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흥

慶復興
(? ~ 1380)
빨리 읽으면 경복궁으로 들리는 게 함정

고려 후기의 문신. 초명은 천흥(千興).

성품이 청렴하면서 곧았고 계속 승진해 감찰장령이 되었으며, 공민왕 때 군부판서, 판추밀원사, 참지문하정사, 지정사상의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수도(개경)에 성곽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나오자 백성들의 고생한다면서 반대해 중지시켰으며, 1354년에 최유가 덕흥군을 옹립하기 위해 원혜종에게 요양성의 군대를 출동시킬 것을 허락을 받아 공격하자 경복흥은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다.

최영, 안우경 등이 최유를 격파해 물러나게 하면서 경복흥은 술을 하사받으면서 좌시중에 임명되었으며, 1356년에는 기철을 처형한 것으로 인해 일등공신이 되면서 참지중서성사에 임명되었다. 어사대에서 황상, 백백연이 신귀의 처 강씨와 간통한 일을 탄핵하자 강씨를 변호하면서 지아비를 잃은 처들을 석방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청을 해서 받아들여졌으며, 홍건적이 공격하자 서북면원수가 되었다가 부원수가 되었지만 적을 두려워해 싸우지 못하자 군법으로 처형될 뻔 했지만 홍언박이 경복흥은 전략에 익숙하지 못하고 등용한 자의 잘못이라 변호해 무사할 수 있었다.

홍건적이 물러나자 진충동덕협보공신의 호를 하사받고 평장사,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1359년에는 홍건적을 격퇴한 공, 1361년에는 왕을 호종한 공을 1등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돈이 권세를 잡자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신돈에게 배척당해 청원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가족은 적몰되어 노비가 되고 가산은 전부 몰수되면서 경복흥은 흥주로 유배되었다.

1371년에 신돈이 죽자 부름을 받아 1372년 가을 9월에 좌시중에 올라 정방제조에 임명되었고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종실 중에서 왕을 맞이하려고 했지만 이인임이 종실 중에서 우왕을 옹립했으며, 우왕이 서연을 열다가 중지시키자 타일러서 강론을 재개하도록 했다. 1374년 여름 6월에 문하시중이 되었고 한때 1356년에 왕석기를 추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음모가 있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왕석기가 서경(평양)에서 숨어살았는데, 1375년에 경복흥은 이인임과 함께 이 사실을 알려 왕석기를 처형되게 했다.

1377년 봄 2월에 경복흥은 이인임, 최영, 지윤과 함께 왜구전주를 공격하자 원수를 선발하려고 해서 이인임, 지윤이 이를 두고 다투었다가 지윤이 물러나자 그를 쫓아가 울면서 만류했으며, 봄 3월에는 지윤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했고 수성도통사가 되어 목인길, 임견미 등 11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지윤, 이인임 등이 권력을 전횡하자 어찌 할 바를 몰라서 날마다 술에 취하면서 보냈으며, 이 일로 인해 김칠림에게 문책받았고 최영과 사냥을 돌아다닌 일로 인해 식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1380년에 명나라에서 나하추를 정벌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경복흥은 술에 취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 일로 이인임, 임견미 등이 평소에 그를 꺼렸기에 탄핵받아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했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여담으로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성계와 자주 교류했으며, 경복흥이 이성계에게 자식들의 장래를 부탁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때문에 경복흥의 자손들은 노역을 면제 받았다고 언급된다.

신돈에서는 김명수가 배역을 맡았다. 작 중 이름은 "경천흥"으로 경복흥의 개명 전 처음 이름으로 등장한다.[1] 정도전(드라마)에도 김진태 분으로 등장하지만 불과 10화 만에 안습하게 나레이션 퇴장. "묻어가는 안습한 중신 A"로만 남았다.
  1. 공교롭게도 김명수는 정도전(드라마)에서 공민왕역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