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

황진 장군의 유화 영전. 물론 후대의 상상화이다.무민공 황진장군 이현(이치) 대첩비

1 개요

黃進. 1550(명종 5)∼1593(선조 26). 시호는 무민(武愍)

통칭 무민공 황진. 임진왜란 당시의 무관. 임진왜란 전반기에 엄청난 공훈을 쌓은 명장. 용인전투에서 패하였으나 패잔병들을 수습해 전력을 보존하였고, 권율과 함께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방어하였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응전하다 전사하였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로 그 유명한 황희 정승의 5대손. 그 활약상만 보면 조선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나, 인지도는 안습...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1550년에 전라도 남원에서 출생해서 1576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고, 황윤길, 김성일이 일본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갔을때 함께 일본에 갔다. 직위가 직위인 만큼 아마도 호위역이었을 것이다.

무민공실기(武愍公實記)에 의하면 통신사로 따라간 시절에 일본인들이 조선 통신사의 기를 죽이려 5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워놓고 이를 쏘아 맞췄는데 황진이 그 과녁 옆에 작은 과녁을 세우고 명중시킨다음 화살 두발을 연속으로 쏘아서 새 두마리를 떨어뜨려 감탄했다고 한다.궁술로 조선인에게 도전하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일본에 갔다 온 뒤에 동복현감(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 임명되었다. 원래 황진의 성격이 호탕하여 주색을 좋아하였으나[1] , 황진도 황윤길이 예상한 바와 같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때부터 무예의 단련에 열중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진을 동복 현감으로 삼았다. 황진은 무인으로 문자는 알지 못했으나 용략(勇略)이 있었다. 그는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12월 1일 계사 1번째기사)

황진은 고상 황희의 5대손으로서 용맹 건장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엄중하고 충신하여 기절이 남보다 뛰어났다.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을 때 적의 상황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살피고는 주머니 돈을 털어 보검 한 쌍을 사가지고 돌아와 말하기를,

"머지 않아 적이 올텐데 이 칼을 써야 하겠다."
하였다. 동복 현감으로 있을 적에 집무가 파하고 나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위로 솟구치기도 하며 용맹을 익혔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기사 )

참고로 문자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정말 일자무식이면 조선시대 과거 제도상 무관 급제가 불가능하니 정말 글을 모른다는 것은 아닐테고, 문관수준으로 박식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튼 지장보다는 용장 타입인 것 맞는거 같다.

2.2 용인전투

임진왜란 당시 임지가 전라도 였는데 고작 현감에 불과해 그리 높은 직책이 아니다보니, 전라도 관찰사인 이광과 도절제사인 권율 밑에서 참전했다. 전술에 영향을 미칠 만큼 높은 직책이 아니라 그냥 패전했고, 당연히 그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와해된 삼도근왕군의 다른 병력과는 달리 휘하 병력을 온전히해서 돌아왔고, 이후 그 병력을 갖고 권율의 밑에서 이치 전투에 참전했다.

2.3 웅치, 이치 전투

이치 전투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치 전투의 날짜는 설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황진 행장에 따라 7월 10일에 병력을 이끌고 이치에 도착한 것으로 판단해 기술한다.

용인 전투에서 패배후 전라도로 돌아온 이광은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김제 군수 정담에게 웅치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정담은 황진과 나주판관 이복남, 전주만호 황박(의병장) 등과 함께 웅치에 머물며 방어 태세를 갖췄는데, 이광은 황진에게는 남원 방어를 위해 잠시 내려가라고 명했다가 다시 귀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이 사이에 웅치로 일본군이 밀어닥쳐 일본군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왔는데 이복남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정담은 부하 장수가 후퇴를 권했음에도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며 끝까지 활로 쏘며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포위돼어 전사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기사 )

여기에 전주만호 황박 역시 전사하는 격전이 이어졌으나 다행히 이복남이 남은 군사를 모아 안덕원으로 후퇴했다. 이런 대위기인 상황에 황진의 군사가 도착해 일본군을 뒤치기 공격했고 이를 격파했다.(안덕원 전투) 즉, 일본군이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안덕원을 돌파하지는 못한 것.[2] 패배한 일본군은 소양평 방면으로 도주했는데 황진은 이를 추격하여 대파시켰다. 황진은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치고개로 향했다.

권율은 황진 부대와 함께 이치 전투를 준비했다. 복병은 물론 목책을 쌓아놓았으며 마름쇠와 깃발까지 동원했다. 일본군이 이치에 도착 총을쏘며 달려들자, 황진은 부하 장수인 공시억 등과 함게 고지에서 맞서 쏴웠고 다른 부하 장수인 위대기는 복병으로 일본군을 급습했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기사)

한편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함으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릎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렇게 황진이 부상까지 당해가면서 이치 전투에 승리하고 동복으로 돌아가는데 백성들이 나와서는 "황진 장군이 아니면 전주가 어찌 무사하였겠습니까."하고 칭송했다고 한다.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일본 승 화안(和安)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황진의 공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편 이치 전투의 공로로 황진은 익산 군수(종4품)겸 전라도 조방장(전라도의 군직을 맡는 부장), 통정대부(종3품)로 승진했다.

2.4 수원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 뒤 권율이 전라도의 병사들을 데리고 북상해 수원성을 지키다가 행주로 내려가 행주대첩을 벌이는 동안, 황진은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 진을 치고 적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수원 사평에서 정탐을 하던 도중 일본군이 공격을 가해오자 주변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였는데 전방에 나가있던 황진 혼자 일본군 집단에 둘러쌓이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은 황진을 사로잡기 위해 멀리서 포위만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앞으로 돌격해 좌우로 무쌍 마구 베어 말을 빼앗아 진으로 귀환했다. 이 때의 공로로 절충장군(정3품)으로 승진했고,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가 되었다.[1]

2.5 죽산, 상주 전투

충청 병사로 승진된 황진은 휘하 병력을 안성으로 옮기고 죽주 산성(현 안성군 죽산면)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군 4000여명과 대치하여 일본군의 죽산 이북으로의 진격을 막았다. 당시 죽산은 소모사(召募使) 변이중이 1593년 1월에 자기 휘하 병력 2000명+홍계남의 병력 500 합계 2500의 병력으로 1차 공격했으나 크게 패한 상태였다. 병이중은 죽산 공격 과정에서 '복개전차대'라고 불리는 특이한 병기를 만들었는데 황소가 끄는 철갑 덮개를 씌운 수레로서 총알을 막아내는 일종의 현대의 장갑차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병기였다. 복개전차대는 안성 주민들과 천안, 아산에서 모은 소 200여마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칼을 휘두르며 마구 베자 아군이 패해 흩어졌고 불을 던져 수레를 태우니 수레 위의 군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2월 1일 병술 12번째기사 )[3]

황진은 이끌고 온 병력 천여명으로 후쿠시마군에 대해 여러차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승리했고 군량마저 탈취했다. 결국 이에 견디다 못한 후쿠시마는 안성을 공격해 황진군을 잡으려고 전군을 이끌고 죽산성에서 나왔는데, 이를 매복해 격퇴하고는 오히려 빈집이 되다시피한 죽산성을 점령했다. 이에 후쿠시마는 음죽(이천시의 남부 지역)으로 퇴각하려했으나 역시 여의치 않자 경상도 방면으로 총퇴각하였고 황진은 경상도 상주까지 계속 추격해서 이를 대파했다

죽산은 삼남지방과 한양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지세가 험난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으므로, 이미 신라때부터 성을 쌓았던 곳이었고, 후삼국시대 무렵에는 기훤의 본거지였으며, 고려 대몽항쟁 시절에는 송문주 장군이 몽골군을 격파한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당시는 이미 완전히 요새화되어 있던 곳이었다. 죽산성은 그냥 벽하나 덜렁 세워놓은 곳이 아니라, 둘레 1700m, 높이 2.5m의 성으로 험난한 산지에 본성 1.7㎞, 외성 1.5㎞, 내성 270m의 세 겹의 석성을 둘러쌓은 천혜의 요새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조선군 최후의 방어선으로 진을 친 곳이기도 하다. 인조가 남한 산성에서 항복하는 바람에 쓰이지는 못했지만

황진은 이런 곳을 4배나 많은 병력을 상대로 탈환했으니 대단한 전공으로 이 전투로 죽산과 이천의 적을 완전히 몰아냈고, 충청 부근을 지키던 일본군 활동이 봉쇄되어 군량부족으로 결국 4월에 한양에서 일본군이 퇴각하고 만다.

2.6 진주성 전투

일본군은 평양성 전투, 행주 대첩 등의 연이은 패배로 수세로 돌아서 결국 부산포로 총퇴각을 하고 만다. 그러나 일본의 장수들은 하다못해 전쟁이 고착화 되기전에 진주성이라도 함락시키려고 했다.

마침 상주까지 내려온 황진은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기로 결의를 하고 휘하 병력 700명과 함께 진주로 갔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은 거의 10만에 달해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등 다른 장수들조차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물러나고 만다.

당초 진주에 이르러서는 나아가 밖에서 지원하려고 하였는데, 김천일이 특별히 머물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는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것이 옳겠다."
하니, 황진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창의사(倡義使)와 더불어 공약(公約)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기사 )

조선 왕조 실록에 말한 '어떤 사람'은 다름 아닌 의병장 곽재우다. 실제 대화는 아마 이랬을 것이다.출처

곽재우:"장군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니 진주성 방어는 임무가 아니요. 당신 같은 중요한 사람이 왜 조정의 특별한 명령도 없는데 뻔히 죽을 곳으로 가겠다는 거요? 나랑 같이 밖에서 싸웁시다.”
황진:“이미 김천일 등과 약속을 했소. 어찌 외로운 처지에 이르러 약속을 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곽재우:“진주성의 다른 장수들은 다시 구할 수 있겠지만 당신 같은 사람을 잃는 건 정말 두렵소.”김천일: 뭐?

이 때 진주성에 들어간 병력은 창의사 김천일이 3백 명, 충청병사 황진이 7백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 의병 복수장 고종후가 4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이 1백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명이었고, 그외 진주성내의 병력이 군민이 있었다.

황진은 21부터 28일까지 진주성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5일에는 직접 의관을 벗어던지고는 백성들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고, 28일에는 적이 공격해오자 직접 지휘해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날 격퇴한 성벽 밖의 적 동향을 살펴보던 중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 병사 한명이 총을 쏘아 왼쪽 이마를 관통해 즉사했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기사 )

사후에 황진은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3 평가

보시다시피 황진은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일신의 무력도 훌륭한 장수였고 의리도 있던 장수였다. 승진 속도가 가히 빛의 속도인데 임진왜란 전에는 고작 종6품 현감[4]에 불과했으나 1년만에 종2품 충청 병마절도사[5]까지 승진했다. 오늘날로 치면 소령에서 1년만에 중장까지 승진한 셈이다.

사후 추증 된 우찬성은 종1품. 그만큼 조정에서도 황진의 공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일이다. 너무 일찍죽어서인지 활약상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인지도가 바닥.
  1. 1.0 1.1 논문 武愍公 黃進에 對한 考察 저자 정래수
  2. 징비록에는 당시 주장인 이광의 공으로만 언급되었으나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포저집과 계곡집, 고대일록 인명록에서 언급된다.
  3. 참고로 변이중은 본래 문관이지만 병기 제작에 특기가 있었는지 화차도 300량이나 만들어 권율에게 전해주어 행주대첩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를 변이중 화차라 하는데 조선 화차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4. 우리가 흔히 아는 시골사또가 보통 현감. 현대로 치면 면장
  5. 충청도의 군사총책임자. 현대로 치면 군단장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