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섭

이름이윤섭(李閏燮)
생년월일1958년 3월 1일
출신지부산광역시
학력부산상고, 고려대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프로야구 원년 선수
소속팀한일은행(1981)
롯데 자이언츠(1982~1985.11)
1976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장성규(경북고등학교)이윤섭 (부산상업고등학교)조범현(충암고등학교)

1 소개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투수.

2 고교시절

부산상업고등학교시절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이자 타자였다. 이윤섭은 181cm의 당시로선 매우 장신의 큰 체격을 가진 왼손잡이 선수로, 팀에서 투수와 중심타자를 겸하던 만능선수였다. 투수로는 낙차가 큰 변화구(슬로커브가 주무기)와 제구력으로 승부하던 기교파 유형의 선수였으며, 항상 팀의 중심타선에서 활약했고 타격은 장타력에 정확도까지 겸비했던 상당히 무서운 타자였다.

이윤섭의 부산상고 동기생으로는 프로 원년 롯데 에이스이던 사이드암 노상수가 있었다.

75년에 이윤섭은 투수로 간간히 등판은 하지만 그리 특출난 활약을 보이진 못하는데, 대신 주로 3번타자로 출전하면서 타격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맹활약을 했다. 부산상고는 이윤섭이 투수로 주로 등판했던 대통령배와 청룡기 등에서 초반탈락의 부진을 겪었는데, 7월에 개최된 황금사자기에선 3번타자로 결정적일 때 한방씩을 터뜨리는 좋은 활약을 보여 팀 우승에 일조를 했다. 당시 부산상고에는 노상수, 이윤섭 외에 3학년으로 훗날 '미스터 자이언트'인 김용철이 3루수겸 4번타자로 좋은 활약을 했다.

이윤섭이 3학년으로 진급한 76년. 이해 이윤섭은 타자뿐 아니라 팀의 에이스로 마운드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보이는데 이윤섭은 화랑기와 봉황대기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모두 최우수선수로 선정이 됐다. 특히 두대회의 결승전(선린상고, 신일고와 경기)에서 모두 완봉승을 거두고 4번타자로 타선에서도 맹활약을 보이는 전형적인 '초고교급 선수'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봉황대기에서는 최우수 선수뿐 아니라 타율1위, 타점상까지 휩쓸면서 먼훗날 부산지역 후배인 부산고의 김종석을 연상시키는 맹활약을 보이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이해 열린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에는 청소년대표로 선발이 되는데, 이윤섭은 투수보다는 주로 타자로 활약을 하면서, 당시 일본대표로 고시엔의 영웅투수라며 떠들썩했던 사카이 선수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3 대학 및 실업 시절

고려대 재학 때는 대학선발에 뽑히기도 했지만 투수로서는 빛이 바래진 한편 타력은 여전히 전성기에 맞먹을 정도로 좋은 타격솜씨를 유지했다.

대학 졸업 후 한일은행에 입단하게 되었는데 실업초년생이던 81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낙차 큰 변화구를 주무기로 투수로 실업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이 덕분에 실업야구 후기리그 우수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 프로야구 시절

82년에는 드디어 프로야구가 출범을 하게 되는데, 이윤섭은 81년의 활약 덕분에 상당한 기대를 받으며 팀에 입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롯데 창단 멤버로 입단한 뒤 평범한 투수가 됐다.

부진의 원인은 군 문제. 이윤섭은 군 복무를 마친 뒤 프로에 입단하고자 했는데, 롯데 프런트의 “프로야구선수는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꾐에 빠져 입단을 결심했다.[1] 게다가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 때문에 그 당시 프로선수는 상무에서 뛸 수 없었다.

일반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프로 복귀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1985년 11월 자유계약선수로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기록은 투수로선 22경기 3패 평균자책 7.75이다. 그러나 1982년에는 투수보단 타석에 서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타자로선 31타수 타율 .194 31타수 6안타 1홈런 5타점

5 은퇴후

그 뒤 신발원단 제조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맛봤다. 그러나 1997년 IMF 한파로 사업체가 부도난 뒤 지인의 소개로 현재까지 보험대리점을 운영하고 있고, 롯데 원년 멤버 모임인 ‘한마음회’총무를 맡고 있다.
  1. 물론 군 면제 혜택은 당연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