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이영구, 오른쪽은 장명부)
이름 | 이영구(李英求) |
일본명 | 키야마 에이큐(木山英求) |
생년월일 | 1954년 12월 24일 |
국적 | 한국 |
출신지 |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 |
포지션 | 외야수, 내야수(유격수, 3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72년 드래프트 9순위 |
프로데뷔 | 1980년 10월 2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전 6회초 3루수 출장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1973~1982) 삼미 슈퍼스타즈(1983~1984) 청보 핀토스(1985) |
등번호 | 59번(1973~1974)→46번(1975~1982)→9번(1983~1985) |
1 일본 프로야구 시절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 위치한 사립 구레미나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2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9순위 지명으로 입단했다. 고교 시절에는 주로 유격수로 뛰었지만 히로시마 입단 이후에는 3루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후 1982년까지 10년 동안 단 10경기에 출장해 3타수 무안타의 성적 밖에 남기지 못하고[1] 1983년 평소 형처럼 따르던 팀 동료 장명부와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한다.[2] 입단 당시 계약금은 2천만원, 연봉은 2천 4백만원이었다고 한다.
2 한국 프로야구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 첫 해에는 다시 고교 시절 포지션이던 유격수로 주로 출전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과는 영 딴 판으로, 첫 해부터 전 경기 출장에, 타율 2할 7푼 7리로 유격수로써 나쁘지 않은 타율과 탄탄한 수비력은 대단히 고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1984년에는 임호균이 롯데 자이언츠로 1:4 트레이드[3] 되면서 반대 급부로 권두조가 입단함에 따라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음에도 역시 전 경기 출장, 2할 5푼 7리의 타율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영구의 삼미 입단을 책임졌던 장명부 답게 이영구의 연봉 인상과 재계약 또한 장명부가 자신의 연봉 협상때마다 책임졌는데, 1985년 장명부가 구단과 재계약 협상에서 실패했을때 이영구도 협상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행적은 불명.
사족으로 일본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 세키가와 나쓰오가 쓴 "해협을 건넌 홈런"에 따르면, 한국 스포츠 신문에서 "프로야구 타격 2위 김무종[4]과 이영구가 일본 프로야구 시절 타격 20위 안에도 들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 프로야구는 일본 프로야구 1군과 2군 사이의 수준에 있다고 판단된다"고 썼다고 한다.
3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
1980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 | 2 | .000 | 0 | 0 | 0 | 0 | 0 | 0 | 0 | |||
1981 | 9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
1983 | 삼미 슈퍼스타즈 | 100 | 368 | .277 | 102 | 21 | 2 | 5 | 36 | 48 | 5 | |||
1984 | 100 | 378 | .257 | 97 | 23 | 0 | 5 | 37 | 42 | 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
1985 | 청보 핀토스 | 77 | 246 | .280 | 69 | 18 | 0 | 3 | 31 | 29 | 3 | |||
통산 | NPB 2시즌 | 10 | 3 | .000 | 0 | 0 | 0 | 0 | 0 | 0 | 0 | |||
KBO 3시즌 | 277 | 992 | .270 | 268 | 62 | 2 | 13 | 104 | 119 |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