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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종도(李鍾道) |
생년월일 | 1952년 5월 22일 |
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학력 | 중앙고-고려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2년 MBC 청룡 창단멤버 |
소속팀 | MBC 청룡 (1982~1984) OB 베어스 (1985~1987) |
지도자 | 태평양 돌핀스 코치 (1989~?)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1992)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수석코치 (1996~1999) 고려대학교 감독 (2000~2006) 서울 해치 코치 (2011) 설악고등학교 감독 (2012~) |
MBC 청룡 역대 주장 | |||||||||||
팀 창단 | → | 이종도 (1982~1983) | → | 이해창 (1984) |
OB 베어스 역대 주장 | |||||||||||
이홍범 (1984~1985) | → | 이종도 (1986~1987) | → | 김광수 (1988~1990) |
1 소개
한국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2 선수 시절
중앙고-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MBC 청룡 선수로 프로에 입문했고 그해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 야구장의 당시 명칭)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 와의 출범 개막전에 6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10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이선희의 3구째를 통타하여 끝내기 만루홈런을 날리며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1]
당시 개막전 만루홈런 동영상.
고화질로 보고 싶다면이쪽으로.
이종도는 그해 타율 0.324, 11홈런, 48타점을 남기며 MBC의 중심타자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후 이종도는 1984년 까지 MBC 선수로 뛰다 1985년 OB 베어스로 이적하여 1987년 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프로 통산 성적은 6시즌 482경기 344안타, 타율 0.268, 28홈런, 176타점, 50도루.
3 지도자 시절
1988년 MBC 야구해설위원을 거쳐 1989년 태평양 돌핀스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LG 트윈스(1992~93)[2] 쌍방울 레이더스(1996~99) 코치를 거쳐 2000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감독에 임명되어 2006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였는데 1994 ~ 1995년까지 KBS 라디오 해설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7년 부터는 KBS N Sports 해설위원으로 프로야구계에 복귀하여, 개막장 해설[3]로 야구팬들을 괴롭히다 1년만에 잘렸으나, 2008~09년엔 엑스포츠 해설가로 이직하여 계속 개막장 해설을 하다가 결국 잘렸다.
2010년 11월 담도암 진단을 받았으나 다행히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로 제거, 현재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한다.[4]
2011년 일본 간사이 독립리그 서울 해치[5]의 코치로 임명되었으나 소속 선수들 다수가 고양 원더스로 빠져 나가며 팀이 활동 중단 상태에 놓이자 코치직을 그만 두고 귀국, 설악고등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의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3위의 성적을 올렸다.- ↑ 그날 이종도는 개막전 수훈선수로 뽑히며 오토바이를 부상으로 받았다.
- ↑ 그동안 LG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었었던 선수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개막장 선수 였던 윤찬 덕분에 1993년 시즌 후에 잘렸는데,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의 윤찬의 어처구니 없는 본헤드 플레이로 인한 주루사 당시의 3루코치가 그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 경기를 구본무 회장이 직관했었고, 그 어이 없는 플레이에 분노한 구본무 회장이 프런트에 그의 해임을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물론 그 상황은 전적으로 윤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이종도만 결국 윤찬 덕분에 억울하게 잘린 것이다.
- ↑ 그의 해설이 얼마나 저질이었냐 하면 심지어 고려대 감독 시절 직접 제자로 데리고 있었던 박용택 이나 정근우 같은 선수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어떤 유형의 선수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헛소리를 해댔다.
- ↑ 담도암이 초기에 발견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굉장히 운이 좋았던 셈.
- ↑ 2009년 코리아 해치로 출범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파탄나는 바람에 서울특별시가 후원자로 나서며 2011년 4월부터 다시 리그에 참여하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