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壽山
(? ~ 1376)
고려 말기의 인물.
수안군 사람으로 충혜왕 때 밀직부사에 임명되어 추성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춘성군에 봉해졌으며, 1352년에 조일신의 난 때 살해당할 뻔 했지만 숨어서 죽음을 면했고 첨의평리, 찬성사, 행성낭중 등을 역임하다가 기철 등이 숙청되어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수춘군으로 봉해지고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어 여진을 평정했으며, 삼사우사, 판삼사사 등으로 승진해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의 호가 더해졌다가 몽고의 악관이 악관들을 데리고 음악을 연주하자 한족 여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해 즐겼다가 그 소리가 공민왕에게도 들려 이삼사(이수산)는 늙었기에 여색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1354년에 최유가 덕흥군을 옹립하기 위해 원혜종에게 요양성의 군대를 출동시킨 것을 경복흥이 격파하고 개선하면서 술자리를 마련하자 이수산은 술에 취해 단판을 치면서 재상들을 건드리면서 희롱해 경솔하고 예의가 없었으며, 1365년에 신돈이 국정에 관여하면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374년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임밀, 채빈 등이 문묘를 배알하면서 모든 생도들이 읍을 하면서 채빈은 또다시 배알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가 모든 생도들이 학사로 돌아가자 채빈이 분노했는데, 이수산은 우리 나라에서 존경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때 감히 일시에 함께 읍하지 않는다면서 채빈을 진정시킨 후에 이수산이 몰래 사람을 시켜 생도들에게 다시 읍하도록 재촉했다.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경복흥, 이인임 등이 왕을 올리는 일에 결정하지 못하고 지체하자 이수산은 종실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인임의 주장대로 우왕이 왕이 되었으며, 1376년에 죽자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