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동로마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 쇠퇴하거나 멸망한 이후, '과연 누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나라인가?' 에 대해 제기된 주장들. 사실 자기네들의 주장만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병림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튀르크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 등에서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제2의 로마가 아니라 제3의 로마인 만큼 동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다는 주장을 비롯하여 신성로마제국에게서 로마 제국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주장 등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1].
청나라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소중화 사상과 비교해 볼만 하다.
2 동로마 제국에서 이어졌다는 주장
2.1 불가리아
사상 자체는 꽤나 오래된 것으로, 1393년에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투르노보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 러시아로 망명한 불가리아 성직자들이 처음으로 소개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비공식 명칭으로 투르노보를 원래 콘스탄티노플을 부를 때 쓰던 말인 짜르그라드, 즉 황제가 계시는 도시라 부르며 제 3의 제국을 칭했으며, 이는 동로마계로서 제3의 로마론을 처음 주장한 사례이다.
2.2 러시아
이후 훗날 러시아의 이반 3세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부르며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 당대의 러시아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이반 3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결혼 전에는 조에 팔레올로기나)가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이었다.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2]의 공작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이었는데, 그 딸이 소피아였던 것. 로마-비잔티움에서는 여계를 통한 계승, 특히 사위로의 계승이 빈번했으므로 아주 개소리는 아닌 셈이다.
사실 이 결혼은 당시의 교황이 제안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토마스와 그 가족은 1460년에 모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교황으로서는 러시아에 가톨릭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최종적으로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노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역효과가 났던 셈이다.
이반 3세가 내세운 또다른 주장은 종교가 같다는 것이었는데, 러시아의 종교인 정교회는 키예프 공국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재위: 980~1015)가 동로마 황제의 누이를 대공비(妃)로 맞이하며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가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외에도 로마가 7개 언덕을 가지고 있는것 처럼 모스크바도 7개의 언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근거 중 하나로 썼다.
이반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관직명이나 궁정 의례 등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차르라는 칭호를 러시아 군주의 칭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들인 이반 4세가 처음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썼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반 3세는 국내적으로만 차르라는 칭호를 썼을 뿐 그것을 대외적으로도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걸 대외적으로도 공식화한 사람이 이반 4세.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여섯 차례 러시아-투르크 전쟁(러투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주장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여섯 번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러시아군은 점점 더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운 지점까지 진군했다. 마지막 전쟁인 6차전(1877~1878)에서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서쪽으로 불과 16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러시아 혁명 후 적백내전이 터지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밀린 백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4의 로마로 선포하기도 했다.
2.3 오스만 제국
한편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드 2세 역시,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 흔히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나라는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리지만 이것은 후대의 학자들이 476년에 멸망한 서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만든 이름이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통치한 나라의 정식 국호는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이었다[3]. 즉 '로마 제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이다[4].
두 번째 근거는,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따져 보면 사실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2대째 군주인 오르한은 1346년에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과 결혼한 일이 있는데[5], 오르한이 자신의 조상인 만큼 동로마 황녀도 자신의 조상이고. 즉 동로마 제국 황실은 자신의 친척이라는 것. 다만 철저히 혈통상으로만 따져 보면 오르한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무라트 1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었으므로, 메메드 2세의 몸속에는 팔라이올로고스 황가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14세기 초창기부터 15세기 초반까지는 성전이란 명목으로 동로마 제국과 일 칸국이 양쪽으로 쇠퇴하면서 아나톨리아 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이들 제국이 남기고 간 유산들을 털어먹는[6], 오스만 베이를 필두로 한 기본적으로는 신하지만 사실 독립적인 군벌 영주[7]들의 군사 연합체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오스만 자체에서는 아슥파샤자드, 기독교측에서는 비잔틴 망명 역사가였던 테오도로스 스판도우네스를 비롯한 15세기 부터 전해 오는 역사서들은 오스만 제국이 현대 이즈니크 일대의 이러한 국경 약탈 군벌 영주 네명이 그 중 오스만 베이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네 파샤 중 한명은 오스만 가지, 다른 한명은 투라한 베이, 다른 두명은 미하이울리, 에브레네스 베이라고 전하는데 이는 보다시피 그리스쪽의 기독교식 이름이다. 건국 전승 자체가 이러할 만큼 오스만 제국은 성립 바로 전만 해도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 중 하나였던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더니 그 중간 과정에서도 통혼, 개종을 통해 수 많은 동로마인들을 흡수하여 계승 의식을 주장할 만한 인구적, 문화적 연결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 개종은 상당히 유연하게 이루어졌고, 심지어 렘노스 섬의 영주들을 필두로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 동로마계 영주들은 15세기 말까지도 개종을 안하면서 술탄에게 그 지위와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 받으며 버틸 만큼 최대한 마찰 없이 동로마 제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흡수하였다.
한편 로마 제국 계승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드는 역대 동로마 황제들의 정책을 정리한 지침서를 만들기도 했다. 아마도 제국 운영에 참고할 생각이었던 듯 하며, 그 책에는 아랍어로 정치론이라는 뜻의 '시야샤'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4차 십자군이 새운 라틴 제국의 경우를 들면서 "단순히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수도로 삼았으며, 혼인으로 연결 되었다고 로마 드립 치는건 억지다!"라는 반론도 있는데, 애초에 제3의 로마라는 개념 자체가 무슨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제국으로서 권위와 국력을 과시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외부에 투사하면서 이를 좀 더 이데올로기적으로 굳히고, 역사적 후광을 얻기 위한 명분이자 하나의 타이틀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라틴 제국도 60년만에 다시 비잔틴계 공국들에게 역관광당하면서 쫒겨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영유하면서 콘스탄티노플과 밀접한 테살로니키, 니케아, 스미르나 같은 동로마 제국의 핵심 지방들을 정복하며 동로마가 그랬던 것 처럼 이 지역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패권을 유지했으면 당연히 라틴 제국의 '로마성'도 더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후대에서도 단순한 정복자의 허영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이데올로기로서 다루었겠지만, 역사 속에서 가정은 없다. 당장 상술 된 불가리아, 러시아, 스테판 두샨 치하 세르비아의 경우나, 하술 된 서로마 계통으로 로마의 계승권을 주장한 오스트리아 쪽이나, 심지어 먼 훗날 근대의 이탈리아 경우도 국운이 상승하는 시점에서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중세~르네상스 시기의 봉건적 권위가 현대 냉전기의 사상 처럼 엄밀하고 치밀한 이론적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로마의 계승자라는 타이틀 자체는 지중해 문명권과 그 일대 누구든지 침을 질질 흘릴 법한 상징성이 있지만, 이를 주장하고 주변에서 받아 들이게 하는 건 근본적으로 명분이 아닌 군대와 세입이 대표하는 현실적인 국력의 문제이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단순히 콘스탄티노플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쌓아 올린 발칸반도~아나톨리아 일대 전반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통치를 이룩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외부에 투사하면서 제3의 로마 이데올로기를 어필하며 또 나름 진지하게 취급 받았던 것이다. 제 4차 십자군이 새웠던 라틴 제국과 다른 콘스탄티노플을 영유했던 수 많은 나라들과 달리 오스만의 '로마성'은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더 인정 받고, 역사적 담론으로 연구, 주목 받는 것이다. 애초에 제3의 로마란 개념은 당대의 타이틀이자 통치, 대외적 이데올로기로 받아 들여야지, 로마 제국도 동로마도 오스만도 없는 현대에서 "이런 이런 기준으로 저런 사례도 있으니 이건 헛소리다!"라고 재단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얘기다. 차라리 이 소위 오스만의 '로마성'에 정면 반박하고 부정했던 동시대 사람들의 1차 사료적 반론과 반응을 끌어 온다면 몰라, 근본적으로 이 항목은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늘어 놓으며 분석하는 자리이지, 수백년도 전에 일을 가지고 현대적 관점에서 맞다 틀렸다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다.
2.4 기타
이 밖에, 중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도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했는데, 먼저 세르비아는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력을 크게 키운 왕 슈테판 우로시 4세[8]가 1346년에 황제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계승을 천명했다. 그냥 단순히 '세르비아 황제' 라면 별문제지만, 그 칭호가 '세르비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의 황제' 였기 때문. 그리고 당시 '그리스인' 이라고 하면 동로마인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 칭호가 로마 제국 계승 주장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그는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고도 했지만, 세르비아와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하려는 베네치아의 반대로 백지화되었다.
여담으로 세르비아 제국은, 1355년에 사망한 이후 뒤를 이은 슈테판 우로시 5세가 아직 어렸던데다 무능했던 관계로, 1371년에 그가 죽으면서 공중분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과 유사. 이후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하고 그 아들인 슈테판 라자레비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나름 번영을 누리지만, 그 다음 대인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죽고 몇년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됐다.
한편 불가리아는 1331년부터 1371년까지 재위하며 2차 불가리아 제국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끈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수도 투르노보의 화려함을 인정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제2의 콘스탄티노플' 이라고 불러준 데에서 기인한다. 이후 이반 알렉산더르도 투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플로 여기게 되었는데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로마인이 인정해 주었으므로, '제2의 콘스탄티노플' 이라는 말은 곧 '제3의 로마' 가 된다.
역시 여담으로(...) 불가리아 제국 역시, 로마 제국을 계승했노라고 자처한 인물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이반 알렉산더르가 첫번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 이반 슈랏시미르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황후로 맞아들인 것에 반발하여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 것. 그리고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이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형 이반 슈랏시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매일반이었고, 결국 삼분된 불가리아 제국은 하나씩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3 신성로마제국에서 이어졌다는 주장
3.1 오스트리아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의 협박압력을 받아 해체된 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리아 황제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 해산을 선언하게 된 마당에 다시 황제 칭호를 쓰기는 조금 뭣하니 적어도 그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자는 심산이었던 것. 그리고 그를 내세워 1815년의 빈 회의 이후에 결성된 독일 국가들의 회의기구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어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망했어요.
3.2 독일 제국
1871년에 오스트리아를 빼놓고 독일을 통일한 독일 제국은, '카이저' 라는 칭호[9]를 사용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가톨릭 군주가 통치했던 로마 제국과 신성로마제국과는 달리 독일 황제는 개신교도였기 때문.
4 기타: 이탈리아의 주장
한편 이탈리아의 경우는, 오스만 제국과 유사하게 로마를 수도로 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먼저 이탈리아 통일 당시의 운동가인 주세페 마치니의 구호 가운데 '황제들의 로마 다음에 교황들의 로마가 있었고, 이제 인민들의 로마가 올 것이다' 라는 것[10]이 있고, 마치니는 이 구호를 내걸고 공화제로서의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하고 튀니지를 식민지화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무솔리니가 이것을 차용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제3의 로마(Terza Roma)' 라고 했는데, 황제의 로마와 교황의 로마 다음에 파시스트 로마가 도래했다고 연설한 것(...). 그리고 역시 마치니의 주장을 빌려와 영토 확장을 부르짖었고, 그 결과는...
그리고 상술 된 사례들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공화국 로마의 정체성을 계승했으며, 이 유지를 자국이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공화정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당장 마키아벨리의 저서들만 봐도 그렇듯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제국으로서 로마가 아닌 공화국 로마의 가치를 지향했던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은 상당히 유서 깊으며 영향력있는 지식인 세력이었고,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이나 14세기 로마 민중 봉기의 지도자였던 콜라 디 렌초 같은 경우도 혈연, 권위, 국력, 지정학적 요소 등으로 연속성을 주장했던 위의 군주국들과는 다른 의미로 로마의 공화주의와 시민 중심의 정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1] 이런식으로 말하자면 방계로서 로마의 후예를 자칭했던 경우들 까지 보면 로마 제국의 그림자는 서로마가 망하고도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중해권 문명들의 지향점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남았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알 수 있다.- ↑ 개중에는 '제3의 로마' 나 그 비슷한 말을 한 것도 있고 단순히 '우리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로마 제국 계승 주장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으므로 편의상 '제3의 로마' 로 묶을 수 있다.
- ↑ despotate라는 말 자체에 '전제군주' 라는 뜻이 있어서 '전제군주국', 또는 '전제공국' 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 용어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는 황위를 계승할 장남 이외의 황자들에게 지방에 영지를 주며 내려주는 칭호였다. 즉 '전제군주' 보다 '공작'으로 번역하는 쪽이 실상에 더 가까우며, 모레아도 '모레아 공국' 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 ↑ 고대 로마와 중세 로마(비잔티움) 사이에는 어떠한 단절이나 시간적 공백 없이 정치적 정통성이 그대로 물 흐르듯 이어졌다. 결코 동로마 혼자만의 자뻑이 아니었으며, 이는 당시 유럽 세계가 폭넓게 인정하고 있었다. 애당초 샤를마뉴의 로마 황제 대관식 쇼도 콘스탄티노플의 '정통성 있는' 로마 제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거였으며, 이후에도 동로마의 정통성에 대한 서유럽 군주들의 도전이 왕왕 일어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에서도 동로마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오스만의 위협에 대응하는 원조를 얻어오고자 서유럽으로 향한 요안니스 8세를 서유럽인들은 로마 황제로서 매우 극진히 대우해 준 것이 좋은 예. 자세한 내용은 동로마 제국 항목 참조.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줄곳 보아온 쪽은 서유럽이 아니라 이쪽이니 당연히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도 비잔티움을 로마라 부르며, 서방, 즉 프랑크인들이 보내온 사자가 그리스의 왕 따위 운운하면 참교육을 시전해주었다
- ↑ 이와 관련하여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 '이스탄불' 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일단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0세기 아랍의 기록에 이미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도시로', 또는 '그 도시에' 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이스팀볼린(εις την Πόλιν)' 에서 유래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전에도 이미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이스탄불이 공식 명칭이 된 것은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인 1930년의 일. 한편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에 가장 널리 보이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을 오스만 터키로 발음한 '콘스탄티니예(Konstantiniyye)' 이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스탐불', '스탐볼',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인 '이슬람볼' 등이 쓰였다. 즉,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공식 명칭은 콘스탄티노플이었고, 이스탄불은 비공식 애칭 정도일 뿐이었다
- ↑ 당시 동로마 제국은 소년 황제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 세력과 원래 섭정이었으나 정적들에게 쫓겨나 황제를 칭한 요안니스 6세(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요안니스 6세는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오르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로 인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다만 정략결혼 이외에도 오스만군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 곳곳을 약탈하는 것을 묵인하는가 하면, 갈리폴리 반도의 요새 하나를 내어주는 등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 ↑ 성전이라 하지만 명목 이상으로 봐주기도 힘든게, 이 과정에서 아나톨리아 가지들은 같은 무슬림이고 나발이고 하나도 없는 티무르식 성전을 수행한, 즉 그냥 약탈 전쟁하면서 그 와중에 수피들도 잘 모시고 하는거였다. 와중 오스만 베이의 경우 동네 자체가 동로마의 핵심 영토와 워낙 가까워 동로마를 전문으로 털면서 성장했다
- ↑ 터키어로는 베이beg라 한다
- ↑ 1331년부터 1355년까지 재위. 슈테판 두샨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 ↑ 널리 알려진 상식이지만, 카이저라는 칭호는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인 '카이사르' 에서 유래했다. 위에 서술된 러시아의 '차르' 도 마찬가지.
- ↑ 영어로는 다음과 같다. 'After the Rome of the emperors, after the Rome of the Popes, there will come the Rome of the people.'
- ↑ 게다가 이 중 베네치아는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로 지냈던 세월도 깊어서 따지고 보면 동서로마와 모두 닫는 접점이 있었고, 본인들도 이런 점을 어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