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3세

역대 모스크바의 군주
바실리 2세이반 3세바실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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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III Vasilevich, Ivan III Veilky(Ivan the Great)
(1440 ~ 1505, 재위기간 1462 ~ 1505)

류리크 왕조 모스크바 대공으로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인물. Veliky 칭호를 받은 3명의 러시아 군주 가운데 한 명이다. [1][2]

모스크바 대공이었던 장님왕 바실리 2세(Vasily II Tyomniy)의 아들로 1446년 숙부 드미트리가 중간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상당히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바실리 2세가 복위하여 숙부 드미트리를 흑역사[3]화시켰고, 1462년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즉위 당시 러시아는 여러 공국들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각 공국들이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한 정략적 수준의 다툼이 자주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제후들은 몽골계 타타르족 칸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초기에는 타타르계 카잔 한국을 상대로 군사적인 행동을 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적인 행적은 없다. 다만 이 시기 유명한 것으로는 1469년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에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을 맺은 것[4]이었다. 이것을 근거로 러시아는 제 3의 로마 제국이라는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더불어 모스크바는 동방정교회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던 쌍두독수리 휘장이 러시아의 공식휘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군사행동을 통해 타타르계 카잔 칸국이 일시적으로 무력화되자 아버지 시절부터 계속되던 북방 지역의 제후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1463년에 야로슬라블을 합병하였고, 1474년에는 로스토프가 합병되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힘이 있던 노브고로드 공국을 거의 매해 쳐들어가서 털었으며, 1478년에는 힘으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노브고르트 공국의 정치적 파워를 서서히 무력화시키면서 1489년에 완전히 합병시켰다. 더불어 한 때 정략적인 파트너로 이반 3세와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던 트베르 공국 역시 1485년 찍소리 못하고 그대로 합병당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키에프-루스계 공국들이 모스크바 공국에 복속되었으며, 라쟌 공국과 프스코프 공국만이 막대한 조공을 약속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북방 공국들을 갈아먹으면서 동시에 몽골계 타타르족 국가였던 킵차크 한국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당시 킵차크 한국은 티무르 제국에게 갈리면서 국가 막장 테크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러시아 군주들을 상대로의 종주권은 여전히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크림 한국과 제휴하여 "우리는 더 이상 칸의 신하가 아니다!"를 선포하였다. 그 결과 전쟁이 벌어졌지만 1480년 이반 3세가 아메드 칸의 군대를 패퇴시키면서 사실상 주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490년대에는 속령의 제후들을 갈아버리면서 중앙집권화 정책에 착수하였다. 특히 중앙집권화에 걸림돌이 되는 보야르(대귀족)들은 수틀리면 체포당하거나 처형당했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한 신하에게 영지를 하사하지만 세습은 할 수 없다는 포메스티 제도를 시행하였다. 더불어 1490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맏아들이 통풍으로 사망[5]하면서 손자인 드미트리와 소피야의 아들인 바실리를 놓고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1497년 장고 끝에 드미트리를 후계자로 지명하자 이에 반발한 소피야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추방당했다. 하지만 1500년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은 바실리가 반란을 일으켜 1502년에 바실리가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재위 말기에는 과거 선조들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무력화시켰던 카잔 칸국도 서서히 되살아나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후계자 계승 문제를 놓고 벌어진 다툼, 보야르들을 갈아버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악재가 겹쳐서 그동안 쌓아올렸던 이미지를 상당히 깎아먹었다.

일단 분열되었던 러시아 제후들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몽골계 타타르족의 예속에서 벗어나 러시아 제국(Tsardom of Russia) 성립에 기틀을 닦은 인물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Veliky란 칭호가 오스트리아에서 파견한 사절이 "헐 님 좀 짱인 듯"라면서 붙인 호칭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반 3세가 이룩한 것을 감안하면 Veliky란 칭호가 적절하다고 이야기하는 학자가 있는 반면 "(피식)그 양반이 무슨 Veliky"라고 까는 학자도 있다.

  1. 러시아어 벨리키, 혹은 벨리카야는 Great에 대응된다. 즉 이반 벨리키는 이반 대제. 참고로 러시아에서 대제 칭호를 받는 황제는 이반 3세와 표트르, 예카테리나 대제가 있다.
  2. 추가로, 러시아의 군주 가운데 '차르' 라는 명칭을 최초로 쓰기도 했다. 흔히 이반 4세 때가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군주의 공식 칭호(이전까지의 공식 칭호는 '대공')로 쓰인 최초의 사례이고, 서유럽 국가와의 외교문서에는 이때부터 차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3. 대략 2 ~ 3년 정도 모스크바 대공으로 군림하였지만 역사에서 정식 대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4. 혼인을 맺으면서 러시아식 이름 소피야로 개명했다.
  5. 소피야가 명의라면서 추천한 인물이 치료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무슨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