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 전투

이치 전투
날짜
1592년 음력 7월 중순 혹은 8월 중순
장소
조선 전라도 진산군 외곽 이치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토요토미 정권
지휘관권율
황진
황박†
공시억
위대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불명불명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조선군의 전라도 방어 성공.
400px
전적지 위치도. 금산에서 곧장 전주로 넘어오는 길에 있는 별 표시가 이치 고개(배티재),
용담호를 통해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에 있는 별표시가 웅치 고개(곰티재)

1 배경

이 전투를 알기 위해선 우선 왜란초기 전라도 군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월 27일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요청을 받은 전라방어사 곽영은 조방장 이지시와 5,000병력을 거느리고 경상도 구원에 나섰다. 4월 30일 곽영은 경상우방어사 조경, 군관 정기룡과 함께 금천역에서 교전을 벌여 수급 30여급을 얻고 5월 4일 전라도로 귀환했다. 이와 별도로 조방장 이유의는 도순변사 신립에게 합류하기 위해 2,000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으나 충청도 연산에서 신립이 왜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1]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평양으로 몽진하는 한편 심대를 파견해 영호남에서 근왕병을 모으게 했다. 이보다 앞서 이광은 이미 근왕병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라도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근왕병 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부사 고경명에게 근왕을 권하는 격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도내에 유서를 돌리고 경상도에도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5월 1일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러나 충청도 공주에서 선조의 파천 소식을 접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병은 흩어져 버렸고 이광은 아무것도 못해보고 돌아와야 했다.

경상감사 김수가 그랬듯 개전 이전 전쟁준비로 도민들을 꽤나 들볶았던 이광은 근왕을 포기한 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때마침 근왕을 독려하는 조정의 교서가 도착하자 재차 근왕병을 모집해 나섰다. 그러나 잇달은 대규모 징발에 전라도 군민의 불만과 저항은 컸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순천과 옥광의 군사들이 형대원과 조인을 맹주로 추대하고 노령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순창으로 들어가 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저질렀다. 순창군수 김예국은 간신히 빠져나왔다. 소요는 한곳만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근왕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오는 담양부사 이경린의 군사도 반군을 만나 담양의 군사도 와해되어 버렸다. 남원, 구례, 순천의 군사들 8천명도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지하는 들을 찌르고 달아났다. 제지하려던 이광의 군관 왕경조는 사로잡혔다가 전주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삼례에서 남원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성현감 백수종을 위협해 우두머리로 삼으려했고 전주, 광주, 나주의 군사들도 용안에서 흩어졌다.

이 정도로 전라도 군사들의 질과 사기는 형편없었고 이광은 근왕이전에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소요을 진압해야 했다. 이때분에 전라근왕병의 2차 출동은 상당기간 늦춰져야 했다. 사태는 김예국이 조인을 잡아 죽임으로써 겨우 진정되었고 이광은 근왕에 나섰다. 이번에는 충청감사 윤석각과 경상감사 김수까지 합친 삼도근왕근이었다. 5월 26일 타도 군사들과 합류한 전라도군은 6월 5일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군과 교전하게 된다. 왜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한바탕 소요사태가 일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근왕병 주력인 전라도군의 사기나 숙련도는 엉망이었고 미숙한 지휘까지 겹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 최악의 참패중 하나로 기록되는 용인전투이다[2]. 이광은 6월 15일 전라도로 귀환했는데 이와 거의 동시에 전라병사 최원이 2만의 군사를 이끌고 김천일의 2천 의병과 함께 북상했다. 수만의 병력을 동원한 근왕에 2번이나 실패해 군사들이 대거 흩어진 상황에서 2만 2천을 더 차출해 보낸탓에 당장 전라도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크게 줄었다.

한양을 점령했으나 선조를 잡는데 실패한 왜군은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조선의 남부지역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성을 느꼈고 5월부터 그간 공격목표에서 벗어나 있던 전라도로 칼끝을 돌렸다. 전라도 공격을 맡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우선 휘하의 승장 안고쿠지 에케이에게 전라감사를 자칭케하며 경상 우도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할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안고쿠지 군은 5월 말에서 6월 초사이 벌어진 곽재우 의병대와의 교전에서 패해 물러났다. 고바야카와는 공격방향을 바꿔 무주와 금산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려 했다. 왜군의 공격을 감지한 이광은 곽영을 금산에, 이계정을 육십령에, 장의현을 부항에, 김종례를 동을거지(冬乙巨旨)에 배치해 수비를 강화했다. 6월 17일 무주 경계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금산군수 권종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금산에서 내려오는 적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웅치에는 김제군수 정담,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 전 전주만호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고 금산 함락 소식을 듣고 남하한 고경명 의병대가 진산에 주둔했다. 진산현과 고산현의 경계에 있는 이치고개에는 고산현으로 퇴각한 곽영 부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곽영군은 고경명의 의병대와 합류해 금산 공격을 위해 나섰고 황진은 남쪽 장수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황진이 채 합류하기 전인 7월 8일 왜군이 웅치로 밀어닥쳤다. 하루종일 벌어진 교전끝에 정담이 전사하고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쳤다. 때마침 황진의 군사가 합류해 교전을 벌였고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3]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나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고경명 의병대가 금산의 왜군을 공격했으나 7월 10일 참패했고 고경명, 유팽로 등은 전사했다. 6,700명의 의병대와 이들과 함께한 전라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와해되면서 전라도 군민은 한층 부족해진 병력으로 왜군의 2차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2 전투날짜

일반적으로 이치전투는 7월 8일 웅치전투와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대 사료를 짜맞춰 보면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위에 첨부된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두곳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치와 웅치의 거리는 직선으로 40km이상 이며 전주 또는 무주 방면으로 우회해서 접근해야 한다. 금산에 수비병력을 남겨둔 고바야카와 군이 굳이 멀리 떨어진 웅치까지 군사를 나누어 보낼 이유가 없고 전근대 시대에 그 거리를 극복하고 동시에 공격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웅치전투 직후인 7월 10일 고경명의 1차 금산 전투가 벌어졌는데 웅치와 이치 전투가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다면 3곳에서 매일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이 된다.

무엇보다 동북현감 황진과 의병장 황박은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에 모두 참전했다. 두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다면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금산과 이치 사이의 진산에 고경명 의병대가 7월 2일부터 주둔하고 있었다. 고경명 의병대가 7월 9일 금산에 이르러 10일 전투를 벌였으니 고바야카와 군이 7월 8일 이치를 공격하려면 무조건 진산에서 고경명 의병대와 부딪쳐야 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게다가 이치 전투를 지휘한 난중잡록에 의하면 권율은 이때 남원성 수성장으로 임명되어 내려가 있었다.

그럼 왜 이런 오류가 널리 퍼졌을까? 원인은 이형석의 임진전란사다. 선조수정실록에선 1592년 7월 1일 기사에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를 나란히 기술해놓았다. 이는 같은 달에 일어난 사건은 한데 묶어서 1일 기사에 적는 선조수정실록의 서술방식 때문인데 이형석은 이를 감안하지 않은채 두 전투가 같은 시기 벌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웅치전투가 7월 8일이니 이치전투도 당연히 7월 8일 일거라 여겨 임진전란사에 적었다. 그리고 학계에서 전쟁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드문탓에 임진왜란 전투를 조망한 새로운 개론서를 내지 못해 임진전란사가 40여년간 무비판적으로 인용되며 잘못된 인식을 퍼뜨려 온 것이다. 결국 2,000년대 들어서야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피드백이 느려서 인터넷이나 드라마에선 아직도 웅치전투와 이치전투가 같은 날에 벌어졌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다.[4]

이치전투의 시기에 대해선 여러 사서가 서로 다른 시기를 전투개시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어 콕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선조수정실록에선 웅치전투와 함께 7월 1일 기사에 실었으니 자세한 일시는 불명이나 어쨌든 7월에 일어났다고 적은 것이다. 웅치전투에 참전했고 이치전투에서 전사한 황박의 후손이 조상의 행적을 정리해 펴낸 죽봉황공유적(竹峯黃公遺蹟)에선 이치전투와 황박이 전사한 시점을 8월 28일로 기록했다. 권율의 행장과 행적을 담은 만취당실기(晩翠堂實記)에 실린 이치주첩서(梨峙奏捷書)에는 고경명과 조헌이 이미 순절했다 적어 2차 금산전투가 벌어진 8월 18일 이후의 일로 기록했다. 조익의 포저집(浦渚集)에 실린 황진행장에선 7월 10일에 이치에 도착해 공시억, 위대기, 황박과 며칠간 지키다 왜군이 공격해 오자 교전을 벌였다고 적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조에 7월 20일 왜군이 진산으로 내려와 관사를 불태우고 금산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뒤에 전라도 관군의 병력 집결 현황 등 다른 내용을 적은 뒤에 다음 기사를 실었다.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이치전투를 기록한 내용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기사를 근거로 이치 전투 개시시점을 7월 20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또한 난중잡록 기사가 전해들은 내용을 후에 모아 적은 것임을 감안해 황진행장에서 황진이 이치에 배치되었다고 기록된 7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였을 것 이라는 연구자도 있다.(곽호제,2000, 壬辰倭亂期 倭峙大捷의 意義와 再檢討 , 충남사학)[5] 하지만 이는 난중잡록에서 왜군이 진산 관아를 불살랐다는 기사와 이치전투를 연달아 벌어진 사건으로 본 것이다. 난중잡록 기사는 조경남이 체험한 것 이외의 부분은 전해듣거나 본것을 한데 몰아 적은게 많기에 진산 방화와 이치 전투도 연이은 사건이라 단언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오희문이 전란을 피해 피난하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쇄미록(瑣尾錄)에선 광주목사에서 나주목사로 전임된 권율이 7월 15일 나주에서 장수로 향하다 7월 17일 태인군에 있던 이광의 부름을 받고 그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9일 기사에 7일부로 전라도 각지의 관군이 금산성 탈환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는데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 기사에 적힌 내용이다. 작전은 중간에 중지되었으나 일부 관군은 공격을 강행해 8월 9일 금산쪽으로 나아갔다 패배, 남평현감을 비롯한 500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쇄미록은 역공에 나선 왜군을 8월 17일에 격퇴한 전투가 이치전투라 적고 있다. 이는 후대의 기록인 만취당실기와도 일치한다.

전투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권율이 이 전투 공으로 전라감사 겸 전라순찰사가 된건지 진작에 내정되어 있었던건지가 갈린다. 선조실록에서 권율이 전라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된 게 7월 22인데 실록의 해당기사는 물론 사위 이항복이 지은 권율의 유사와 묘비명, 최립이 지은 권원수행주비, 신흠이 지은 신도비명 어디에도 권율이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워 전라감사가 되었다는 대목이 없다. 권율의 전라감사 임명은 이치전투와 무관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문제는 쇄미록은 전라도 장수에 피난간 저자가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만취당실기는 전후 한참이나 지나서 편찬된 기록이다. 사료마다 내용이 달라 교차검증이 잘 안되는 상황에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웅치전투와 1차 금산전투가 끝난후에 이치전투가 벌어졌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권율이 이치전투와 상관없이 전라감사로 내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전투일자는 사료마다 기록이 달라 확정할 수가 없다.

3 전투전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웅치에서의 전투 이후 군사를 다시 이끌고 이치를 공격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이끌고 높은 산의 고개를 점거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면서 분전하였으며, 중간에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선군의 사기가 저하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권율의 독려로 결국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4 결과

정확한 사상자는 불명,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 의하면 사위인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었을때, 권율은 이 이치전투를 자신의 제일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했다고 한다. 잡아낸 적은 행주대첩이 더 많지만, 행주대첩과 다르게 이치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군비로 일본군을 몰아내어서 그렇다고.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항복, <백사집> 잡기에 수록된 권율의 말

  1.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지휘하던 병력은 몰살당했다.
  2. 이순신을 오히려 돋보이게 만들어준 칠천량 해전을 제외한 다른 대패들(쌍령 전투, 현리 전투, 본문의 용인전투)은 교과서에도 실려있지 않고, 그 인식도 부족한 편이다.
  3.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포저집계곡집, 고대일록 인명록에 언급된다.
  4. 60년대에 나온 임진전란사는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설명, 신빙성이 떨어지는 사료를 인용한 부분, 사료 자체의 부족 등으로 지금에 와선 참고자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으나 2015~6년에도 지속적으로 참고문헌으로 임진왜란 논문에 인용되고 있다. 한국 군사사 연구는 한국전을 비롯한 현대전 논의는 양질의 논문이 많은데 전근대 전쟁이나 타국 군사사는 레퍼토리 바뀌는데 십수년 걸리거나 그 세월 지나도 그대로인 부분이 많다.
  5. 고경명군과 싸우자 마자 진산으로 달려내려갔을리는 없을테니 일단 7월 10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