고 나름대로 쏠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6 시즌 시작 전 5선발 자리를 두고 여러 선수들과 경쟁[30]하였으나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5선발 자리를 쉽게 차지하였다. 1996년 4월 7일 컵스 원정에서 선발 라몬 마르티네스가 타석에서 부상을 당하자 바로 구원 등판하여 구원승을 따냈고 이것이 MLB 첫 승이었다. 4월 12일에는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홈경기에서 첫 선발승을 따냈다.

1997 시즌에도 치열한 5선발 경쟁 끝에 선발자리를 꿰찼고, 8월 11일 컵스전에서 생애 첫 완투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한국 언론은 그를 크게 다루지 않았으나 5연승을 거두며 시즌 10승을 넘기자 부랴부랴 그를 띄워주고 스타가 된다. 그 해, 정치인인 김종필은 TV에 나와 박찬호가 내가 다녔던 학교 후배라고 난데없는 자랑을 하기도 했다.[31] 시즌 성적은 14승 8패 ERA 3.38.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소집차 모인 김병현박찬호

건달같다 으아 맞아라

1998 시즌에는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7월에는 6경기 동안 42⅔이닝, 4승 무패, ERA 1.05, 탈삼진 34개를 기록하면서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즌 성적은 15승 9패.시즌 직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팀의 우승에 일조하였고 병역 특례를 받게 되었다.



박찬호는 이 발차기로 7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으악!
1999 시즌에는 성적이 매우 안 좋았다. 4월 13일 애리조나 디백스 원정경기에서 생애 첫 만루홈런을 맞았고, 그 유명한 한만두를 이 해 맞았다. 그해 박찬호는 한만두 포함 4개의 만루홈런을 맞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공동 타이기록. 게다가 6월 5일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 상대 투수이자 천하의 개쌍놈 팀 벨처가 박찬호에게 욕설[32]을 하자 팔꿈치 가격 뒤 이단옆차기라는 기이한 싸움을 보였고 벤치클리어링 후 퇴장 당했다. 참고로 이 벤치클리어링은 역대 최악의 벤클중 6위에 뽑혔다 ㅎㄷㄷ. 이유는 야구의 암묵적인 룰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스파이크화를 신고 있는 야구선수들의 발차기가 금기이기 때문. 발을 머리에라도 잘못 맞으면그래서 머리 안차고 발등으로 찼어..(봐준거다). 그대로 은퇴할 수도 있고, 실제로 자니 쿠에토에게 발길질을 당한 제이슨 라루는 뇌진탕으로 실려갔고, 다시는 선수신분으로는 그라운드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 위의 동영상에서 엔젤 페냐를 봤다면 당신은 대단한 야빠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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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5일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의 장면.[33]

2000년도 애너하임 전 선발투수로서의 모습

2000 시즌에는 그야말로 에이스 모드...라고 하기에는 케빈 브라운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빼어난 모습을 보였다. 2000년 8월 25일 몬트리올 전에서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했고[34],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에서는 생애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날은 홈런도 쳐 냈다. 18승 10패 ERA 3.27의 최고의 성적.

이듬해인 2001시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초 방어율 2점대행진을 달리면서 전반기부터 그해 FA계약금액이 얼마나 될것인가하는 기사가 돌았다. 투수 첫 연평균 2000만달러 계약을 돌파할것인가하는 가쉽성기사도 나올 정도.올스타전에도 출전하였다. 그러나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고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올스타전이후 허리가 문제가 되어 성적은 급락하게 되고 또한 배리 본즈의 시즌 71, 72호 홈런 신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시즌 성적은 여전히 15승 11패 ERA 3.50으로 뛰어났다.

2001 시즌 뒤 FA 자격을 획득했는데, 이 당시 다저스는 대런 드라이포트와의 희대의 먹튀 계약을 체결한 뒤라 박찬호를 붙잡을 돈이 없었고, 결국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박찬호가 부상을 숨기고 있었지만 텍사스는 그것을 몰랐고, 이는 텍사스와 박찬호 둘에게 매우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다저스 시절은 박찬호의 전성기라 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다저스 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2.3.1 다저스의 1선발이었는가?

이 시절 박찬호는 그야말로 리그에서 선발투수로서 열 손가락 내에 꼽힐만한 성적을 냈다는 주장과 당시 세이버 스탯을 살펴보면 박찬호는 팀 덕에 승만 많이 챙겼을 뿐이지 절대로 리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볼 수가 없다는 주장이 공존한다.

우선 FIP가 방어율보다 꾸준히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이유는 운빨이라기보단 박찬호의 수비가 워낙 뛰어나서[35] 본인의 힘으로 막은 실점이 꽤 많은데 FIP는 투수 수비도 지워버리기 때문이며 박찬호도 FIP의 예외케이스 중 하나이다.(FIP 문서에도 나와있다.)


FIP보다 정확한 DRA 기반의 PWARP로 아시아 투수들의 전성기 2년을 보자.

1위 다르빗슈 2012~2013 9.54 (4.74/4.80)
2위 박찬호 2000~2001 9.34(4.80/4.54)
3위 왕첸밍 2006~2007 9.30 (4.53/4.77)
4위 노모 히데오 1995~1996 8.41 (4.78/3.63)
5위 이와쿠마 하시시 2012~2013 6.86 (4.85/2.01)
6위 쿠로다 히데키 2012~2013 6.64 (3.34/3.30)
7위 다나카 마사히로 2014~2015 5.50 (2.51/2.99)
8위 토모 오카 2002~2003 5.24 (3.20/2.04)
9위 마쓰자카 다이스케 2007~2008 5.18 (2.19 / 2.99)
10위 김병현 2002~2003 5.15 (2.14/3.01)
11위 이라부 히데키 1998~1999 4.99 (2.52/2.47)
12위 사이토 타카시 2006~2007 4.78 (2.21/2.57)
13위 류현진 2013~2014 4.54 (2.65/1.89)

간단히 이야기해서 전성기 박찬호는 2013 사이 영상 2위까지 차지한 다르빗슈에 버금가는 위력을 자랑하는 투수다. 박찬호가 2000년 기록한 4.80 warp는 류현진이 2년간 기록한 4.54 warp보다도 높다. 즉, 류현진은 김병현하고 비교해야지 박찬호와 비교하는 것은 류현진 안티의 행동이 아닐까 싶다.


또한 몇몇 박빠들은 다저스 시절에는 팀의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은 거액을 주고 데려오자마자 드러눕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박찬호가 팀내 최고 에이스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케빈 브라운은 데려오자마자 드러눕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적 첫 해인 1999년에 252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 팀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반면 박찬호는 194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5.23을 기록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역시 케빈 브라운은 230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58을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만 박찬호의 실질적 전성기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2001년 시즌에 케빈 브라운은 부상으로 인해 115⅔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65를 기록하였다. 2001 시즌 케빈 브라운은 '콜라 등 카페인이 많은 음료를 많이 마셔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는' 묘한 부상을 시작으로,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 덕택에 2001 시즌은 개막전 선발을 포함, 박찬호가 사실상 1선발이었다. 참고로 브라운이 약을 빤 시기는 부상을 당한 2001시즌 직후부터다. 그러나 정작 약빨을 받기는커녕 더욱 성적이 하락해버리며 좋지 않은 끝을 보이고 말았다.

2.4 먹튀가 된 5년간의 흑역사: 텍사스 레인저스&샌디에이고 파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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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꿈과 희망으로 부풀게 했던 텍사스 레인저스 입단 장면.
톰 힉스[36] 구단주 : 최고의 투수를 영입했습니다.[37]
박찬호의 좌측에는 롸동자 알렉스 로드리게스[38], 우측수염라파엘 팔메이로.
두 명 모두 스테로이드 복용자인 것이 이채롭다. 참고로 저 둘은 02시즌 100홈런을 합작했다.

텍사스 금지어 텍사스의 볼드모트

박찬호는 풀타임 선발이 된 1997년부터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2001년 역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정상적이라면 많은 돈을 받고 계약을 하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2001년에 FA로 대박 내보겠다고 부상을 안고서 투구를 했고[39] 시즌 후에 그걸 알고 있던 다른 팀들에서는 영입 제안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쪽은 시애틀 매리너스 정도였다고 한다. 차라리 투수 극친화적이었던 시애틀 셰이프코필드로 갔으면 성적이 어땠을까 이치로때문에 안갔을라나

그런데 그거 모르고 걸린 게 에이스급 투수가 필요했던 텍사스 레인저스. 2001년 말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가 보장된 거액에 계약했다 (1년 후 구단에 보너스 600만달러를 요구할 권리를 얻었는데 구단이 이를 거부하면 FA를 선언할 수 있는 선택권이 포함되어 첫 년차의 성적이 좋을 경우 7100만 달러까지 총액이 상승 가능하였다. 그러나 부상으로 나가리..). 물론 여기서 텍사스 입장에서 진짜 문제가 될만한 부상이 있었다면 입단 직전 메디컬 테스트에서 빠꾸 먹는다. 즉 텍사스 입장에서는 일단 지르기 시작하면 오기 싫어하는(구장이 타자구장이니) 투수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저 당시 텍사스는 에이스 릭 헬링을 포함한 선발진의 몰락으로 투수진을 재건하고자 거액으로 지른다. 그 결과는……

엄청난 기대치와 함께 비싼 돈 주고 영입했더니 텍사스 레인저스로의 이적 전후 찾아온 부상으로 첫해부터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이후로도 한만두, 박먹튀라는 욕까지 먹는다. 이 당시 쏟아진 한국 언론의 원색적,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박찬호는 언론에 대해서 안 좋은 인식을 가졌다고 한다.[40] 미국 언론에서도 최악의 FA계약을 꼽을 때 모 본, 대런 드라이포트, 마이크 햄튼, 알버트 벨 등과 함께 항상 상위에 꼽고 있는 계약으로서, 그 이후 한동안 투수에게 장기계약을 하지 않는 분위기까지 불었다.[41][42] 텍사스에 있던 3년 반 동안 제대로 뛴 시즌은 2002년과 2005년이었는데 성적은 안 나왔고, 나머지 2년은 부상으로 누운 시간이 많았으니 커리어도 그 만큼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는 A-Roid에게 24 kids 중 하나라고 까였다.

2005년 오렐 허샤이저 코치를 만나면서 부활의 징조를 보였고 6월에 통산 100승을 달성. 항상 박찬호에 대해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안좋은 기사를 쓰던 텍사스 기레기 기자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부활 피칭을 여러차례 선보이자 박찬호 인터뷰에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못해 나타난 그 기자가 박찬호에게 오늘 피칭은 어땠냐는 평범한 질문을 던지자 박찬호가 웃으며 "당신은 오늘 피칭이 어땠다고 생각하나요?"하고 되물었고 다른 기자들은 빵터졌다. 그 기자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어깨만 으쓱하더니 집에 갔다고.

그리고 7월 31일 플레이오프를 노리던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이적하면서, 부담감도 조금 덜어졌는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방어율은 좋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시즌 10승을 기록한다. 2006년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시즌을 잘 소화해 나갔다. 하지만 게실로 인한 장출혈, 그리고 이어지는 빈혈로 시즌 후반 수술을 하게 되어 로테이션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는 포함되어 생애 첫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등판에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기도 하였다. 수술을 받고 돌아와 플레이오프에서 던진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당시 트레이드 맞상대는 샌디에이고의 필 네빈이었다. 당시 네빈이 1000만달러, 박찬호가 1400만 달러 정도 수령했는데, 양 팀이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돈은 나갈테니 필요한 포지션이나 메우자고 바꾼 것이었다. 참고로 네빈은 텍사스 이적 후 1할 8푼대의 타격을 보여주다(...) 이후 2006년에 텍사스와 시카고 컵스와 미네소타까지 두 번이나 트레이드 되고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2년간 다섯 팀을 다닌 비운의 말년이었다). 컵스에서는 2할 7푼을 쳤는데 미네소타로 이적하고 1할 9푼을 친 것이 결정적이었다. 네빈도 나름 아마추어 드래프트 전체 1번 출신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유망주였다.

정리하자면 박찬호는 아쉽지만 텍사스 시절에는 기대받았던 에이스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텍사스의 선발진은 몇년간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으며, 케니 로저스, 이스마엘 발데스, 라이언 드리스 같은 B급 선수들이 프론트 라인을 맡았던 안습한 상태였다 (2016년 현재의 콜 해멀스, 다르빗슈 유 같은 듬직한 이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샌디에이고 시절, 원인 불명의 장출혈로 인해 고생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워낙 출혈이 심해서 수혈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고, 제이크 피비의 아내가 박찬호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이 사건 뒤에 박찬호가 제이크 피비에게 "피비 집안의 피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피비에게 개드립을 농담을 건넸다. 피비가 동양식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또한 팀의 클럽하우스 리더였던 우디 윌리엄스는 이 시절 정신적으로 박찬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박찬호가 자신의 몸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계속 등판을 자처하자, 박찬호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보라. 오늘 한 경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가정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2000년 다저스 소속 당시 우디 윌리엄스에게 커리어 2호 홈런을 뽑아냈던 건 함정.

2.5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7년에는 뉴욕 메츠와 계약하였으나 장출혈 후유증 등으로 아주 나쁜 모습을 보이며 방출되었으며 휴스턴 애스트로스 마이너에서도 상당히 나쁜 모습을 보여 재활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2.6 LA 다저스 2기

하지만 2008년에 올림픽 예선에서 호투하고 LA다저스와 계약한 뒤 상당한 구위 회복을 보였으며 시즌 초반 완전 재수[43]로 콜업되어 중간계투로 주로 활약하는 한편 선발투수로도 등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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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돌아온 구위와 선발의 기회. 그러나...

2008년 6월 22일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선발 출전에서 35도의 불볕더위 속에서 5이닝 1실점 9삼진의 놀라운 피칭을 보여줬으나 하필 상대팀 밀워키 브루어스 선발이 2007 사이 영 상 수상자인 CC 사바시아. 사바시아는 5회까지 무결점 피칭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날 박찬호의 유일한 실점인 홈런도 쳐낸다. 그리고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마자 사바시아는 홈런을 허용하였다. 흠좀무. 이래저래 안습이다.

한편 2008년은 클레이튼 커쇼가 처음 메이저 데뷔를 한 시기인데 5선발 경쟁을 놓고 커쇼가 더 중용되자 어디선가 커쇼를 마구잡이로 욕하는 글을 올려서 박찬호 팬인 척 선동하는 괴담 아닌 괴담이 퍼져서 이게 사실로 오랫동안 알려졌다. 이 괴담의 정확한 출처와 내용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커쇼가 박찬호의 선발 기회를 빼앗은 역적처럼 대해져 박찬호 팬들과 다저스 팬들 사이에서 심한 다툼이 벌어졌다는 카더라만 무성했다. 따라서 사실로 믿고 낚이지 않도록 하자.. 카더라가 아니라 사실이다. 언론에서도 대놓고 박찬호와 커쇼를 갈등 관계로 부추겼고 둘의 팬덤끼리 네이버 스포츠 댓글이나 엠팍에서 싸우는 장면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다만 네이버 댓글과 엠팍이 개편되면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2.7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년엔 다저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최소 250만, 최고 500만 달러라는 불황치고는 짭짤한 메이져 계약을 해냈다. 조건은 5선발 후보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시즌 초에는 5선발로 선발출장[44]했지만 1승만 거두고 중간계투 요원으로 돌아섰다. 선발투수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박찬호를 계속 믿고 내보냈던 당시 필리스 감독 찰리 매뉴얼은 한국 팬들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중간계투로 전환한 뒤에는 구원승과 여러차례 홀드를 기록하며 선발로 나섰을 때보다 구위가 상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부진의 원인에 대해 일각에선 부상설을 제기하였지만 워낙 예민한 성격의 박찬호가 주변의 과도한 기대에 대한 부담감과 선발투수로 확실히 부활하겠다는 일념이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부진했던 이 아니냐는 시각이 제일 근접한 설명인 것 같다. 실제로 선발에서 탈락하고 릴리프로 전환하면서 상당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으며, 본인도 부담감이 적어 좋은 피칭이 나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여담으로 불펜으로 돌아선 덕분에 MLB 네트워크에서 방송중인 'The Pen'(필라델피아 불펜 선수들의 일상을 다룬 프로그램이다)에 2회부터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불펜 동료들과 있을때 특유의 말투로 한두마디 툭툭 던지곤 하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불펜 에이스'라는 칭호를 들으며 롱 릴리버로서 무피홈런, 삼진/볼넷 비율 10 이상 등의 황금 스탯을 자랑했으나 안타깝게도 9월 16일 경기에서 병살타로 이닝을 마감하던 공을 뿌리다 다시금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이 도졌다. 1994년에 MLB에 진출하여 PS에 던진 경험이라고는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던진 패전처리용 2이닝 뿐. 세상을 향해 법규를 날린 남자가 가진 두 개의 우승반지를 보면 이래저래 부러워 할 수 밖에 없을 듯. 부상을 이겨내고 PS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필리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기록상으로는 1패에 평균자책점 8점대를 찍어 매우 좋지 못하지만, 결정적 위기 상황을 잘 모면했다. 특히 LA 다저스 클린업 트리오를 삼자범퇴시켜 게임을 승리로 이끈 NLCS 1차전은 그 중 백미. LA 원정에서는 다저스 팬들에게 야유를 받은 것 때문에 국내 박찬호 팬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원래 미국야구의 특성상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무조건 우선인 법[45]이고, 1년 전만 해도 다저스 소속으로 NLCS 필리스전에서 등판하던 왕년의 다저스 에이스급 투수가 필리스로 날라버린채 자기 팀을 상대하러 오니 팬들은 불쾌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려니 하자...


이 해의 명장면 : NL 우승이 확정된 뒤 관중석에 올라가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렇게 악의 제국과의 월드시리즈 맞대결을 펼쳐 신종플루에 걸린 상태에서 4게임에 등판해 3⅓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으로 활약해, 예년과 다른 모습을 보이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불펜에서 스캇 에어와 함께 그나마 체면치레를 해준 단둘뿐인 선수가 되면서 길었던 2009년 시즌을 마무리했다. 브래드 릿지 대신 클로저로 기용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2.8 뉴욕 양키즈

2010년 계약발표 당일까지 언론에서는 마치 시카고 컵스와 계약할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모든 사람들과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절대반지월드시리즈 우승반지 득템을 위한 선택으로 추정된다. 계약조건은 1년에 기본 120만달러 + 보너스 30만달러로 선발이 아닌 불펜투수로 뛰게 되었다.

등번호는 이번에도 61번. 외야수 그렉 골슨이 자신의 등번호였던 61번을 포기하고 27번으로 바꾸면서 박찬호는 다시 양키스에서도 자신이 매번 달아오던 61번 번호를 달고 뛸수있게 되었다.

전설의 폭풍설사 인터뷰 뒤에서 웃는 대머리 아저씨가 압권
카메라 뒤에서 미친듯이 폭소하는건 데이비드 로버트슨조바 체임벌린.[46] 기자, 리베라 웃는건 단어 선택을 실수했기 때문이다. 설사를 많이 했다고 a lot of를 썼는데 일반적으로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섞인 말로 terrible 같은 단어가 적절하다. '저 설사 많이 했어요! 데헷!'이라고 말한 셈(...) 또한 한국어도 그렇지만 이런 말은 '복통'이라고 돌려서 말할 수도 있는데 아예 직설적으로 설사, 설사 연호를 해대니 웃을 수 밖에(...) 저는 수 많은 설사를 쌌어요 라고 말한 격.

PARK: I had a lot of diarrhea. That - That is what you want to know?
REPORTER: Your manager said you were sick.
PARK: Yeah, I had a lot of diarrhea. I had diarrhea and then.... why? Why, it's funny?
REPORTER: No. He thinks its funny.
PARK: Save it. The off day - off day I had a lot of diarrhea.. and flu too...a little. A lot of cough. Chest hurts. I feel dehydrated, something like that.

박 : 설사를 많이 했어요. 그, 그게 알고 싶은 건가요?
리포터: 감독 말로는 당신이 아팠다는데요.
박 : 그렇죠. 설사를 많이했고, 그리고... 왜? 왜 이게 웃긴가?
리포터: 아뇨. 다른 사람들이 웃긴가봐요.
박 : 그만해. 쉬는 날 설사와, 감기증세, 기침도 많이 했고, 가슴에 통증. 탈수증세도 좀 있었죠.

2010년 4월 4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레드삭스 원정에서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좌월 2점 홈런을 맞고 뒤이어 케빈 유킬리스에게 그린 몬스터를 맞추는 2루타를 허용한뒤 강판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올라온 다마소 마떼와 호르헤 포사다 배터리는 2연속 폭투를 범하며 유킬리스는 득점. 마떼야 뭐하는거니. 결국 7:9로 양키스는 패배했고 박찬호는 패전의 멍에를 썼다. 가뜩이나 승리투수는 오카지마 히데키...

4월 7일 경기에서는 1:1 스코어에서 7회에 등판하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연장 10회초 양키즈가 커티스 그랜더슨의 솔로홈런 등 2점을 추가, 10회 말 마리아노 리베라의 세이브에 힘입어 통산 121번째 승리를 기록하였다.

4월 15일 에인절스전에서 몸을 푸는 도중 오른쪽 햄스트링에 통증을 느꼈고, 바로 15일 DL행. 박찬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늦게 계약해 약간은 정신없이 새로운 팀에 적응하고 시즌 준비 또한 서둘러 하다 보니 좀 바쁘게 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복귀를 위해 25일에 양키스의 스프링캠프가 있는 플로리다에서 재활에 매진하였으나 여전히 오른쪽 햄스트링 뒤틀림이 낫지를 않아 재활을 중단하였다.

2.9 피츠버그 파이리츠

결국 복귀 후에도 높은 피장타율을 보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코칭스태프의 눈밖에 나 트레이드설이 흘러나왔고, 케리 우드가 트레이드로 양키스에 온 7월 31일자로 웨이버 공시를 거쳐 지명할당되면서 4일 뒤,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클레임을 걸어 피츠버그로 이적, 빅리그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웨이버 공시기간이 지나 FA로 풀릴 경우 영입을 원하는 탬파베이 레이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뺏길 것을 염려한 해적네가 대담(?)하게 나서 데려간듯 싶다. 하위 팀이기는 하지만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투수로서 데려갔으니 어쩌면 양키스에 있을 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승반지는 좀 더 참아야 할 듯.

어쨌든 온갖 고난 끝에 9월 12일 드디어 123승 97패의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을 이루었다! 그리고 10월 1일 플로리다 말린스와 원정 경기에 3-1로 앞서던 5회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3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4승째를 거두면서 124승 97패 아시안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였다![47]

흔히 말하는 박까들은 노모 히데오의 123승 109패와 비교하며 박찬호를 까기 바쁜데, 선발승으로만 이루어낸 노모의 123승에 비하면 불펜에서의 승수가 더해진 박찬호의 기록이 못미친다는 논리. 인고의 세월이 더해진 대기록에 사용하면 안될 비교이다. 더군다나 이런 얘기가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나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최다승을 경신한 후 한화 이글스로의 복귀를 원한다는 발언을 했는데, 한화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의견은 "한국에서 마무리 잘하자."와 "그냥 미국에서 깔끔하게 은퇴하자."로 팽팽히 맞섰다. 다만 공통적인 의견은 "국내에 와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원자단위로 까이는 건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2010년 시즌을 마치고 향후 진로를 놓고 가족이 허락한다면 국내에서도 뛸 수 있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등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4개 구단에서 박찬호와의 계약에 흥미를 보인 상황이고, 박찬호 본인 역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까닭에 기자회견을 열어 2011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겠다는 사실을 밝혔다.

2.10 Good Bye MLB

하지만 2010년 12월 20일 스포츠조선 단독보도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로 갈 것이라는 기사가 났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등번호는 그대로 61번. 오릭스 팬 여러분 최고의 투수를 영입했습니다.
#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결국 영영……. 그래도 일본시리즈와 한국시리즈가 있으니까…. 하지만 오릭스와 한화의 막장성은 박찬호도 극복할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 생활은 이미 청산한지 오래라고 한다. 근데 좀 요상한 게 본래는 오릭스에 입단하는게 아니라 고향팀인 한화로 오고 싶었다고. 하지만 오는 데 여러가지 병신력 넘치는 규정이 산재해 있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다가 일단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가닥을 잡았다.

2.11 새로운 도전, 2011 오릭스 시절

오릭스 입단이후 첫 공개훈련.

2011년 3월 6일 주니치와의 시범 경기를 가졌는데 결과는 4이닝 5실점. 이에 네티즌들에게 쫌 까였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 없이 박찬호 자신은 이번 성적에 일단은 나름대로 만족한 모양이다. 일단은 계획대로 80구를 던져서 그중 51개는 스트라익을 만들었고, 탈삼진 5개에 사사구 2개가 4이닝동안 5실점하고 교체 될때까지 낸 성적인데 일단 박찬호 자신은 뭔가 자신감을 얻은 듯한 뉘앙스를 주었다. 게다가 시범경기때 한번 푸닥거리한번 하고 본 시즌 들어가서 잘나가는 선수들도 있으니...

그렇게 시범경기 선발등판에서 죽을 쑤던 것도 몇번이였을까…. 3월 21일 쿄세라돔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등판, 53개의 공을 던지고 볼넷을 한개도 내주지 않고 딱 3피안타만 허용하며 총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의 위기 관리능력과 구위가 상승한 것을 본 팬들은 "이제야 몸풀렸구나!" 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 사회가 흉흉한 가운데, 3월 15일자로 피해지역 지원금 모금에 1천만엔을 기부했다고 발표 하였다. 배용준에 이어 기부발표에 대해, 일본 내 야구팬들은 크게 감사하다는 반응. 대인배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같은 일본 야구계 선수들은 왜 기부금 안내냐고 자국 프로선수를 까는 훈훈한 상황이.

4월 2일 있었던 프로야구12개팀 자선경기에 선발로 출전, 상대는 지바 롯데 마린스로 해당 팀에서 활약하는 김별명김태균과의 투타대결이 화재를 모았다. 하지만 보크를 6개나 범하면서 페이스가 무너져서 인지 6이닝에 포풍실점...일단 투구와 볼끝은 좋았다지만 10년 넘게 미국에서 야구생활을 하다가 규정이 더 세밀한 일본야구의 보크 규정에 발이 많이 묶인 듯 하다.

결국 여러가지 불안요소가 노출되면서 아쉽게도 개막전 선발투수 자리는 기사누키 히로시에게 돌아갔다.

4월 1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 정규시즌 첫 선발 등판했다. 마쓰이 카즈오에게 선두타자 홈런을 허용하면서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오릭스 수비진의 도움과 베테랑다운 위기관리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6⅔이닝 3실점으로 역투했다. 7이닝 가까이 던지면서 투구수가 고작 83개였을 정도로 투구수 관리도 적절했다. 하지만 라쿠텐의 에이스인 다나카 마사히로의 구위에 오릭스 타선이 완전히 발리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이 날 경기에서도 보크를 하나 범했지만, 본인이 수긍했다고 한다.

4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7이닝동안 3피안타 4볼넷 6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일본에의 첫 승을 거두었다. 거기에 이날은 부진하던 이승엽이 몸을 던져 안타와 점수를 뽑아내어 팬들을 열광시켰다.

4월 29일, 이번에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다나카 마사히로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2회에만 5안타를 맞으며 3실점했지만, 그외에는 특별한 위기없이 8회까지 완투. 그러나 이번에도 오릭스의 타선이 9회까지 완투한 다나카의 구위에 발리면서 1득점에 그치는 바람에 완투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나마 1득점도 병살타구가 실책으로 타자가 살아서 얻은거다. 이쯤되면 오릭스에게서 한화의 향기가 난다 이 날의 기록은 8이닝 110투구수 9피안타 3실점 0볼넷(!) 4탈삼진.

어린이날인 5월 5일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 선발 등판하지만 잦은 실투를 범하며 5이닝 7피안타 5실점으로 부진, 패전투수가 된다. 이날도 오릭스 타선은 당연히 무득점으로 침묵.

5월 11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4실점으로 또 패전투수가 되었다. 잘 던진 편이었지만 6회에 맞은 홈런이 뼈아팠다. 이 날 팀타선은 간만에 터졌으나 터졌다고 하기도 애매한게 3득점이니….

근데 이걸 이유로 감독이 박찬호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 2군 내려가기 전까지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어떻게 보면 평타는 친 성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나 2011년 퍼시픽리그는 극도의 투고타저를 겪었다. 박찬호의 경우 2군 내려가기 전 퍼시픽리그 선발 중 평균자책점이 뒤에서 2등. 며칠 전 이승엽의 2군행까지 엮여서 감독이 한국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그런데 박찬호와 이승엽은 2군가는게 워낙 당연한 성적이다.

그리고 5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을 앞두고 이승엽과 함께 1군에 복귀,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한다. 다양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6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회초 공격에서 대타로 교체되었고, 그 회에서 오릭스가 한 점을 뽑아내면서 박찬호는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다. 하지만 9회말 오릭스의 마무리 기시다 마모루가 야노 켄지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박찬호의 승리는 물거품이 된다. 일단 잘 던졌다는 것에 위안을 삼자.

그러나 일본리그가 희대의 투고타저 리그가 된 시점에서 4점대의 ERA는 용병의 성적이라 하기에는 초라한 것이 사실이며, 게다가 2군에서는 그것보다도 성적이 나쁘다. 사실상 일본 리그 시절은 거의 흑역사라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국내 복귀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팬들 - 정확히 말하면 구위와 제구가 좋은 박찬호가 한화에 오는 것을 꺼리던 팬들 - 도 이제는 "까짓거 뭐..."라는 마인드로 생각을 바꿀 정도.

2011시즌이 끝나고 결국 오릭스에서 박찬호 퇴단을 공식 기사화했다. 한국에도 오지 못하고 자신의 부진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시즌.

2.12 마침내 한국으로 오다(2012)

늦은 나이에 데뷔를 한한화 신인 선수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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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2012 문서 참조.

2.13 은퇴 선언

2012 시즌 종료 이후, 현역 연장과 선수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박찬호는 결국 11월 29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수많은 이력을 남겼던 대선수의 은퇴 선언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박찬호를 포함하여 전력구상을 세웠던 김응용 감독의 한화 이글스의 입장에서도 타격이 큰 결정이었다.[48]

2013 시즌 중반쯤 되자 야구팬들이 우스갯소리로 박찬호의 은퇴를 신의 한수라 평하기도 한다. 한화의 투수진이 외국인 선발 두명을 제외하고 자리를 잡지 못하고 김응용 감독의 불펜 투수 기용도 잘하는 투수를 무리하게 등판시키는 일이 잦은 만큼 만약 박찬호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말년에 엄청나게 고생하게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49]

사실 이 둘은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김응용이 한화에 오기 전까지 없었지만 깊은 악연이 있었다. 박찬호가 텍사스로 이적한 후 부상 후유증과 이적 부담감이 겹치며 부진을 겪고 있을 때 김응용은 느닷없이 박찬호에게 '야구에 집중 안 하고 딴짓하느라 그런 거다. 야구인들은 다 알고 있다.'라는 근거없는 비난을 하였다.[50] 이미 박찬호를 먹튀라고 하며 국민영웅에서 국민역적으로 온갖 매도를 하던 언론은 구체적 증거도 없이 김응용의 말을 사실인 것처럼 다뤘다.그러고보면 그 제자도 스승한테 배웠는지 별별 개드립을 박찬호에게 박찬호는 시 구절을 응용하여 김응용의 증거 없는 막말에 대해 섭섭함을 표현했다.

박찬호가 한국에 돌아온 뒤 국내팬들에 대한 팬서비스에 가까운 선발 등판을 한 2012년 시즌이 끝나고, 잘 던지던 못 던지던 진심으로 응원해주며 좀 더 던져주기를 원하는 한화팬들의 성원에 마음이 흔들려 지인들과 상담을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김응용은 대뜸 박찬호를 마무리로 보직 변경한다고 발언하였다. 야구선수의 보직 변경, 특히 투수의 보직 변경이라는 건 투수 개인은 물론 팀 전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보직 변경을 권유받거나 자처한 투수는 감독이라든가 코칭스태프와 의논을 진지하게 나눠야한다. 그런데 김응용은 박찬호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직 변경을 하겠다고 선언. 이러한 김응용의 박찬호의 의사를 무시한 태도는 고민하던 박찬호에게 은퇴라는 결과를 만들어줬다.

덕분에 박찬호는 현역 시기 김응용과 악연으로 시작해 악연으로 끝났다.[51]

2014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역대 최초로 은퇴식을 가진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원래 2013시즌에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식을 준비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무산 되었고 2014시즌 들어서 선수협이 KBO에 박찬호 은퇴식을 건의하면서 이러한 의견이 급물살을 탔다. 이하 그의 은퇴사 전문.


감사합니다.

오늘 이 영광스럽고 특별한 이 지금 이순간을 제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1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는데요 그후 20개월 동안 저는 끊임없이 다시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서는 생각을 잊을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가서 공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여러분, 야구장은요, 야구장은 제 인생에서 정말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야구는 제가 선택한 제 인생과목과도 같았고요 야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요, 그리고 삶의 열정과 애정, 사랑, 그리고 꿈과 도전, 인생의 철학까지 배울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감사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이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주신 구본능 총재님과 KBO 관계자여러분. 그리고 각구단 임원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에게 동료애(愛)와 그리고 선후배의 의(義)와 애정, 사랑을 정말 깊이 느끼게 해준 선수협, 선수 후배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나서부터 저의 모든 것을 지켜봐주시고 그리고 제가 야구를 시작한지 30년동안 저의 투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시며 저의 슬픔과 기쁨을 늘 함께해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겸손을 통해서 삶의 목표와 의식의 질을 높여주는 옆에 있는 제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저에게 야구에 대한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늘 잃지않게 해준 애국심과 한국인의 긍지를 늘 각인 시켜주신 소중한 지인 여러분들, 그리고 여기 계신 야구 팬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는 공을 던지면서 꿈과 희망에 도전할순 없습니다. 하지만 야구인으로써 더 성장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내나라 대한민국 야구를 위해서, 야구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전성기 시절 새가슴이라는 일부 비난이 있었던데다,[52] 한만두처럼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멘탈이 약한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의외로 이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듯. 그러나 그가 홈페이지에 남기는 글이나 인터뷰[53] 등을 보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사실 박찬호는 국가대표 멘탈급이다. 메이저리그 자체가 치열한 정글이다. 제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잠시 부진하면 가차없이 팬들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기에 정신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박찬호는 선발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엄청난 한국기자들이 항시 쫓아다녀서 심적 부담도 훨씬 컸을 것이다. 김병현은 기자와 싸움까지 벌여서 논란이 되지 않았던가? 당시 김병현의 고백 보면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기자들이 자꾸 옆에 와서 사진 찍고 이런 것 자체만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한 박찬호는 IMF당시 우상급이었기에 유혹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헌데 박찬호는 10년 이상 큰 기복없는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고 딱히 사생활적인 측면이나 언론과의 마찰 등 별다른 트러블 없이 묵묵히 야구에 정진했다라는 점에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멘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축구 등 다른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과도한 관심과 집중을 받아서 부담감에 무너지거나 혹은 유혹에 넘어가 여자와 노닥거리다가 막장테크 탄 선수들과 비교해보자.

박찬호가 새가슴이란 비난을 받았던건 볼넷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면승부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보니 겁이 많다고 안티들이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게 도망가는 피칭을 했어도 박찬호의 피홈런수는 꽤 많았다. 다저스타디움은 투수친화적인 구장이라 점수가 잘 나지 않는 구장이다보니 홈런 맞고 점수를 내주면 치명적인지라 굳이 무리하게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안되면 내보냈던 것인데, 박찬호는 삼진도 많이 잡던 투수였다. 오히려 주자를 내보내면 부담스러워서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헌데 박찬호는 주자를 내보내는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며 주자 내보내도 다음 타자 잡으면 그만이란 전략으로 무리하지 않았으며, 실제 볼넷 위기 상황에서도 볼넷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유인구를 던져 삼진도 많이 잡은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굳이 무리하게 승부하지 않았을 뿐이다.

올림픽 유도 김재범은 유도는 3초만에 결정된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한번 상대를 맞잡아보면 '어 오늘 할만하다'라든지, '오늘은 좀 느낌이 안좋은데' 이런 식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다른 스포츠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박찬호도 일단 첫타자 상대해보면 오늘 제구와 구위가 괜찮다라든지, 컨디션이 안좋다라든지 느껴질텐데, 박찬호도 삘 받았을때는 상대를 윽박지르며 압도하는 강속구 투수로 변신한다. 완봉승을 거둔 날이라든지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한 날에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정면승부로 많은 삼진을 뽑아내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한국야구에선 타자를 압도했던 류현진도 떡대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선 기교파 투수에 가까워졌고, 박찬호 전성기때는 약물러들 전성기였는데 그때 동양인 박찬호가 힘좋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강속구로 압도하는 피칭을 했었다. 다만 박찬호가 제구가 안되는 날에는 여지없이 가운데로 몰리면 홈런을 맞았기에 이럴 때는 무리하지 않고 볼넷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가급적 유인구로 승부하는 전략을 취했을 뿐이다.

잘 던지다 한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멘탈이 약하다는 오해도 받았는데, 이는 멘탈에 과도한 환상을 갖는 한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이다. UFC김동현은 국내에 '멘탈전도사'로 유명했고 연승 중에 드디어 강자와의 대결이 잡히자 언론에서는 현재 김동현이 구름을 넘어선 경지라는 둥 극찬했고 실제 경기 시작하자마자 겁없이 백스핀엘보우를 날리며 멘탈지존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상대가 가볍게 피하고 카운터 날리니까 한방에 뻗어버렸다. 멘탈은 신기루같은 것이다. 흔히 '전사의 심장'운운하는데, 그것도 맷집이 받쳐주니까 한대 맞고 두대 치는 전략으로 그렇게 나온 것일 뿐이다. UFC에서 K-1챔피언 출신 타격가 마크헌트와 5라운드 내내 전율의 타격전을 벌이며 '전사의 심장' '최고의 멘탈'로 찬양받았던 안토니오 실바는 약물적발 뒤 맷집이 급격히 저하된 모습을 보이며 KO패를 당했고, 마크헌트와 재대결때는 헌트의 주먹에 심하게 움찔거리며 심지어 뒷통수를 보이며 도망가는 모습까지 나오고 결국 무기력하게 KO패당했다. 결국 멘탈도 실력에서 파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헌트 주먹 맞아봤는데 맞을만하다고 느껴지면 '오 더 때려봐' 이렇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고, 내가 한번 휘둘렀더니 상대가 데미지를 받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한대 때렸는데 상대가 반응이 없으면 멘탈붕괴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 멘탈지존 맥그리거는 좀비파이터 디아즈에게 패했는데, 자신의 필살 펀치를 맞고서도 끄떡도 안하고 덤벼드는 모습에 멘탈붕괴됐다고 한다.

여하튼 박찬호가 종종 무너졌던건 멘탈이 약한게 아니고 그게 실력이었던 것이다. 박찬호가 그렇게 무너졌어도 18승을 거두기도 하고, 방어율 3점대 초반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무너진 경기들이 없었다면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사이영상급 투수가 된다. 원래 야구에선 투수들이 유리하다.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라고 해봐야 3할인데, 즉 강타자들 상대해도 10번 중 7번은 투수들이 잡아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못하는 투수들을 보면 계속 안타 맞는게 아니고 잘 던지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등의 패턴을 보이는데, 그게 바로 정상급 투수냐,아니냐를 가르는 요소인 것이다.

사실 박찬호는 큰 기복없는 투수였다. 박찬호가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 많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퀄리티 스타트의 가치가 큰 기복없이 안정적으로 던질 수 있느냐를 측정하는 잣대이고, 특급투수들을 보면 반드시 퀄리티 스타트 성적이 좋고 무너지는 경기가 거의 없기에 방어율이 높은 것이다. 박찬호가 종종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율 3점대 초반도 기록한 적이 있는데, 그 시즌 무너진 경기 없애고 그때도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고 계산하면 박찬호의 방어율은 2점대를 마크할 것이고, 20승도 넘을 수 있고 이러면 특급투수가 되버리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고 그게 바로 실력이다. 멘탈 강하면 안무너지는게 아니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인 커쇼라도 컨디션이 안좋거나 부상이 있을 때는 제구가 안되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자기소개 밖에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을 과감히 사양했다든지[54], 첫 차를 사기 전에 교통비를 아끼려고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뛰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프로 초창기 때 던졌던 슬라이더를 봉인한 대신 빠른 공과 궁합이 맞는 커브를 장착한 이야기나, 샌디에이고 시절 장출혈, 필라델피아 시절 신종 독감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중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생업에 정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의 특별한 프로정신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 하면 생각나는 첫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물론 이민 정착이 아니라 한국에 귀국해 살고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에겐 최고의 롤모델로 손색없는 사람이 바로 박찬호. 미국 문화를 이해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떤 업계에 진출하더라도 저런 근성 없이 성공을 바라면 안 될 것이다.

4 이야깃거리

4.1 메이저리그 계약과 마이너리그 시절

LA 다저스와 계약을 하고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 공항으로 몇명 안되는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배웅을 나왔다.

박찬호: 제가 백억을 벌어서 오겠습니다.
기자들: 백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찬호: 아 농담한건데 너무 심하네ㅋㅋㅋㅋㅋㅋㅋ
모두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이 아이는 몇 년 후에 코리안 빅 맥이 됩니다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을 벌어 왔다.

박찬호가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매일 같이 해와 하체가 튼실하다는 점과 국내에서는 금기시한 하이 키킹 동작을 했다는 점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는 그를 다룬 책이자 불쏘시개이기도 한 <메이저리그와 정복자 박찬호>에서 나오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달리기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이너리그 시절 차가 없었을 때는 경기장에서 집까지 뛰어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모교인 공주고 학생들이 아침 저녁으로 숙소에서 학교까지 왕복으로 달리기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또한 국내 지도자들이 금기시했던 하이 키킹을 시도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의 영원한 우상인 놀란 라이언 투구 동작 사진을 구해 부분부분 연습해 구속이 빨라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한가지 사연이 있다.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를 마치고 귀국 후 바로 공주로 갈 수는 없어서 이태일 기자(現 NC 다이노스 사장)의 집에 머물렀는데 박찬호가 놀란 라이언의 책을 보고 관심을 보이자 이태일 기자가 그 책을 박찬호에게 선뜻 선물을 했다. 그리고 박찬호는 그 책에 나와있는 그림을 보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하이키킹 투구폼을 완성했다.

물론 마이너리그 서비스 타임시절에 이 극단적인 투구폼은 손을 보면서도 강속구를 살리는 방법으로 코칭을 받았다고 한다.

4.2 플레이 스타일

이 말 한마디로 끝난다. 아시아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패스트볼을 뿌렸던 선발투수.

현재까지도 패스트볼의 구위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한 동양인 선발투수는 박찬호와 노모[55] 뿐이고 그나마 구원투수 쪽에서는 사이토 다카시우에하라 고지가 있으며 현역 동양인 선발투수 중에서 다르빗슈의 패스트볼 구위가 박찬호에 가장 근접해 있다.[56]

박찬호 악포심 던진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년에는 이를 악물고 괴성으합! 흐압!을 질러가며 포심을 던진 적도 있었다. 지가 무슨 샤라포바야? LA나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등에서 이런 일이 좀 잦았는데 해설자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이러한 습관 때문에 어금니가 망가져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남아있는 치아의 보호를 위해 대책으로 마우스가드(피스)를 착용하고 던진다.[57][58]

류현진의 미국진출 후 은근히 류현진과 비교가 되거나 재평가되고 있는데 박찬호는 전형적인 구속, 무브먼트로 윽박지르는 파워피쳐이고, 류현진[59]은 다재다능함을 자랑하긴 하지만 박찬호처럼 우격다짐형 파워 피쳐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스타일이 완전 달라서 두 명의 다져스 한국선수의 경기를 모두 본 사람들에게 잔잔한 재미를 주고 있다. 젊을 적에는 사실상 패스트볼과 커브 투피치[60]로 A급 투수로 등극할 만큼 스터프로 먹고사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전성기 기준 최고 100마일, 평균95~6마일을 넘나드는 포심은 제구가 되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삼진의 산을 쌓는 원동력이었다.그러나 제구가 안될 때에는 미칠듯한 볼넷[61] 이후 여러 구질을 배우고 보완하면서 다양한 구질을 던지게 되고 또 몇몇 구질은 부활의 원동력이 되긴 했으나 항상 박찬호를 상징하고 박찬호가 있게 한 것은 강력한 속구였다. KBO에서 류현진은 속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있었지만 MLB에서는 힘으로 타자들을 압도할 수 없어서 박찬호보다는 압도적인 면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타입이다. 그래도 힘으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구속이 빠른 파이어볼러 투수가 인기도 높고 많은 야구팬의 로망이라 전형적인 정통파 우완투수로 리그를 호령하는 한국 투수인 박찬호는 선구자 타이틀이 없어도 매력적인 투수였고, 박찬호 이후 정통파 한국인 메이져리거를 다시 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성기때는 흔히 기억되는 박찬호와 달리 상당히 안정적인 투수였다. 이상하다 매번 각잡고 본 기억밖에 없는데 특히 '퀄리티스타트'라는 단어를 한국에 처음 정착시켰으며 박찬호의 투구를 보고 퀄리티 스타트가 쉬운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번 나오면 6이닝 3실점은 당연한거였다. 다만 삼진 아니면 볼넷그리고 홈런일 정도로 제구되는 날과 안되는 날의 기복이 좀 있었고 볼넷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경력이 쌓일 수록 위기관리능력이 늘어 삼진과 병살로 잘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훗날 후배가 1회마다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

투수치고는 타석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가끔씩 홈런을 치고는 했다. 연장 13회 때 선발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대타' 박찬호가 나서는 일도 있었다. 흠좀무. 1호 홈런2호 홈런. 가장 마지막 기록을 보자면 09/04/26 vs플로리다전에서 홈런을 쳤다.[62] 더 대단한건 3개의 홈런 모두 밀어서 넘긴 홈런이다. 시즌 타율은 투수 중에서도 높은 편인 1할 대 후반에서 2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보내기 번트 능력은 메이저리그 투수 중 정상급이다.

사실 잘 믿기진 않지만 박찬호는 원래 내야수로 야구를 시작했고, 소속팀 감독으로 부터 타격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2학년때 투수로 전향한 이후에도[63] 공주고등학교에서도 클린업을 쳤었다. 고교야구에서는 강타자의 수비 위치가 투수인 경우가 종종 있다.

박찬호를 비롯한 당시 92학번은 '전설의 학번'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재들이 많은 학번이었다. 특히 투수쪽에는 조성민, 임선동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당시에는 이 세 명의 투수 중 박찬호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았다고 한다.[64] 공은 빠르지만 세세함이 부족하고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다 부상도 많았다는게 이유. 그래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갔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메이저리그는 선수의 단점을 고치는 한국 스타일보다 선수의 장점을 강화시키는 훈련 스타일인데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선수의 몸관리를 해서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는게 그 이유다.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다. 전성기 때 시범경기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10승 이상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초인 4~5월에 난타를 당하는 경기를 자주 보여주다가 6월 하순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7~8월은 리그 특급 투수의 성적을 찍어줬다. 그래서 중계를 하던 iTV에서도 날이 더워질 즈음엔 여름의 사나이 라던가 뜨거운 이미지와 관련된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초창기 때 전담포수를 둘 정도로 포수와의 호흡은 상당히 민감했다. 방망이는 좋지만 수비와 리드가 시망인 마이크 피아자, 토드 헌들리, 폴 로두카 대신에 찰스 존슨이나 채드 크루터같은 수비형 포수를 선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게, 저 시기 국대경기에서는 약드래곤 대신에 잉금님을 선호했다[65] 그러다 점점 연차가 찬 이후에는 그다지 까탈스럽지 않은 투수로 변했다.

강했던 팀과 선수는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다저스 시절 필라델피아 필리스, 제프 켄트, 에드가르도 알폰소[66]. 약했던 팀과 선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미네소타 트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클리프 플로이드, 에릭 차베스, 미네소타의 자크 존스, 그리고 박찬호 잡는 귀신으로 불리던 브래드 풀머를 빼먹으면 섭하다.

2006년 WBC 일본전에 던진 박찬호의 공을 보고 일본 기자들이 "변화구를 많이 던진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박찬호가 "오늘 변화구는 던진 적 없고 투심 던졌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얘기.

또 사족으로 일본의 마쓰이 히데키의 천적이다. 통산 전적에서도 마쓰이가 박찬호를 상대로 단 한개의 안타를 쳤을 뿐 거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마쓰이에게 강하다. 통산 9타수 1안타. (그런데 그 1안타가 홈런이다) 실제로 마쓰이는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구질 욕심이 보통이 아니다. 전성기 시절 투피치 피처로 구분되긴 하나, 2000년부터 재미를 보던 슬러브를 비롯, 속도가 40km/h가 차이 나는 커브를 실전에 쓰기도 했다. 또한 상술된 바 투심도 수준급이며, 너클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질을 실전에 사용하였다.

노모 히데오에게 메이저리그 시절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당신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었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오릭스에 가서도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오릭스의 동료 선발투수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주고 그에게 포크볼을 배우려고 로비하기도 했다.

4.3 TV활동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익사이팅'이라는 본격(?) 스포츠 껌의 광고 모델이기도 했고[67], 그리고 그 유명한 삼보컴퓨터 체인지업의 모델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그의 이름을 딴(?) '찬호박'이라는 이름의 호박맛 아이스크림도 있었다.[68] 2010년에 LG패션 타운젠트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도 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 돼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었다.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촬영에 참여하여 여전히 많이 남아 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현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계곡의 얼음을 깨고 멤버들과 계곡물에 입수한 장면은 당시 최고시청률을 찍었다. 멤버들과 돈독한 우정이 쌓였는지 녹화가 끝난 뒤에도 장문의 문자를 멤버들에게 일일히 보냈다고 하고 그 해 연예대상에도 1박2일 멤버들과 함께 참석했으며, 2년 뒤 혹한기특집에 치킨과 함께 다시 찾아와 멤버들을 한번 더 계곡에 입수시키기도 했다.[69] 2011년에는 이승기-이수근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박찬호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복불복 게임에서 믿을 수 없는 기술[70]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생 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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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2011년 12월 1일 '주병진의 토크콘서트' 첫 방송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중간에 노래는 잊자고요

2013년 7월 18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2015년에 냉장고를 부탁해신승훈과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훗날 2016년 9월 12일에 그의 아내 박리혜 셰프가 여성 셰프 최초로 냉장고를 부탁해에 스페셜 셰프로 참여하게 되었다.

배우 정준호와의 오랫동안 친분을 계기로 그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달콤살벌 패밀리에 특별출연했다. 영어쓰는 충청도 학부모 역.

4.4 역대 연봉

년도액수소속팀소속리그
1994년10만 9000 달러로스앤젤레스 다저스메이저리그
1995년11만 4000 달러
1996년12만 4000 달러
1997년27만 달러
1998년70만 달러
1999년230만 달러
2000년395만 달러
2001년990만 달러
2002년688만 4803달러텍사스 레인저스
2003년1300만 달러
2004년1400만 달러
2005년1500만 달러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년1550만 5142달러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7년60만 달러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2008년50만 달러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9년250만 달러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120만 달러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1년2억 5천만엔오릭스 버팔로스일본프로야구
2012년2400만원[72]한화 이글스한국프로야구
박찬호가 여태껏 벌어들인 돈[73][74]
팀명금액원화로 환전 시
메이저리그에서 번돈8,665만 6,945달러969억 9511만 8500원
일본프로야구에서 번 돈2억 5천만 엔28억 9,582만 5,000원
한국프로야구에서 번 돈2,400만원
총액998억 9,094만 5,900원

이게 선수야 재벌이야
어느 메이저리거 후배가 회장님의 5년 6,500만 달러를 경신했다!![75]그리고 선배의 아픈 추억이 있는 팀과의 계약이라 국내팬들의 걱정이 많았고 결국...

원래 94년경 첫 출국 당시 당당히 100억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정확히 10배를 벌어 온 것이다! 이로써 박찬호의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숫자로 드러났다. 저 정도면 국회의원 중에서 박찬호보다 부자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즉 원래 재벌가인 정몽준 의원같은 그런 극단적인 인물들뿐이다.

4.5 읽을거리

미국 진출 첫해 마이너에서 고생할 때, 팀 동료들이 마늘냄새가 난다며 피하기에 처음에는 인종차별인줄 알았다고 한다. 노이로제가 걸려서 하루에 대여섯번씩 샤워를 했을 정도라고. 그러던 어느날 한 선수가 먼저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고 감독에게 불려갔는데 영어를 하지 못해 오히려 원인 제공자로 몰려 벌금까지 물었다고 한다. 너무 분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으나 결국 잘지낸다고 거짓말을 하고 끊었고, 그 다음날부터 한국 음식을 완전히 끊고 냄새나는 치즈를 억지로 먹었다고,[76] 그런데 그 이후로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 외국인들에겐 마늘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던거지 자신을 따돌리는 것이 아니었다는걸 깨달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거의 현지음식이 된 이태리 음식에도 마늘이 잔뜩 들어가는데? 메이저리거는 이태리음식을 먹지 않나 봅니다

전담포수였던 채드 크루터를 고소한 적이 있다. 사유는 빌려준 돈을 안 갚았다고. 그런데 나중엔 소송을 취하했다. 오오 대인배 오오

인천 자유공원 인근에 있는 야구 배팅장에는 투구 자세로 타격을 하는 괴랄한 모습의 박찬호 그림이 있다. 이 의뢰를 받은 화백[77]은 본래 박찬호의 투구 자세를 그렸으나 타격을 연습하는 시설인 만큼 배팅장 사장님이 타자의 그림으로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 귀찮아진 화백이 어깨 너머로 방망이만 하나 덜렁 그려서 마무리했다는 설이 있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 패러디되기도... 자유공원 박찬호 웹툰 생활의 참견에서 작가 김양수는 자신의 선배 얘기라며 본 에피소드를 연재한적이 있었다.

부인 박리혜는 아버지가 일본 부동산 재벌 박충서다.[78] 이와 관련 거짓 소문으로는, 그가 박찬호에 대해서 "우리 사위가 야구하느라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사람은 좋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치로의 WBC 당시 발언이나, 2002 월드컵 당시 토티의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어 한국사회에 퍼진 것을 보면, 이 발언도 비슷한 기레기의 소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이미 스포츠 신문이나 가십거리 다루는 케이블 프로그램등에 저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나오는데 해당 인터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앞선 버전의 각주에 따르면 박찬호가 장인이랑 비슷하게 벌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아니고 실제로 박찬호보다 장인이 훨씬 부자는 맞다. 국내기사에 따르면 장인도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니, 최소한 박찬호가 번 돈의 규모를 모를 리 없으며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가지는 위상은 우리 사회에서보다 훨씬 대단한 것으로(심지어 2군 선수조차 A4용지에 싸인해달라고 하면 이딴데다 싸인 못하겠다고 종이 던져버리고 간다), 그들보다 더 대단한 大리그(일본에선 메이저리그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장기간 활약한 박찬호를 장인이 폄훼할 이유는 없을 것. 참고로 박찬호는 연봉으로 번 돈도 많지만 여기저기 산 건물들도 있는데 그 건물의 시세도 오르고, 임대료로 알차게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부인인 박리혜는 위에서 서술한대로 요리사이며, CJ의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 O'live에서 홈메이드 쿡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을 치거나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 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부인이 재일교포 2세이기 때문에 한국어한국 요리 실력이 영 좋지 않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일본어로 된 라벨링이 많이 나왔으며, 일진어(...)로 된 한국어 라벨링도 보였다.[79] 맵고 짠 음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며, 박찬호도 현 시점에선 그 입맛에 길들여진 듯. 아내가 풀코스로 요리하는 걸 선호하는지라 러시아워인 아침식사 때는 싸움도 벌어진다고. 박찬호의 냉부 출연 이후 부인을 냉부의 스페셜 셰프로 강제 등판시키기도 했다.

사실 결혼하기 전에도 저런 류의 팬덤이 있었다. 특히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엑스포츠 개국 초기 딱히 광고수입이 없던 당시 박찬호 등판경기 때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엑스포츠에서 우릴대로 우린 조여정의 송월타월 광고에서 본따 타월을 선물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벅 쇼월터 감독을 '벅 송월터' 감독으로 불렀던 그 시절이다. 송월타월 광고를 보며 허벅지를 꼬집던 네티즌들은 박찬호가 삼진을 하나 잡으면 타월이 1cm 내려간다는 드립을 쳤다나(...).

이때 조여정과 송월타올 광고를 지긋지긋하게 본 탓에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을 올릴 당시 국내 메이저리그 팬덤에서는 박찬호와 조여정을 맺어주자고 하는 여론까지 생겼었다. 배스타월로 몸만 가린 조여정의 타월을 벗기고 싶다던 일부 남성 해야팬들도 있었다. 극소수 팬들은 조여정이 타월을 벗으면 돔구장 건립은 현실이라는 말을 했다 카더라. 믿거나 말거나.

다저스 시절에는 박찬호 도우미로 불리는 선수가 몇몇 있었다. 토드 질, 라울 몬데시, 게리 셰필드, 숀 그린 등. 특히 영원한 도우미 게리 셰필드는 박찬호 등판 경기 때마다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9년 월드시리즈 때 독감에 걸린 채로 등판되었다고 보도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신종플루였다는 것이 본인 입에서 밝혀져서 대인배로 칭송받았다.이게 무슨 대인배야 다른 사람들 다 걸리라고?

희한하게도 그가 공을 잘 던지면 나라가 곤경에 빠진 증거라는 설이 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참 미묘한 시기에만 잘 던지는 것이 또 나름의 아이러니.

특이하게도 박찬호는 선수 시절 내내 미국 영주권이 없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구단의 협조까지 받아가면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메이저리거라는 신분이 보장되는 확실한 직업이 있어서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딸 수 있다. 그런데 박찬호는 어차피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끝낼 것이기 때문에 영주권을 따지 않았다는 식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정말인지 불분명했으나 어쨌든 이 때문에 계약이 새로 갱신될 때마다 노동비자를 새로 발급받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뉴욕 양키스의 투수 조바 체임벌린이 위에 나온 박찬호의 폭풍설사 인터뷰를 듣고 폭소했다. 사실 당시 양키스 선수치고 이 영상을 안 본 선수가 없고 안 웃은 선수가 없는 지경이니 조바는 "박찬호는 오랜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투수였다. 어렸을 때 나는 박찬호의 투구를 자주 봤다. 그의 팬으로 나는 성장했다. 그런데 이제 같은 팀 불펜에서 선수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LPGA에서 활약하던 프로골퍼 박현순이 박찬호의 사촌누나다.

그의 연대기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불암콩콩코믹스 - 레전드 박찬호 카툰.치즈냄새 드립이 일품이다

해외야구 갤러리에선 박찬빈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정확하게는 찬빈님or챈빈님이라 불리며 숭배되고 있다.(한때 박찬호가 부진했을때 역술인이 이름을 바꿔야한다고 했는데 바꾸면 좋은 이름중 하나가 찬빈이었다) 박찬호의 등판 때마다 갤은 페이지가 쉽게쉽게 넘어가며, 상대팀에서 박찬호에게 좋은 타격을 한 선수나 삽질을 하는 한화 선수는 매국노 취급을 받고, 삽질을 하는 상대 선수는 애국자로 칭송받는다. 갤러리에서는 허구헌날 IMF 때의 채무 의식을 되새기라면서 찬빈님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그런데, 처음 찬빈 얘기가 나왔을 땐 정말로 박찬호한테 호의적인 분위기도 없진 않았으나, 박찬호가 은퇴한 뒤엔 찬빈이란 별명은 남았지만 원래 맹렬한 박찬호까이던 해야갤의 특유한 분위기와 섞여 찬빈님이라 불리긴 하는데, 한만두, 볼질, 위의 설사 얘기 등을 갖고 허구헌날 까이는 신세가 됐다. 이런 매국노들

지누션의 두 멤버와 친구사이다. 박찬호가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던 시절 LA로 가면 자주 만났던 친구들이라고 한다. 2001년에 박찬호는 등장음악으로 지누션의 A-Yo!를 쓰기도 했다. 요즘은 서로 왕래가 뜸한 편이긴 하지만 예전에 지누션이 가지고 있던 의류브랜드 MF(메이저 플레이버)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래퍼가 된건가!!

2016년부터 MLB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특이하게 언사이클로피디아에는 그의 문서가 없는데 Encyclopedia Dramatica에는 그에 대해 다룬 문서가 있다. 다른 문서들과 달리 상당히 정상적이다. 다만 저 폭풍설사 이야기만 다룬다는 게 함정

자신이 전성기를 보낸 팀에서 뛰고 있는 후배와는 달리 팬서비스를 매우 잘해준다. 사인을 잘해주는 것은 물론 팬과 함께 신나게 만담까지 하는걸로 유명해 "바쁜 팬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장난스런 찬양까지 받는다.

4.6 작품 속 박찬호

1990년대 당시 아시아선수가 드물었던 메이저 리그에서노모 히데오와 함께 아시아 선수를 대표했으며 더불어 두자리 승수의 실력까지 겸비해서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만화 메이저에서는 본명이 아닌 '안종빈'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팀 에이스의 모티브로 나왔으며, 일본 작품 답게 한국팀과 안종빈이 비열하게 나온다. 그 바람에 여태까지 쌓아온 메이저의 이미지가 한국에서 완전히 꺾이게 되어버려서 지금은 이제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김성모의 만화 스터프 166km에서는 박찬화라는 2차 창작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셰필드의 '박찬화에게 전해, 난 영원한 도우미라고!'라는 명대사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는 클로저 이상용에서 3차 창작으로 이어진다.

4만년 이후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도 등장했다.

4.7 자서전

  • “나의 꿈 나의 도전 박찬호”

흠좀무 한 것이 초판 인쇄일이 1996년 12월 15일이다. 겨우 만 23세.
박찬호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요인이 IMF로 한참 힘든 한국인에게 희망을 줬다는 것인데, 1996년은 IMF는커녕 박찬호가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고생하고 막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시점이다. 책 내용도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커브스를 상대로 첫승을 거둔 부분에서 끝난다. 즉, 이 책의 내용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성공기가 아니라,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기인 것이다. 때문에 박찬호가 승승장구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 어린시절, 공주고와 한양대 시절, 마이너리그때 힘들었던 일 등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특히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경험담과 메이저리그 도전이 당시 국내에는 워낙 생소 했기 때문에 잘 팔린 편이다. 요즘에야 워낙 메이저리거가 늘어났고 인터넷이 발달하여 마이너리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PC통신 시대였던 만큼 마이너리그에 대해서 개인 팬이 정보를 얻기는 정말 힘들었다. 당장 현업인인 자신도 마이너리그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던 상황에서 강등된 박찬호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고, 책에서 이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박찬호는 대망의 메이저리그 1승을 달성하고 나서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지만, 탈고를 마친 시점에서는 이미 10경기 출전에 5승이라는 전적을 올리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채 시즌을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올라서기 위한 중요한 기점들을 다 거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쯤 되면 책 한권 써도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아직 리즈 시절이 오기 전 도전정신에 가득차 있던 시기의 박찬호를 알기 가장 좋은 책이다.

그리고 선구자, 개척자의 이미지와 국민적인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뭔가 '위인 박찬호'라는 느낌에 박찬호가 종종 '투수'라는 것을 잊게 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박찬호도 빼박 투수구나라는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즉, 그정도로 투수라는 포지션에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투수는 어떤 플레이를 해야하는가 등의 본인의 투수론이 잘 드러나 있어 투수 박찬호를 느낄 수 있다.

4.8 은퇴 이후

  • 단편영화 서울서칭에 출연한다.
  • 샌디에이고시절 도움을 받았던 구단주와의 친분으로 지도자 수업보다 구단경영에 관심을 가져서 미국으로 구단 경영수업을 받으러 갈 거라고 한다.진짜 박사장을 볼날이 머지 않았다. 차기 한화이글스 구단주.
  • 친한 사이인 배우 차인표의 권유로 SBS땡큐라는 토크프로그램에 공동 MC가 되었다. 추석특집으로 파일럿으로 혜민스님편이 반응이 좋아서 정규프로그램으로 승격이 되었다. 매주 한국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을 캠프로 초청하여 하나의 테마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힐링프로그램성격의 토크프로로, 워낙 굴곡진 선수생활을 많이 겪고 이겨낸 박찬호의 인생경험과 철학이 그대로 토크에 녹아 있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첫 회 게스트로 만화가 이현세와 사진작가 김중만이 나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이제는 매주 금요일 방송했으며 반고정으로 출연하였다.프로는 개편때시청률저조로 폐지되었다.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송재우 해설위원과 함께 JTBC의 한국전 중계 해설을 맡았다. 최고의 투수답게 매 상황마다 선수의 상태나 개인적인 경험 등을 살려 좋은 해설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번은 투수가 어떤구질로 승부할지 예측했는데 그게 그대로 이루어져 역시 박찬호라는 찬사도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해설가의 길로도 안착했다. 중간 중간 소강상태때마다 해주는 메이저리그 뒷얘기라고 쓰고 피아자 디스[80]는 덤. 거기에 피처 까지. 하지만 대표팀은 1라운드 탈락
  • 2012년에 유한양행 삐콤씨와 한화생명[81] 광고에 출연. 삐콤씨의 "궁금해 박찬호", "하루 두 알"이라는 구호와 대한생명 광고에서 (아내:야구 관두면 뭐하고 살까?)아내의 말에 콕콕!! (감독:어째 공이 예전과 다르다?)감독의 말에 콕콕!! 대충대충 인생살게?! 콕콕짚어 인생설계!! 라는 랩을 구사하며 프로야구 광고 때마다 등장하여 깨알같은 웃음을 주고 있다. 하지만 코코몽한테 발린건 안자랑[82] 워낙 건강하고 믿음직한 성실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광고에서 그를 계속 볼수 있을것 같다.
  • 2013년 메이저리그 NLCS 시리즈 3차전 다저스 홈경기에 등판하는 류현진을 응원하러 다저 스타디움을 찾았다.[83]
  • 공식 홈페이지도 있다. 주소는 [1]. 2015년 현재까지도 매달 한번정도씩은 박찬호가 꾸준히 글을 남기고 있다.
  • 2014년 5월 27일(미국시각 기준) 다저스 구단에서 개최된 한국의 밤 행사 기념으로 나타나서 경기 전에 한시간정도 팬들과 싸인회를 가졌고 시구를 하였다. 포수는 류현진. 그리고 시구 버프를 받은 다저스는 그날 경기에서 승리했다. 시구영상 이날은 관람객들에게 류현진 바블헤드를 주는 날이기도 했는데 묘하게도 바블헤드는 류현진을 별로 닮지 않았고, 오히려 얼굴에 펜으로 수염을 그리면 오히려 박찬호와 많이 닮는다.
  • 2014년 시즌 중반부터서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2014년에 은퇴식이 열린다는 소리가 돌았는데 결국 선수협에서 박찬호의 은퇴식이 없었다는게 마음에 걸렸는지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2014년에서 은퇴식이 열리는걸로 확정이 되었다. 대체로 프로야구와는 인연이 깊진 않았지만 한 때 한국 야구인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여론. 다만 올스타전이 아니라 연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올스타전이 열리는 경기장이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인지라, 광주광역시기아 타이거즈와 연고가 없는 박찬호가 이 곳에서 은퇴식을 여는 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84] 올스타전에 비가 오고 있었지만 은퇴식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박찬호는 공식적으로 야구를 은퇴하게 됐다.
  • 2014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리틀 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한국 대표팀 대 푸에르토 리코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대표팀 선수단을 격려했다.
  • 2012 시즌, 박찬호의 한화 시절 선발 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선 오재원은 평범한 땅볼을 쳤는데 발에 맞았다고 주장, 파울 판정을 받아낸 사례가 있었다. 그 후에 볼넷으로 출루. 박찬호는 이 일로 단단히 화가 나서 경기가 끝나고 두산 김진욱 감독과 벤치에 항의하고 오재원에게 사과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인천 아시안 게임기간 동안 SBS에서 특별 해설로 나선 박찬호는 국가대표팀 선발출장을 한 오재원을 보고 이 일을 얘기하면서 극딜을 했다.#,네이버 영상 1시간 51분 이후 참고 아프리카 고화질 영상 1:43 이후 참고 허나 오재원은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분명히 공에 맞았으며, 박찬호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박찬호 같은 대선배를 상대로 헐리우드 액션을 할 배짱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후 엠엘비파크에서 리플레이 캡쳐 사진을 합성해 타구의 궤도를 볼 수 있게 한 사진이 올라왔다. # 합성된 사진으로 보면 타구 궤적이 꺾이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이로써 박찬호-오재원의 파울볼 논란은 박찬호의 착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또한, 개인적인 일을 2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국가대표 경기 해설에서 이야기한 박찬호의 부주의를 지적하는 야구팬들이 많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해설자가 꺼낼 정도의 수위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오재원 쪽 주장이 맞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면서 야구 팬 사이에서 거의 절대적 존재였던 박찬호도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거성 뺨치는 비난해설(...)을 보여주며 거성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 은퇴 기념 300개 한정 피규어가 제작되었다.120만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이지만 그 가격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피규어 구입후기
  • 2015년 프리미어 12 한일전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프리미어 12의 글로벌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했던 것이 주된 이유인듯. 구속은 101km를 기록했다.
  • 2016년 동갑내기 전 농구선수 우지원과 함께 MBC 진짜사나이 동반입대 특집편에 출연했다. 여담으로 박찬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아 예술체육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쳤다.동갑내기 특집에 이어 남녀동반 해군부사관 특집에도 출연 고생을 하고있는 중이다. 계속 예능에 출연하는것으로 봐선 안정환의 성공사례처럼 방송인으로서 변모하려는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이 있다.

4.9 투머치 토커

파일:Park-r.jpg
[속보] 한미동맹 균열 사진출처 10월 24일 LG와 NC의 플레이오프 3차전 때의 모습. 왼쪽의 인물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이다.

'Too much talker'
엄청난 수다쟁이로 야구 팬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팬서비스를 잘 해주려는 마음도 있지만 사람 자체가 애초에 말이 정말로 많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의 말에 지쳐 도망가 버린 팬들의 썰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링크1 링크2 리얼 토크 고문 그의 수다는 단지 팬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배 선수나(예를 들어 이대호에게 시전했을 때) 심지어 KBO 총재에게까지 미친다.
영상1 : 형이 말이야 한 이닝에 만루홈런을..
영상2 : 구본능 총재 : '말걸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냥 옆에 앉지 말았어야 했다

박찬호가 처음에 미국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갑자기 한국말이 어눌해지고 "Um..."이 자꾸 끼어드는 것을 보면서 당시 쟤는 외국물 먹은 티 내는 거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그게 허세가 아니고 정말 영어에 익숙해져서 그랬다는 점을 이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86] 나이 40이 되어서도 저렇게 수다스러운 양반인데, 갓 신대륙을 밟은 스무살 꼬꼬마 시절 주변과 말이 직접 통하지 않아 얼마나 답답했을지는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가 유달리 후배 메이저리거들과는 달리 통역도 붙이지 않고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우려 했던 것은 다른 것을 떠나서 동료 선수들과 매일마다 직접 수다를 떨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인데 아래층 위층 이웃에 살던 김태균은 어땠을까...

2016년 10월 14일 다른 한 명의 스포츠 레전드 스타의 은퇴식에서 투머치토킹을 시전했다. 링크 요약 누구 은퇴식이지?

다만 이런 박찬호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수다쟁이가 있는데 그는 바로 알버트 푸홀스다. 진중하고 과묵한 이미지와는 달리 엄청난 수다쟁이라서 박찬호가 놀랐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천적은 아내라 카더라

5 국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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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일본과의 WBC 본선 2라운드에 선발 등판하여 역투하는 모습

국가대표 야구팀의 영원한 리더, 에이스.
명불허전 코리안특급.

국제대회에 굉장히 강해서 상대하는 나라들을 다 바르고 다녔다. 심지어는 공의 위력이 텍사스 시절 이후 가장 약화되었다는 06년에도 다른 나라 타자들이 손 한번 못댄 정도. 특히 06 WBC때 코치나 해설가 할거 없이 박찬호의 체인지업 위력이 완전 떨어져서 공을 던지면 난타 당할거란 예상을 내놓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체인지업으로 관광 보내버렸다. 당시 한국에선 먹튀가 된 박찬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선발이 아닌 계투로 활용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장 잘 던지는 투수는 계륵 취급받던 박찬호였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불참 선언 때 괜히 난리친 것이 아니다.

박찬호의 국제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예선1라운드 vs. 대만 : 3이닝 0실점 세이브
    • 예선1라운드 vs. 일본 : 1이닝 0실점 세이브
    • 예선2라운드 vs. 멕시코 : 1이닝 0실점 세이브
    • 예선2라운드 vs. 일본 : 5이닝 0실점
  • 도합 성적
    • 2승 3세이브 26⅔이닝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0.68

흠좀무.

저 2실점도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되었던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잃은 것. 하지만 어쨌거나 위에 기록이 보여주듯이 합법적 병역 브로커의 첫 주인공 겸 일원이자 큰형으로서[87] 그를 포함한 수많은 국내파 선수들에게 병역특례를 선물한 주역 중 하나.

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

  •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입단. 그 해에 NL에서 두번째로 어린 선수였음 (만 21세)
  • 1997년~2001년 5년 연속으로 13승 이상 기록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드림팀 I) 소속으로 금메달 (병역특례)
  • 2000년 18승 10패, 평균자책점 3.27, 226이닝 기록, 다승 NL 5위
  • 2000년 피안타율 6.89개 - NL 1위 (다만 피출루율은 NL 10위권 밖)
  • 2000년 삼진 217개 - NL 2위
  • 2001년 35경기 선발 출전 - NL 1위 (15승 11패, 평균자책점 3.50, 234이닝)[88]
  • 2001년 올스타전 출전
  • 2001년 삼진 218개 - NL 3위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4경기 10이닝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0, 3세이브 기록
  • 2009년 월드 시리즈에 4경기 3⅓이닝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0 기록
  • 통산 홈런 총 3회 기록[89]
  • 2010년 9월 13일까지 메이저 리그 통산 123승 97패,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
  • 2010년 10월 2일 124승 98패로 아시아 최다승 달성.

6.2 영 좋지 않은 기록들

여러 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많이 세웠다. 좋은 기록이던 나쁜 기록이던 간에.

7 말말말

저녀석을 앞으로 10년간 상대해야 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마크 그레이스[91]

"저에게 있어서 야구장은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제가 선택한 인생 과목이었습니다."

ㅡ 박찬호. 2014년 7월 18일, 올스타전 은퇴식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전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시행착오는 겪을지 모릅니다. (강한 어조로) 그러나 그걸 통해 분명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제가 절 믿고 이 자리에 섰듯이요.

ㅡ 2015년 메이저리그 야구의 정신-개척자 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中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며 살 겁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울 거에요. 전 목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목표를 향해 오늘과 내일 똑같은 스텝을 밟아 걷는 것. 전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현역시절의 제 목표도 통산 124승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요. 제 가장 큰 목표는 오늘도 내일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였어요.

매거진S 인터뷰에서

8 연도별 주요 성적

박찬호는 NPB와 KBO에서는 홀드세이브를 기록한 적이 없다.

MLB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 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1994LAD2000400-011.255662.50
19952100400-04.502271.00
1996481000108⅔55-03.6482751191.41
1997322920192148-03.38149781661.14
19983434
(NL 5위)
20220⅔159-03.711991081911.34
1999333300194⅓1311005.232081141741.58
200034343122618
(NL 5위)
10003.27173136217
(NL 2위)
1.31
20013635
(1위)
21234
(NL 3위)
1511003.50183111218
(NL 3위)
1.17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02TEX252500145⅔98005.75154951211.59
2003770029⅔13007.583431161.99
200416160095⅔47005.4610546631.44
2005202000109⅔85005.6613060801.68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05SD1090045⅔43005.915030331.66
2005 시즌 합계302900155⅓128005.74180901131.67
2006SD242111136⅔77004.8114654961.39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07NYM11004010015.756242.00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08LAD5450095⅓44523.409740791.40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09PHI4570083⅓331404.438438731.40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10NYY2700035⅓21105.604013291.47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0PIT2600028⅓22103.49259231.13
2010 시즌 합계5300063⅔43304.666522521.32
MLB 통산(17시즌)4762871031993124982024.361872104817151.40
NPB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선발완투완봉이닝평균자책점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11오릭스 버팔로즈771042154.294416211.33
KBO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완투완봉이닝평균자책점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2012한화 이글스23101215105.0613463681.54
개인 통산
통산경기선발완투완봉이닝평균자책점피안타사사구탈삼진WHIP
19시즌50631612321561301132024.402050112718041.41
역대기록(MiLB)
년도소속팀경기수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이닝
1994샌안토니오 미션스(더블 A)2055003.559157100101⅓
1995앨버커키 듀크스(트리플 A)2366004.919376101110
2002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101009.0097633
2003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더블 A)210002.45103311
2003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330004.892781218⅓
2004애리조나 래인저스(루키리그)411001.7115152021
2004호클라호마 레드호커스(트리플 A)402003.722131919⅓
2007라운드 락 익스프레스(트리플 A)1558005.21100247084
2007뉴올리언즈 제피어즈(트리플 A)943004.5764161651⅔
2010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100000.001021
타격기록
통산MLB 타격타석타수안타홈런득점타점볼넷삼진 타율출루율 장타율
통산타격기록[92]4794307732731201550.1790.2150.240
  1. 음력. 양력은 7월 28일.
  2. 박세리, 박경림과 같은 본관이다.
  3. 2학년 재학 중에 다저스와 계약하면서 중퇴했다. 2001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4. 묻지 마라. 욕하지 마라. 찬호는 계속 던진다. 야구와 함께 살아왔다. 나의 과거를 묻지를 마라. 던지고 던진 인생이었다. 후회 없지만 눈물이 난다. 야구를 하면서 난 너를 만났고 사랑을 알았고 꿈을 가졌다...이 생명 다 바쳐 널 위해 던진다. 사나이 한평생 내 사랑 팬을 위해 실패를 해도 욕하지 마라. 찬호의 도전 이란다. 박찬호 순정 이란다
  5.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투수들을 포함해도 박찬호만큼의 커리어만큼 혹은 그 이상을 남긴 투수는 노모구로다 뿐이다.
  6. KBO는 물론이고 NPB의 난다긴다하는 에이스들조차 노모와 구로다를 제외하면 박찬호의 커리어에 근접하지 못했다는 얘기. 기량에서나 커리어에서나 박찬호, 노모, 구로다 이 세명을 모두 뛰어넘을만한 아시아 투수는 현재 다르빗슈오타니 쇼헤이 정도.
  7. 첫번째는 1963년 난카이 호크스 소속의 신인으로 마이너리그로 유학을 갔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어 얘 뭐냐?"라며 메이저리그로 콜업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村上 雅則). 다만 당시 난카이 호크스에서 "쟤 우리 선수인데 니네가 왜 맘대로 콜업하냐"라며 더 데리고 싶어했던 자이언츠의 요구를 무시하고 일본으로 강제소환(...)하며 메이저리거 경력은 단 2년에 불과했다. 중간계투로 활약하며 54경기 5승 1패 9세이브 3.4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실제로 2년차때는 45경기(1경기 선발 출전) 4승 1패 8세이브 3.08를 기록하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8. 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0-2001시즌에는 패스트볼의 구위가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다.
  9. 케빈 브라운 때문에 에이스까지는 차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중하위권 팀에서는 에이스 노릇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었다.
  10. 추신수가 박찬호의 통산 WAR를 넘어버렸기에 역대 최고의 메이저리거는 아니다. 박찬호 통산(투수+타자) 17.9, 투수 15.8. 추신수 2012년 7월 7일 기준 19.8. 비단 WAR뿐만이 아니라 7년 1억 3000만달러의 계약으로 박찬호의 계약 기록까지 깨뜨렸다.
  11. 최희섭이 아니다!
  12. 그가 선수 초기부터 텍사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뛰었던 내셔널 리그에는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규정이 있다. 그러다보니 돈트렐 윌리스잭 그레인키처럼 수준급의 타격 실력을 뽐내는 투수도 곧잘 등장한다.
  13. 여기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으나, 슬라이더는 마이너리그 시절 통타 당하던 구질이라 이후에는 구사를 자제하다 2008시즌부터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체인지업은 그가 던질 수 있는 구질 중에서 민감하고도 완성된 시간도 꽤 오래 필요했던 구질이다.
  14. 미국 폭스TV 중계방송 당시 아나운서가 박찬호의 투심을 보고 '저런 투심은 플레이스테이션2에서나 볼 수 있다.'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
  15. 사실 MLB에서 약물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베이브 루스가 양의 고환 추출물을 복용했다는 기록(1948년에 사망했는데?)이나 미키 맨틀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다가 종기가 나서 결장한 사건, 행크 애런이 암페타민을 복용했다고 밝힌 것 등 약물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는채로 약물 복용이 성행했으며, 미첼 리포트가 터지며 선수들의 금지약물 사용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 이후에도 약쟁이는 꾸준히 적발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통상적으로 스테로이드 시대를 일컫는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2007년까지를 일컫는다.
  16. 굳이 1~2선발급 실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박찬호가 텍사스 시절 1선발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다저스 시절 2선발로 활약했을 때에도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을 압도하는 성적을 보였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수상기록을 살펴보아도, 2001년 올스타를 제외하곤 딱히 주요부문 평균자책점, 탈삼진, WHIP, 승수, 이닝수 등에서 1위를 마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구력도 1선발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불안했고.
  17. 다만 케빈 브라운은 당시 리그를 대표하는 우완투수였다. 박찬호가 브라운을 밀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1선발급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최근 몇 년간 그레인키가 다저스의 1선발이 되지 못했던 것은 오직 커쇼라는 괴물 때문이지 그가 1선발급 투수가 아니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박찬호의 전성기 성적은 클래식 스탯으로는 리그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당연히 넣을 수 있는 성적이었다.
  18.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시절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빅리그 선발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확실한 유망주', '미래의 메이저리그 프런트라인 급 투수'로 평한 부분은 새삼 박찬호가 대단했다는 걸 방증해준다.#
  19. 물론 압도적인 차이가 있긴 하다. 2000 시즌 217K를 잡아내는 위엄을 보였지만 그분은 347K. 다만 이 시즌에 볼넷도 124개로 리그 2위를 기록하여 삼진/볼넷이 1.75였다.
  20. 최종 0.268/0.268/0.268 하지만 볼넷 0개에 장타가 없어서 출루율,장타율이 낮았기 때문인지 결국 그해 실버슬러거는 타율은 0.151에 그쳤지만 그해에만 80타석에서 6개의 홈런을 쳐낸 카를로스 잠브라노가 가져갔다.(0.151/0.160/0.397)
  21. 지금의 가전제품 판매,수리소
  22. 2013년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그 당시 야구부는 라면을 먹을수 있어 그 라면이 먹고싶어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
  23.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에 가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이루어진 인터뷰에서는, 빙그레가 3,000만원을 제의했는데 이미 몸값이 억대를 호가하던 조성민과 임선동에 비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1,000만원만 더 주길 바랐는데 빙그레에서 그러지 않아서 무산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출처는 확인 바람.
  24. 이 당시는 연고 지역 내의 고졸 선수들은 별도의 지명 절차 없이 입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교섭 기간이 11월 1일부터 15일까지로 제한되어 있었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의 대립이 심해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1996년 고졸우선지명 제도가 생기며 폐지되었으며 이 방법으로 계약한 대표적인 선수는 이승엽이 있다.
  25. 다만, 브레이브스 측에서는 계약금을 먼저 받는 대신 먼저 병역을 마칠 것을 박찬호에게 요구했다. 만약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26. 토미 존 수술을 최초로 제안하고 집도한 의사. 다저스의 팀닥터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후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다.
  27. 면제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미필자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바로 보내줬던 점. 김일성이 살아있던 1993년 겨울 시점에서 분단국가에서 병역의무를 필하지 않은 20대 남자는 단기 해외여행에도 보증인을 세우고도 무조건 단수여권만 발급되던 시절이다. 심지어 당시 병무청장이 엄청난 야빠라서 눈감아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박찬호가 해외로 나갈수 있었던 것은 해외 유학생 신분에 한해 28세까지 병역 연기가 가능했던 당시 병역법때문이었다. 유학비자를 딴채 취업하게 되면 미국 이민법에 저촉될 수 있었지만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팀당 3명의 비미국인 선수의 취업은 허가되었다는 조항까지 있어서 당시 21세인 박찬호의 미국무대 진출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이종남 기자의 책 발췌.
  28. 박찬호 이후 2012년까지 거의 50여명에 달하는 한국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했지만 100만불 이상 계약은 겨우 10명 남짓이며, 더구나 20년의 세월의 흐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액수이다. 당시에도 100만 달러 이상은 드래프트 1라운더 계약금 수준이었고, 실제로 1993년 드래프트 전체 1번이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계약금 150만 달러를 받았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한 유망주 중에서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간 선수들은 예외없이 100만불 이상 계약금을 받은 선수들 뿐이다.
  29. 당시 먹튀의 전설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 하지만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직행은 일종의 기록 만들기에 불과했다는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치하는 평. 뉴욕타임스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이너리그 계약이라고 보도했다.
  30. 5선발 자리는 주로 베테랑과 유망주들이 경쟁하는 자리다. 당시 박찬호는 베테랑 너클볼러였던 톰 캔디오티와 5선발 자리 경쟁을 했다.
  31. 그런데 실제로 김종필이 다닌 학교중에 공주고등보통학교가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공주고등학교다.
  32. 희생번트 후 뒤에서 껴안은 채 놓지 않자 박찬호가 "아 님 왜 안놓으셈? 좀 놔줘요" 하니까 벨쳐가 "꺼지셈(fxxk off)"이라고 말했다.
  33. 마음의 소리 758화에서 임찬규 물벼락 사건과 함께 깨알같이 패러디되었다.
  34. 참고로 이날 미국 국가를 부른 가수가 양파였다 한다.
  35. 1997-2001년의 투수 수비 기여도(def)는 전체 투수중 10위다. 투수 수비만큼은 정말 열 손가락 안에 든다.
  36. 리버풀 FC의 팬이라면 학을 떼는 그 양키 구단주 맞다. 현 구단주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의 존 헨리 이전에 팀을 소유했었다.
  37. 그런데 이 말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오역이다. 진짜 뜻은 '제1선발'. 팀내 1선발 투수는 곧 팀내 최고의 투수를 의미하기에 아예 틀렸다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38.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박찬호 입단 당시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양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으로 점프할 뻔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39. 사실 허리 부상은 대학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도 오른팔 팔꿈치 뼛조각 문제도 대학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40. 민훈기 기자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 당시 언론들의 까대기 때문에 박찬호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41. 그래서 그랬던 걸까, 2013년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한 추신수에게 박찬호 관련한 질문이 쏟아졌다.
  42.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 피터 안젤로스는 "투수에게 천만 달러 이상을 주는 건 미친 짓"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 시기의 박찬호의 성적은 이 말에 딱 맞았다.정작 볼티모어의 투수진은 메이저리그 최악이었다.
  43. 박찬호는 사실 시즌 극초반 콜업할 예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비가 오기로 예보되어 있던 날이라서 다저스의 조 토레 감독은 임시 선발 투수를 투입했다. 하지만 의외로 날씨가 맑자 3회에 예정된 선발 투수로 바꾸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비가 내려서 투수의 어깨가 식는 바람에 또 선발급 투수를 한명 더 투입하였다. 그 바람에 다저스는 급하게 롱 릴리프가 부족해 박찬호를 콜업하게 되었다.
  44. 시즌 초 선발로 등판하던 때에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 다시말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홈런 치기 힘든 돌핀 스타디움에서 커리어 최후의 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후 박찬호에게 홈런을 맞은 크리스 볼스태드는 부진한 커리어를 보내다가 2014년 한국프로야구두산 베어스에 입단했고 시즌초반에는 나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사상 초유의 사태 이후로 멘탈이 붕괴되며 부진하다가 퇴출당햇다.
  45. 워낙 팀이 많아서 자기 팀 선수였는지도 모르는 선수에게 일일이 격려를 보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따금씩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것은 팀에 큰 공헌을 했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선수에게나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위대한 선수라 해도 라이벌 팀에 가서 자기 팀을 상대할 때는 야유를 당하기가 부지기수. 심지어 로저 클레멘스까지도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엔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지만 뉴욕 양키스로 가버리자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았다. 다저스와 필리스가 신 라이벌리로 떠오르던 상황에 그렇게 필리스로 가서 다저스를 상대하는 전 다저스 투수에게 좋은 반응이 있었겠는가.
  46. https://ca.sports.yahoo.com/mlb/blog/big_league_stew/post/Chan-Ho-Park-is-amazingly-honest-about-his-diges?urn=mlb,233585
  47. 당시 피츠버그 감독 존 러셀이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당시 피츠버그는 포스트시즌은 예전에 물건너가고, 기념할 만한 마일스톤도 전혀 없는 상황이어서 팀 전체가 박찬호의 기록을 맘놓고 지원해 줄 수 있었다. 실제로 기록달성 때 자기일처럼 기뻐하는 팀원들을 볼 수 있다.
  48. 2012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이 있을 때 박찬호를 20인 보호선수에 포함시켰고, 그 때 옮겨간 선수가 송신영이었다. 후에 다시 넥센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49. 박찬호/2012 문서에도 있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50. 야구에 집중 안 하고 한 딴짓이라는 건 검열삭제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허리 부상이니 보나마나 그것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한 모양. 김응용이 야구인 운운해버리면 딱히 아니라고 누가 나서기도 애매해진다.
  51. 은퇴식때 김응룡 감독이 박찬호의 신문 스크랩을 액자로 내놓으면서 이 같은 평가도 미묘해졌다.
  52.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박찬호에게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53.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보고있냐김병현
  54.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은 뒤에는 히스패닉 선수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추가로 공부했다고 한다.
  55. 물론 두 선수 모두 각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슬러브와 포크볼로 재미를 보기는 했지만.
  56. 하지만 정작 다르빗슈는 자신을 다양한 구질로 타자를 상대하는 유형의 투수로 생각하는 듯 하다. 또한 인종적 차이를 고려한다면 다르빗슈 유는 이란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혼혈이다. 흔히 동양인이라 말하는 황인종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당 문서 참조.
  57. 이미 어금니는 심하게 마모되었다고 한다.
  58. 2008년 12월 28일에 방송된 1박 2일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치아 보조기를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9. 류현진이 KBO 에 있을 때에는 최고의 파워 피쳐에 컨트롤도 최고의 피네스 피쳐라 부를 수 있는 완전체였다. 메이저리그로 와서는 양쪽 모두가 정점인 완전체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정교한 제구력과 섬세한 운영이 장점으로 평가받는다.
  60. 사실 패스트볼을 포심과 투심으로 나눈다면 3피치
  61. 괜히 팩질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62. 2000년에 2개의 홈런을 날린 후 9년만에 쳐낸 통산 3호 홈런. 세 홈런 다 홈런이 나오기 힘든 구장(1호 다저 스타디움, 2호 퀄컴 스타디움, 3호 돌핀 스타디움(댄 매리노의 집))에서 쳐낸 것도 대단한 기록이다.
  63. 박찬호를 투수로 전향 시킨 감독은 당시 학교내에서 수많은 반대의견, 특히 다른 투수들의 학부모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찬호를 기어이 투수로 전향 시켰는데, 후에 박찬호의 졸업 이후 이로 인한 말썽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 당하고, 이후 교편을 잡게 된다. 이 감독은 박찬호 본인이 가장 존경했던 은인이자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참고로 박찬호가 투수로 전향하자, 원래 투수였다가 박찬호의 포지션이었던 3루로 전향한 선수가 바로 홍원기다.
  64. 사실 92학번 전체를 이야기해보면 더 많은데 손경수, 정민철, 염종석, 차명주, 전병호, 안병원 그리고 타자로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김종국 등이 있다.
  65. 잉금님이 까였던건 투수진과의 불화가 주된 요인이고 그 외에 리드 때문이지 수비 능력 자체는 좋다.
  66. 뉴욕 메츠에서 2루수로 뛰다 나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뛰었던 그 선수 맞다.
  67. 광고가 '찬호형! 나에게 힘을 줘! 라는 어느 유망주의 기도에 응답, 익사이팅 껌을 건네준다. 꼬꼬마가 껌을 씹는 게 아니라 코에 갖다대고 냄새를 흡~맡자 갑자기 에이스 투수의 기운이 빙의한다는 스토리...
  68. 그런데 박찬호 본인은 이 CF에 출연 하기는커녕 사진도 안 나온다.
  69.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던 은지원이 가장 먼저 입수를 함으로서 다른 멤버들은 빼도박도못하고 전원 입수를 하게 되었다.
  70. 20분 20초부터
  71. 이 때 탁구장 맨 끝 선에 걸치면 얻는 혜택이 걸친 사람 1명 빼고 나머지 야외취침이었다가 전원 구제로 바뀐 건데 즉 박찬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밖에서 잘 뻔했다. 참고로 1명 빼고 야외취침을 제안했던 사람은 은지원.
  72. 한국프로야구 최저 연봉이다. 박찬호/2012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사실상 연봉 0원이다. 한화는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적지 않은 연봉을 준비하였었는데, 박찬호가 오히려 연봉 0원으로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대신, 한화는 6억 원 상당의 금액을 유소년 야구에 사용하라고 기부를 했다. 박찬호 역시 연봉 전액(2,400만 원)을 같이 기부하였을 뿐만아니라, 추가로 개인적으로도 기부하였다고 한다. 박찬호는 연봉 0원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뛴 셈. 덤으로 박찬호는 한국프로야구 최저연봉이 이렇게 적은 줄 몰랐다고 언급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대략 2000이닝을 던지면서 969억을 벌었으며, 이닝당 4800만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박찬호가 2,400만원을 어떻게 보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최연봉은 5억이 넘는다. 흠좀무
  73. 달러와 엔화는 모두 2013년 3월 16일 환율 기준으로, 해당 시절 가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참조만 하길 바란다. 광고 등의 추가 수익도 있으니 오차범위도 생각하시길.
  74. '외화벌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박찬호를 보기 위한 야구 팬들의 입장료, 한국에서 박찬호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들어간 돈 등등을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많이 남았겠지?
  75. 추신수는 2014년에 7년간 1억 3천만 달러, 한화로 총 1,474억 원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76. 막상 박찬호 본인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나는 치즈냄새가 더 역겨웠었다고, 그래서 너희들도 니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당해보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77. 당시 동인천 인근에는 미림극장, 애관극장 등 오래된 극장들이 많아 옛날식 영화 판넬을 그리는 화백들이 많았다.
  78. 여담이지만 박충서의 아버지 박용구는 개혁 성향의 인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 창간에 큰 기여를 한 결정적 후원자였다. 훗날 이와 관련해 시국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정희로부터 모종의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 이후 박정희가 박용구 대신 선택한 사람이 신격호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용구는 재능 있는 유학생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아들 박충서가 이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혁 성향의 박용구가 세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인물 중 하나가 허문도. 이래저래 박찬호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집안에 사위로 들어간 셈.
  79. 흑마늘을 훅마늘로 적어놨다(...)훅 맞은것 마냥 매운 마늘.
  80. 변화구가 땅바닥에 튀자 '피아자는 블로킹을 못해서 항상 2스트라이크 잡고는 직구를 요구했었죠.' 라든가
  81. 2002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2012년 10월 9일부로 사명이 바뀌었다.
  82. 이 광고가 나가던 시기 한화 성적은 현시창이었기에 한화 경기를 보며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을 대비한 고단수 보험 마케팅이라는 드립이 성행했었다.
  83. 그리고 미국 진출을 위해 미국으로 온 윤석민도 이날 경기를 보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둘이 만났다거나 사전에 이곳에 오기로 했다는 걸 알고있던 건 아니었으며, 박찬호는 현장에서 윤석민이 왔다는 걸 기자가 알려줘서 알았다고 말했다. 이날 박찬호와 함께 류현진 경기를 응원한 건 피터 오말리 전 구단주.
  84. 박찬호가 고향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왔으며 대전에서 은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올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 은퇴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하려면 6년뒤라.. 대전에서 올스타전은 박찬호의 현역시절인 2012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올스타전 은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공식 은퇴식 외에도 홈구장인 한밭구장에서 박찬호의 은퇴와 관련된 컨텐츠를 박찬호와 조율하고 있다고 하니 한화팬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언제 프런트가 은퇴식 자체 여부로 의리를 안지킨적이 있던가
  85. 양학선 선수는 카잔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86. 그러나 이부분은 본인이 무릎팍도사에서 허세가 맞았다고 인정한다;;
  87.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뛰었다.
  88. 당시 다저스 선발 최다이닝.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236이닝으로 경신한다.
  89. 1호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 홈경기(허용 투수 하비에르 바스케스), 2호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우디 윌리엄스), 3호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크리스 볼스태드). 재미있게도 세 홈런 모두 다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구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홈런을 달성한 경기와 얽히 사연도 있었는데, 1호 홈런 경기가 있던 날 경기전 행사로 당시 유학중이던 가수 양파다저 스타디움에 공식 초청되어 미국국가를 불렀고, 2호 홈런 경기는 박찬호의 프로 첫 완봉승 경기였다.
  90. 사실 옆으로 안 차고 돌려차기했다고 밝혔다.
  91. 1997년 컵스전에서 완투승을 한 박찬호를 보고 당시 컵스의 1루수였던 그레이스가 한국인 기자에게 박찬호의 나이를 물어봤는데 기자가 24살이라고 답하자 한 말이라고 한다. 참고로 최희섭이 은퇴당시 후배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마크 그레이스처럼 되고 싶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이사람이 그 사람이다.
  92. 투수치고는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