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울 레이더스

KBO 리그 / 해체된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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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현대 유니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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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엠블럼팀 마스코트
방울이[1]
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
창단1990년 3월 31일
해체2000년 1월 7일
연고지전라북도 전주시, 군산시
구단 연고지 변천전라북도 (1990~1999)[2]
구단명 변천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9)
홈 구장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10,000명)
월명야구장
(12,000명)[3]
해체 당시의 구단프론트 (1999년)
구단주이의철
사장박효수
단장유은수
감독김준환[4]

1 개요

"내가 소시적에 쌍방울이란 팀이 있었는데 말야"

"정말 그런 팀이 있었어요?! 설마 팀 이름을 그렇게...?"
-최훈, '추억은 쌍방울 방울'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8구단 체제를 연, 그러나 아쉽게 사라지고 만 비운의 팀.

KBO 리그에 있었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전라북도 전주시[5]. 홈 구장은 전주야구장, 제2홈구장은 군산시 사정동 월명야구장이었다. 팀의 상징색은 노란색. 대한민국 프로야구 사상 두번째 신생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손 쓸 새 없이 해체된 아픈 역사의 팀으로, 아직도 전주 사람들은 쌍방울을 못 잊어 눈물 속에 밤을 지새운다는 말도 있다.[6]

2 역사

2.1 1990~1995시즌, 창단과 비밀번호

1985년 한국프로야구 제7구단이 창단하면서 이후 KBO는 제8구단 창단 작업을 진행한다. 마산을 중심으로 한 한일합섬[7],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한 미원(現 대상그룹)[8]쌍방울[9]이 컨소시엄 형태의 구단이 제8구단 창단에 경쟁하게 된다. 결국 미원-쌍방울 컨소시엄이 제 8구단 창단을 하게 되지만, 쌍방울이 미원과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하며 쌍방울 단독으로 제 8구단을 창단하게 된다.[10]

1990년에 창단했으며, 창단 감독은 김인식. 창단과정에서 전라북도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로 부터 구입하였다. 1년간 2군 리그에 참여한 뒤 1991년부터 정규 리그에 참가했다.

그 때까지 사라진 팀들(삼미, 청보, 태평양)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인 '모기업이 약하다'는 부분이 불안을 자극하였고 이 부분은 뒤에 "빤쓰팔아 팀 운영한다"는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연고지 측면에서도 전라북도 관내에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전주고등학교, 군산상고 2개 뿐으로, 군산상고가 아무리 야구 명문이라 해도 연고지 선수만으로는 야구 팀 운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다 보니 KBO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전력 약화를 기대하며 창단하게 했다는 루머도 나돌았다[11]. 게다가 1군 리그 참가 1년을 앞두고 1990년 6월 21일 2군 선수단 버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운전기사와 트레이너가 사망하고 선수 전원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까지 발생. 어찌 보면 앞으로 팀의 안습한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결국 선수진이 약한 상태에서, 1991년 이후 신인 선수지명도 거듭되는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12]. [13] 결국 다른 팀에서 방출된 한물간 선수들로 팀을 운영하는 상황이 되었다.[14] 예를 들어 왕년의 해태 타이거즈 우승 포수였던 장채근, 해결사야왕한대화, 독일병정 박노준, 김광림, 김성래 등이 여기에서 은퇴하거나 다시 부활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1991년 1군 첫 시즌에서 예상을 깨고 승률 4할 이상을 기록하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OB 베어스를 제치고 LG 트윈스와 공동 6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였다.[15]

그러나 빈약한 구단의 재정 상황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듬해 되려 꼴찌로 떨어진 뒤로는 꼴찌이거나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성적이었으며 1995년에는 시즌 개막 4연승을 달리며 기대를 모으지만 갑작스러운 12연패 끝에 꼴찌로 추락해 버리는 아픔을 겪는다.DTD 창단 이후 68788이라는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는 만년 꼴찌팀. 여기에는 팀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8구단드립은 핑계고 사실 해태의 기반(팜)을 약화시키려고 만든거 아니냐부터 주변에 해태 팬들 많으니까 이 팀은 해태 2중대가 딱 어울린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았었고[16] , 퇴출당한 선수들이 모인 구단인 만큼 처음 쌍방울에 자의건 타의건 입단하게 된 선수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팬들부터 선수들까지 광범위하게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던 팀.

2.2 1996~1998시즌, 돌격대의 영광

그러나 1996년 김성근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부임하고부터 모두가 놀란 성적을 찍기 시작한다. 오오 성큰매직.. 이 해 사상 처음으로 0.563으로 정규 리그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 시즌에 당당히 진출하였지만, 아쉽게도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게임 스코어 2:0에서 2:3로 사상 첫 역스윕 탈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1997년에도 정규리그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게임 스코어 1:2로 탈락한다. 재미있는 점은 포스트시즌에서 쓴맛을 보여준 상대가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바로 이듬해 핵심 전력을 빼가서 쌍방울을 몰락하게 했던 팀이라는 점.

김성근 감독은 상당히 변칙적인 운영을 통해 성적을 거두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96년 정규 리그 2위인 팀 성적에도 불구하고 10승을 넘긴 선발 투수가 단 1명에 불과했던 것,[17] 1997년 김현욱의 구원승 20승[18]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선수단의 깊이가 얇았던 팀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실력보다는 근성으로 이겨나가는 '돌격대 야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팀이다. 포스트시즌에 약했던 것도 S급 선수의 부재라는 점이 컸다. 김성근 감독의 '감독으로서의 실력'은 1121을 이룩한 SK에서보다 쌍방울에서 더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이 시즌에 대해서는 이 당시 선수들이나 많은 전문가들이 쌍방울이 한국시리즈 올라갔다면 해태를 꺾고 우승했을 것이다란 평가를 하고있다. 하지만 이때 당시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 징크스에 시달리는 감독이었고 아직 그걸 못이기고있었다.

1997년에는 해태 타이거즈와 엇비슷한 공격력을 자랑했으며, 팀홈런은 뒤졌지만 오히려 타율, OPS는 해태를 앞지르기도 했다[19]. 하지만 이 팀에는 가장 심각한, 아니 우승팀이 되기에는 부적격인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선발투수의 부재였다. 96년도에는 10승 성영재가 전부고, 97년도에는 아예 없었다. 그 문제점은 포스트시즌에서 드러났다. 성영재는 97년에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상대로 1승을 거두었지만 이것이 쌍방울의 포스트시즌 유일한 선발승이었다. 그렇게 96년에는 선발이 강한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 그리고 97년에는 선발은 약하지만 타격은 넘사벽으로 강했고 무엇보다 에이스 김상엽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고, 쌍방울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였다.

다만 97시즌은 쌍방울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97시즌 쌍방울은 삼성을 제치고 팀 페이롤 1위팀이었으며,[20][21]가난한 구단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만한 운영은 결국 IMF 이후 부메랑으로 돌아온다.[22]

2.3 1998~2000시즌, 돌격대의 몰락

좀 더 나은 성적을, 다음해는 기필코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던 1997년 말, 갑자기 IMF가 터지고, 무리하게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자금을 쓰게 되면서[23] 모기업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팀을 유지해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수를 팔아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된다. 김기태, 김현욱은 삼성으로, 박경완, 조규제, 김광림[24]등은 현대로, 박성기는 롯데로, 김실은 OB로 이적하게 되며 팀의 중심 선수들이 대부분 팀을 떠나 전력은 바닥을 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을 판매하면서 감독에게는 사후 통보를 했다. [25]

1998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자, 쌍방울의 운명은 더욱 가혹해졌다. 비싼 돈 주고 선수를 쓸 수 없었고, 중도 퇴출되어도 마땅히 대체 선수를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1998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때는 아예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즌 중 5연승을 달리기도 했고 최종적으로는 8팀 중 6위라는 그나마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1999년의 쌍방울을 잘 설명해주는 다큐멘터리. 현재 kt wiz에서 현역생활을 하고 있는 이진영의 신인시절도 잠깐 보인다. 2016 시즌에는 이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 중 무려 3명이 KBO 리그 감독이 되었다. 김기태, 조원우, 그리고 김성근 감독 본인. 인터뷰는 없지만 당시 1군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이 영상에 잡혔으면 4명 감독 사관학교 쌍방울 레이더스

1999년이 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모기업이 사실상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에 의한 위탁 관리가 이루어 졌고 팀 운영은 도저히 프로라고 볼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겨울 전지 훈련은 홈구장 옆 비닐 하우스 안에서 난로를 때며 대신했고, 원정 경기는 당일 아침에 이동하거나 선수단의 식사는 기사식당에서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팀 선수들이 원정경기 전날 이동[26][27]하여 호텔에 묵고 호텔에서 고급음식을 먹는 것과 비교해 비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진영을 제외한 1999년도 드래프트에 지명된 고졸 선수들을 모두 대학으로 보내야 했다.[28] 그나마 5월까지는 반등요소가 약간이나마 있었지만[29] 팀 내에서 타율, OPS등 팀내 타격성적 1위를 기록하던 조원우의 시즌아웃 부상은 이 추락을 부채질했다. 그 외 김원형, 이동수, 김성래 등 여러 주축이 될만한 선수들이 하나같이 부상으로 시달린 것도 추락의 큰 원인이라 보는 전문가들도 있을 정도. 그래도 그 시즌에는 큰 맘 먹고 마이클 앤더슨, 비아노 등의 외국인 선수들을 보유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방어율은 6점대였다. 게다가 앤더슨의 경우에는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주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했지만 쌍방울로 오면서 팀 사정상 선발로 뛰었는데 결국은 탈탈 털리며 조기에 짐을 쌌다. 그나마 당시는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가 트라이아웃 제도였기 때문에 영입은 일단 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만화가 아니었고 헝그리 정신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상황에서 구단 고위층은 선수팔이도 모자라 경기 내에서의 선수기용과 작전까지 간섭하려 들었고 급기야 1999년 눈엣가시였던 김성근 감독을 올스타전 직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시킨다.이 당시 해임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이 남겼던 "모든것이 끝났다." 란 말이 씁쓸함을 남겼다. 결국 쌍방울은 그 해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인 97패(28승 7무)를[30] 기록하면서 마지막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2.4 2000년 1월 7일, 해체

1999년 말, KBO는 SK그룹을 끌어들여 쌍방울 인수건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프로야구단에 관심을 보인 SK그룹은 쌍방울과의 협상은 철저히 배제하고, KBO하고만 접촉하면서 레이더스 구단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구단의 창단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 계획을 갖는다.

당시 법정관리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인수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길 원했지만, SK그룹은 조만간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굳이 접촉할 이유가 없었다. SK는 쌍방울이 자동으로 법정퇴출되는 2000년 2월 12일까지 버티다가 신생팀을 창단하는 과정만 밟으면 된다는 의도였다. 양측 당사자 모두 팽팽하게 줄다리기 식으로 버티기만 한 끝에 쌍방울은 얼마 못 가서 GG를 치고, SK그룹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SK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결과적으로 아킬레스건이 되고 만다.

파일:Attachment/쌍방울 레이더스/SBWRaiders.jpg[31]

이 시기 쌍방울 살리기 위한 전주 사람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쌍방울 살리기 바자회가 열렸고 전주 출신 연예인들이 앞장서서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구단의 자금 사정은 이미 바자회 한두 번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처지에 놓여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 공시되었고, 창단 10주년을 불과 3개월 앞둔 2000년 1월 7일에 쌍방울은 해체되었다. 레이더스의 빈자리는 인천광역시를 연고지[32]로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채웠으며, 기존의 레이더스 출신 선수들은 자유계약 선수 영입 형태로 SK에 영입됐다. [33] KBO의 지원 속에 SK 와이번스는 리그의 일원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으며 이렇게 쌍방울 레이더스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한국 프로야구의 제 8구단의 역사는 이렇게 어느 구단에도 계승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쌍방울의 몰락 과정은 야구의 삼미, 청보, 태평양과 축구의 전북 버팔로, 농구의 나산, 골드뱅크, 코리아텐더 등과 함께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자생력이 없음을 확인시켜준 사례로서 교훈을 주었으며, '구단 해체 이후 창단'의 수순은 쌍방울의 기둥을 뽑아갔던 모 구단에서 정확히 8년 뒤 재현된다.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34]

3 쌍방울의 유산

3.1 주요 기록

  • 5년 연속 구단 피홈런 1위 : 1991 ~ 1995년[35]
  • 한 시즌 최다패 기록 : 97패 (28승 7무) [36]
  • 역대 최소관중 기록 : 54명 (1999년 10월 7일 vs 현대, 전주구장) [37]
  • 홈경기 최다 연승기록 [38] : 17연승 (1996년 8월 14일 ~ 1997년 4월 13일)
  • 한 시즌 최다 완봉승(영봉승 포함) : 1996년 19회
  • 한 시즌 최다 구원승 : 1997년 44회

3.2 연고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 지역이었던 전라북도 지역은 연고 구단의 해체 이후 무연고지를 유지하다가 2001년에 KIA 타이거즈에 반환되었다.[39] 쌍방울 레이더스 말년 때는 전주야구장의 시설 노후화 문제로 군산시 월명야구장에서 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러던 것이 2000년 월명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한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가 2001년부터 KIA의 군산 경기가 다시 열리게 됐다.

쌍방울의 해체는 지역 아마야구에도 타격을 주었다. 군산상고와 전주고 모두 타 지역으로 전학하는 선수들이 속출하며 야구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군산상고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전주고는 아예 중학교 선수들이 전주고 야구부로 입학을 기피한 나머지 한동안 선수부족으로 선수권대회나 고교리그에 참가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흑역사를 보내야만 했다.

3.3 선수 목록

전주 시민들에게 남겨진 추억이나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눈여겨 볼 만하지만, 쌍방울이 야구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역시 선수들일 것이다. 팀은 해체되었지만 돌격대에서 발굴(혹은 부활)한 선수들은 이적한 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일부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김원형, 박경완, 오상민, 이진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년을 끝으로 김원형은 은퇴했으며, 2011 시즌 초에 오상민은 도박사건으로 퇴출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진영, 박경완 두 선수가 남은 상태였다.

2013년 10월 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면서, 2016년 현재 현역 프로 선수 가운데 쌍방울 출신의 선수는 이진영 단 1명만이 남은 상태이다.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마지막 신인 선수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이진영만 계약했고, 당시 지명되었던 선수중 현역으로는 LG 최경철이 있으나, 대학 진학후 SK입단 계약금도 부족하여 김성근 당시 감독이 일부 보조했다고 한다.

3.3.1 주요 선수

파일:Attachment/쌍방울 레이더스/SBWRaiders2.jpg
불암갑이 그린 리즈시절 쌍방울의 스타 선수들

  • 김광림 - OB 베어스의 프랜차이즈 출신이었으나 1994년에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고 1995년에 타격왕을 먹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1996년 미스터 올스타가 되기도 했으나, 1997시즌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어 우승반지를 끼고 1998시즌후 방출되어 다시 돌아왔다. 1999 시즌 후 은퇴
  • 김기태눕기태 - 돌격대의 형님이자 해결사. 왕방울. 쌍방울의 주장이자 팀을 대표했던 강타자. 이승엽 등장 전까지 좌타자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인 최다홈런 기록도 그의 것이다. 또한 1997년에 .344의 타율로 타격왕까지 먹은 적이 있었다. 쌍방울 부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도 유일하게 버틴 선수였으나, 1999년에 김현욱과 함께 삼성에 팔려갔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로 변신, LG 트윈스 감독을 맡아 팀을 10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 다음해에 도망치듯이 사퇴해서 문제가 됐지만. 2015년에는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하며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다.
  • 김원형 - 영원한 어린왕자, 돌격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에이스.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 보유. 쌍방울 레이더스 선발투수관련 각종 통산기록 1위[40] 그 후 SK에서 활동하다가 2011년 은퇴, 통산 134승 144패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 박성기 - 초창기 쌍방울 암흑기 시절 좌완 에이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간 41승으로 이 기간동안 쌍방울 팀 내에서 박성기보다 더 많은 승수를 거둔 투수는 없었다.[41]
  • 김현욱 - 원조노예 삼성 출신 선수로 1997년 구원으로만 20승...을 따냈으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이대진(17승), MVP는 이승엽(홈런 - 최다안타 - 타점)에게 빼앗겼다.[42] 1999년 친정 팀인 삼성에 팔려서 돌아갔다.
  • 김호 - 수비형 유격수로 1991년은 .233 11홈런 22도루를 했다. 구단 해체 이후에는 해태, 두산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 박경완 - 포도대장. 돌격대의 안방마님. 크보 역사상 최고의 포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레전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박노준 - 말이 필요 없는 선린상고의 독일병정. 1994년 .303에 43도루를 했다. 그리고 훗날...
  • 성영재 - 김기덕, 김현욱과 같이 잠수함 투수로 활약했던 투수, 선발로 나오던, 구원으로 나오던 든든한 투수였다. 그 뒤 쌍방울이 해체되고, SK가 창단되고도 SK에 남았지만 이호준의 트레이드 상대가 되어 해태로 이적했으며, 중간에 병역비리로 구속된 일이 있고 기아, 두산, LG를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현역 팀인 LG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거쳐 현재는 LG의 프런트로 있다.
  • 김기덕 - 노예 프로토타입 위의 김현욱, 성영재와 함께 또다른 잠수함 트로이카중 한 명. 사실 김현욱의 후덜덜한 포스에 가렸지, 쌍방울 노예의 시초는 김기덕이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선발, 중간, 마무리 어디든 안 가리고 나와도 평균 이상은 뽑아내는 마당쇠.
  • 심성보 - '맘보'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좌타 외야수이자, 타선에서는 유일하게 김기태를 받쳐 주던 또 다른 강타자. 김성근 재임 시절 포텐이 터졌지만, 당뇨병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스타. 1998년 외야수 최다보살(20개)...한국판 원조 가르시아이자 '강견의 3심' 중 한 명.[43]
  • 조규제 - 전주 특급. 쌍방울의 핵심 마무리. 킬인식의 감독초기시절 은근히 혹사당했다. 그 후에도 전주의 수호신으로써 잘 하다가 팀이 부도로 어렵던 시절 박경완과 함께 현대에 팔려갔다.
  • 조용호 - 천안북일고 출신으로 빙그레에 있었다가 별 활약을 못하고 1991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첫해에 .318의 좋은 타율로 활약을 했다.
  • 조원우 - 돌격대장. 400경기 이상 무실책은 한국 최고 기록일 뿐더러 메이저리그 기록마저도 뛰어넘는다. 2016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었다.
  • 최태원 - 철인. 1014경기 연속출장으로 KBO에서는 이 부문 1위. 다만 1014경기 연속경기 출장 기록 중 369경기는 쌍방울의 후신 격 팀인 SK 와이번스에서 소화했다. 쌍방울 유니폼을 입은 기간으로 국한하면 1995년 4월 16일 광주 해태전부터 1999년 10월 8일 전주 LG전까지 635경기 연속 출장. 물론 635경기 연속 출장도 단일 구단 소속 연속경기 출장 기록으로는 1위다. ㅎㄷㄷ[44]
  • 최한림 - 국내 최초의 좌완 사이드암.[45] 결국 김현욱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삼성에서 은퇴한다.
  • 강길용 - 1991~1993 쌍방울의 또다른 우완 선발투수. OB 베어스 트레이드 이전까지 쌍방울에서 2-3선발급 활약을 하던 선수였다. 그러나 OB 가서 항명사건에 연루되더니....망했어요

3.3.2 쌍방울 레이더스 마지막 멤버 일람

괄호 안은 등번호이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영구결번 명단
관련항목:쌍방울 레이더스/등번호, 쌍방울 레이더스/선수단,

얼핏 보기엔 괜찮은 멤버 같지만 송구홍, 김성래, 박정현 등 과거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이미 선수생활의 황혼기, 심성보는 당뇨병 투병, 이진영은 고졸 신인이었으며 김원형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은 후 이때까지 재기 못했다...

3.3.3 외국인 선수

당시 쌍방울이 1라운드서 지명했던 선수다. 2만 달러에 영입되어 시범경기서는 나름 잘 던졌지만, 컨트롤 문제와 팀의 사정이 겹쳐 퇴출당했다. 28경기 3승 3패 7.06(중도퇴출)

2라운드서 지명된 lg 출신의 선수, 선발로 보직이 바뀌어 자신감을 드러냈으나, 최악의
팀 사정으로 인해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돌아갔다. 19경기 2승 9패 6.75.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들여오지 않았으며, 1999년에는 투수용병으로 이들을 영입했다. 다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

3.3.4 그 외의 선수

  • 정학원
내야수(유격수, 2루수). 정명원의 동생. 군산상고-원광대를 졸업하고 1990년 쌍방울 2차 1순위로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현역 복무 크리티컬로 인해 1995년을 끝으로 옷을 벗는다. 현재 군산대학교 앞에서 식당을 운영중이다. 카운터 앞에 친형 정명원 KT코치와 선수시절 맞대결했던 신문기사와 군산상고 경남고 레전드매치때 기사가 붙어있기도. 가게 이름은 라이스 스토리.
  • 강창남
재일교포 출신의 투수로 일본명은 코야마 마사오(小山昌男)다. 그 당시 강호였던 나라현의 덴리고교를 졸업하고 1981년에 긴테쓰 버펄로즈의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통산성적은 86경기 23승 21패 4.8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1992년에 같은 재일교포인 긴테츠의 황태호와 같이 쌍방울에 입단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구단 살림으로 인해 생겨난 식사와 숙소 문제를 도저히 인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겠다며 시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계약 자체를 무시하고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쌍방울의 흑역사 선수 중에 하나.
  • 유동효
태평양 돌핀스에서 이적, 쌍방울의 창단 맴버가 된 선수로 3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선수생활 동안 특별한 성적은 남기지 못했으며 이후 롯데로 이적해 은퇴했다. 여담으로 이말년딸아이 이름짓기 편에서 상품으로 내건 싸인볼이 이분의 싸인볼이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합류했으며 2014년 현재 운영팀 차장으로 있다.
  • 황태호
위의 강창남과 같은 재일교포에 같은 긴테쓰 버펄로즈 출신의 투수이다. 일본명은 히야마 야스히로(檜山泰浩)다. 후쿠오카현 도스쿠고교 출신으로 1985년에 긴테쓰 버펄로즈 드래프트 1번으로 입단했는데, 그 당시 PL학원의 듀오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 구와타 마스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특급 유망주였다. 그 이후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루키리그에서 2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1군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긴테츠에서는 흑역사 취급당하고 있다.
어쨌든 1992년에 강창남과 같이 재일교포로서 입단하게 되지만 강창남은 시즌을 한 번도 못 뛰고 먹튀를 한 반면 황태호는 1경기 무승 무패 81.00의 기록만 달랑 남기고 6월에 퇴단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법무사 시험에 패스, 현재는 와세다세미나 전임강사로 야구선수 때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4 유니폼

쌍방울 레이더스/유니폼 참고.

5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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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더스를 대신하여 창단한 SK 와이번스는 당초 연고지로 서울을 원했으나, 현대 유니콘스 측이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연고권을 54억 원에 구매하고 인천으로 입성했다. 이후 쌍방울 선수로 구성된 팀이란 이미지를 지우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으며 '인천 SK' 문구의 강조, 김경기 등 인천출신 스타 선수 영입, 2002년 삼미 슈퍼스타즈 올드 유니폼 행사 등 메모리얼 이벤트를 하며 새 연고지인 인천에 정착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줬다. SK 와이번스 창단 당시에는 쌍방울 팬덤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인천에서 새로이 팬이 된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러한 구단 분위기 속에서 옛 쌍방울 팬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기존 인천팬 외에 타팀 팬들한테까지 집단적으로 배척을 당하면서 팀에 이어 팬들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 소수의 쌍방울 골수팬들이나 타팀팬들에게 배척당한 팬들중 상당수가 KIA 타이거즈로 팬고이전 하거나, 지역내 다른 스포츠팀들인 전북 현대 모터스, 전주 KCC 이지스로 갈아탔다. 또한 이 상황때문에 아직도 SK를 비롯한 타팀이나 타팀 팬들을 원망하는 분위기가 전주 야구팬 정서에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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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스코트였던 방울이는 1980년부터 1991년까지[47]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공식 마스코트였던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의 표절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다.[48]
  • 만화가 이말년과 전주 출신의 래퍼 데프콘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이였다. 특히 이말년은 같은 안산시 출신 선수 김광현 덕에 와이번스로 갈아탔지만, 트위터 등을 보면 과거 쌍방울에 대한 향수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올스타전에는 동군 소속으로 참가했다. 사실 위치로만 따지면 서군으로 들어가는 게 타당하지만, 제7구단인 한화 이글스가 1군에 참가했을 때 팀간 전력 안배 차원에서 서군에 들어가는 바람에 쌍방울은 한 팀이 모자란 동군의 빈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SK 와이번스가 인천을 연고로 하고 있음에도 서군이 아닌 동군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런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자레코사의 슈퍼 3D 베이스볼을 현대전자에서 현지화한 한국프로야구 게임에는 이게 제대로 반영이 안 되어 있어서 쌍방울이 서군으로(그 대신 한화는 동군으로) 나온다.
  • 같은 전라권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아쉬움의 대상이다. 쌍방울이 창단되면서 전북쪽 선수들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김기태,박경완,조규제,성영재,김원형,이진영,정대현 등 본래 해태 연고지 내에서 우수한 선수들이 꾸준히 배출됐고, 비슷한 시기 연고지의 박재홍도 해태의 지명을 거부한 사례가 있어 해태팬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했다. 더욱이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가 없던 해태 말년에 왕조의 몰락과 전력의 약화를 고스란히 실감했던 시기에 더더욱 그랬다. 전통적으로 좌타거포와 포수의 부재를 안던 해태에 쌍방울이 창단되지 않고 그 선수들이 그대로 왔다면?은 그야말로 떡밥 Of 떡밥. 기존의 이종범,홍현우,장성호,이호준과 김기태,박경완 등이 타선에 버티고 있고, 투수진도 김원형,조규제의 합류 등 2000년 현대 못지않은 사기팀으로 군림했을 확률이 높다.

6 역대 성적

­우승
­준우승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드 = 드림리그, 매 = 매직리그
* = 공동순위
연도정규리그 순위최종순위팀이름경기수승률
1991*6위/8팀*6위쌍방울 레이더스126527130.425
19928위/8팀8위126418410.329
19937위/8팀7위126437850.361
19948위/8팀8위126477450.393
19958위/8팀8위126457830.369
19962위/8팀3위126705420.563
19973위/8팀3위126715320.571
19986위/8팀6위126586620.468
1999매4위/4팀8위132289770.224
KBO 리그 통산9시즌1140455655300.410

6.1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전신 포함)

현대 유니콘스96PO : 2승 3패
PO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2승 3패
삼성 라이온즈97준PO : 1승 2패
준PO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1승 2패
  1. 참고로 이 마스코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스코트를 표절한 것이다. 항목 읽을거리 항목 참조.
  2. 레이더스 구단이 존재할 당시만 하더라도 KBO리그의 연고지 운영 방식은 광역연고제였다. 특정 도시로 연고지를 국한하는 '도시연고제'로 바뀐 것은 2000년부터다. 따라서 전주시로 연고권역이 국한됐다기 보다는 전라북도 전역이 레이더스의 연고권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산에서 홈경기를 나눠 치른 것도 이 때문이다.
  3. 제 2구장
  4. 99년 올스타전 이후 김성근 감독 해임으로 감독 대행 . 00시즌 감독으로 내정되었으나, 구단해체로 인해 SK 수석코치가 되어,1시즌을 보내고 해임된다.
  5. 연고는 전라북도이지만 정작 전주시 이외 지역에서는 공기 취급받았다. 그나마 전라북도 북부는 군산 시리즈 때문에 나름 팬들이 몰리기라도 했지만, 전라남도하고 가까운 지역일수록... 안습.
  6. 본문 '읽을거리' 항목 참조.
  7. 마산지역에 연고가 있던 기업.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 앞의 아파트가 과거 이 회사의 공장 부지였다. 현재는 동양그룹 계열사로 있다.
  8. 창업주가 정읍시 출신으로 전라북도에만 2개의 공장을 가동하는 등 전북과 인연이 깊은 기업이다.
  9. 익산시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으로 오래 전부터 전북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 속옷회사 맞다. 지금도 익산에 공장이 있다.
  10. 훗날 밝혀진 얘기이지만, 전주중-전주고 출신으로 야빠였던 이의철 쌍방울 사장이 야구단을 창단하고 싶지만 자본금 50억 원이 되지 않는 회사의 사정 때문에 미원의 이름을 팔아서 창단했다고 한다.
  11. 쌍방울 구단 이사였던 공천섭이 민주정의당 재정위원 겸 지구당위원장이기도 해서 당시 민주당은 쌍방울의 창단을 호남 민심 회유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2. 이미 1991년말 드래프트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이 당시 쌍방울 1차지명선수가 방극천으로 타 팀 지명자들의 네임 밸류에 비해 많이 딸렸다. 현장 분위기도 의외의 지명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안습한 팜의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봤고... 결국 방극천은 4년 동안 2경기 등판, 3과 2/3이닝 소화, 삼진 1개. 이것도 현역 마지막시즌인 1995년에야 기록한 안습함만 남기고 은퇴한다
  13. 그래도 최태원, 성영재, 조원우, 심성보, 오상민, 윤재국, 이진영, 정대현 정도는 성공했다. 나머지는 죄다 실패..... 다만 쌍방울의 이름으로 지명한 마지막 신인인 이승호, 신승현, 엄정욱, 마일영은 대박을 쳤다. 문제는 쌍방울 유니폼을 안 입어서 그렇지...
  14. 심지어 삼성의 레전드라 칭송받는 양준혁이 신인 지명에서 쌍방울에 2차 1순위로 임창식과 함께 낙점되자 군대(상무 피닉스 야구단)를 간 뒤 삼성 라이온즈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군 생활을 하다 기어이 1차 지명을 받아 삼성으로 도망간다.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사건사고 참조
  15. 이 때의 기록은 역대 창단 팀이 1군 진입 첫 해에 기록한 최고 승률로 아직도 남아있다.
  16. 실제로 이 기간동안 전주에서의 인기는 해태보다 낮았다.
  17. 10승 5패를 기록했던 성영재. 김원형은 이 때 구원투수인 김현욱, 조규제, 김기덕, 오봉옥 등에게 갈취당한 승수가 많았다. 안습.
  18. 이는 살려조 이전의 김성근 투수혹사의 사례로 가장 유명하다.
  19. 사실 해태 쪽 타자들은 홍현우이종범, 장성호 정도를 빼면 타격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호준의 포텐이 터진 건 98년의 일이니..
  20. 김성근 감독의 가난한 언더독 이미지와는 달리 그가 이끄는 구단은 2016시즌까지 5차례나 페이롤 1위를 달성한 적이 있다. 그 중 한 시즌이 97 쌍방울.
  21. 여기에 대한 반박 하나. 1996년만 하더라도 쌍방울은 팀 페이롤이 하위권이었고 억대 연봉자가 김기태 1명이었다. 그 김기태도 구단의 상징성 때문에 최하위긴 해도 연봉을 올려준 거고. 게다가 김성근 감독이 요구했던 투자를 해준 덕택에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으니 당연히 구단이 투자 안 해줄 리가 있나? 전년 대비 연봉상승률이 1위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성적으로 보나 연고 내 위상으로 보나 공헌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팀 페이롤 1위라고 해도 그냥 김성근에 혹한 묻지마 투자가 아니라 나름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고(김성근 이전 시대에는 전력 분석용 컴퓨터도 없고 전력 분석원도 2명이 전부였다.(....)), 1997년이 무리한 투자라고 쳐도 김성근감독시대의 시작인 1996년은 진짜 가난한 언더독 그자체였다.
  22. 다만 직접적인 원인은 모기업의 무리한 사업확장 시도와 실패였다.
  23. 이 때 만든 시설을 가지고 무주군에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포부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치는 강원도 평창군으로 넘어간다.
  24. 1997년 시즌 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었다가 1998년 시즌 후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뒤 쌍방울에 복귀했다가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
  25. 넥센 히어로즈의 초창기 때 야구관계자들은 물론 팬들이 심히 걱정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다만 넥센은 구단주가 KBO 희대의 딜러이기도 하거니와, 모기업이 따로 없는 구조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능력껏 스폰서를 물어와서 부족한 재정을 채울 수 있기 때문. 물가 변동을 감안한다 해도 현재 히어로즈가 넥센으로부터 받는 네이밍 스폰 금액이 당시 쌍방울의 자본금에 필적하는 판이다.
  26. 1999년 당시 전주시의 교통 인프라는 꽤 열악한 편이었다. 광주나 대전과의 접근성은 괜찮았지만 대구나 부산 방면의 고속도로가 매우 미비했던 것. 그래서 해태나 한화 원정경기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전주에서 광주/대전으로 당일치기 이동으로 어떻게 때웠지만 나머지 방면으로의 원정길은 엄청 멀었다.(서울, 부산 3시간, 인천 3~4시간) 선수단은 원정 때마다 몇 시간씩이나 소모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이는 쌍방울의 숨겨진 전력약화 요인이기도 했다.
  27. 그리고 나머지 7개 구단은 28인승 우등고속버스인데 쌍방울 구단만 해체 직전까지 유일하게 45인승 일반고속버스로 원정경기를 갔었다. 시합이 끝나고 옮길 때 선수들 피로는 말도 못 했다고 한다. 이 증언은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10인 김기태 편의 심성보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28. 그나마도 계약금을 구단에서 다 줄 수 없어서 김성근이 일부 보조해야 했다. 대학으로 보낸 선수들 중 뒤에 지명권을 인계받은 SK에 입단한 선수는 4명(최경철, 김형철, 이영욱, 한상준) 뿐이었다.
  29. 이때 박정현이 예상외로 너무 잘 던졌다. 5월 중순까지 5승을 거두며 15승 페이스까지 나갔으니 언론에서는 1989년 - 1993년의 전성기를 보는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박정현은 친정 팀 현대와의 경기에서 난타를 당하면서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해 6월부터 시즌 끝날때까지 1승도 못거둔채 5승 11패로 끝나고 말았다.
  30. 이 패배수는 비밀번호의 행진을 하고 있던 롯데의 2002년 시즌 패배수와 동일하다.
  31. 다만 이 사진은 1997시즌 준플레이오프 당시 전주구장 앞에서 촬영된 것이다.
  32. 이때 현대가 인천을 떠나서 수원 야구장에서 8년간 머물렀다.
  33. 이러한 선수양도 방식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넥센 히어로즈가 창단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34. 공교롭게도 두 구단의 해체일은 (2000년/2008년) 1월 7일로 똑같다.
  35. 한술 더 떠서 1992년에는 140피홈런, 1999년에는 187피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도 갈아치운 전력이 있다. 홈런공장 이 기록은 다음해에 이 팀을 대신하여 창단된 SK가 195개란 다시 나오기 힘들 기록으로 경신했다.
  36. 2002년에 롯데가 타이기록을 세웠다. 그나마 시즌 100패 기록은 안 세워서 다행.
  37. 쌍방울이 치른 1999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 4연전 중 세 번째 경기. 이날 쌍방울은 2-3으로 패했는데 이 패배로 두 가지 기록이 세워졌다. 하나는 1985년 삼미 이후 14년 만에 단일 시즌 최다연패 타이 기록(18연패)이 등장했고 또 다른 기록은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등장한 정민태단일시즌 선발투수 20승 기록이었다. 여담으로 KBO 리그 역사상 한 경기 100명 이하의 관중이 들어온 적은 총 네 번이다.
  38. 재밌는 점은 이 기록이 원정팀들이 묵었던 전주 코아호텔의 귀신목격담과도 관련 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항목 참조. 당시 쌍방울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2009년에도 SK의 감독을 맡아 22연승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레알 야신 이때는 이렇게 잘하시던 분이 왜 한화에 와서는 팀을 말아먹고 계시는지...
  39. 프로야구 원년부터 쌍방울이 참가하기 전인 1989년까지 전라도 전역의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에 할당되어 있었다.
  40. 통산 최다승(70승), 최다패(73패), 최다이닝, 최다완투, 최다완봉, 최다 탈삼진 등등 여러 기록보유.
  41. 이후 2년간 다소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초창기 벌어들인 승수 덕택에 1996년까지는 팀 내 유일 통산 50승 이상 투수였다. 이후 김원형이 50승 돌파와 함께 꾸준한 활약으로 팀내 선발투수 관련 모든 기록 1위로 올라간다.
  42. 만들어진 기록에는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에 의한 것이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에 대해서 기자들은 기록은 영원해도 상은 영원히 없다라고 맞불을 놓았다.
  43. 나머지는 심재학, 심정수.
  44. 2위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김형석의 622경기, 현역 중 1위는 500+ 경기를 연속 출전한 황재균.
  45. 사이드암 투수 자체가 우완일 경우 우타자에 강하기 때문에 기용되는데, 좌완 사이드 암은 우타자에게 약하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46. 선수은퇴후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포수로 취직했다가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불펜포수로 재직중
  47. 1992년부터는 쟈비트라는 토끼를 사용한다.
  48. 사실 야구공 머리의 인간형 마스코트는 1960년대부터 미스터 멧이나 미스터 레드 같은 사례가 메이저리그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요미우리 마스코트 역시 완전한 오리지널 창작 캐릭터라고는 할 수 없다. 표절의 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