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전투(彈琴臺之戰) | ||
날짜 | ||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 | ||
장소 | ||
조선 충청도 충주 탄금대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신립† 도순변사 변기† 조방장 김여물† 종사관 이종장† 충주 목사 이일 박안민 |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츠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
병력 | 8000~16000명 | 18000여명 |
피해 규모 | 전멸 | 불명(소수) |
결과 | ||
일본군의 승리, 한양으로의 진군. |
목차
1 개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에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탄금대에서 싸운 전투.
임진왜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떡밥.
왜 신립은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서 싸웠을까?[1]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을 결심한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평야에서 벌어졌다.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 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패전인데도 불구하고 주목 받는 이유는 임진왜란 기간을 통틀어 보기 드물게 조선군이 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야전이었던 데다가, 일정한 패턴의 공방을 주고 받는 공성전, 수성전과 달리 진법이 승부를 결정지었던 야전이기 때문. 사실상 한일 전쟁사에 드문 정규군의 대규모 회전. 게다가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결이었으며 기마+궁시 vs 장창+조총이라는 양측의 전혀 다른 병종구성도 묘미다. 여러모로 전쟁사적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그리고 조선은 졌다(...))
2 양측의 군세
조선군의 주력이었던 기마병. 조선 초기까지 제법 있었던 창기병의 비율이 상당히 줄어 이때의 기병은 대부분 궁기병이었다. 전쟁 후기에는 근접전에서의 파괴력 강화를 위해 편곤으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일본군 뎃포 아시가루(조총병). 물론 야전에서 일본군의 주력은 누가 뭐래도 야리 아시가루(장창병)였지만, 당시 조선군들이 조총의 운용을 보고 느꼈던 충격과 공포는 어마어마했다.[2] 특히나 탄금대 전투의 경우 초반에 일본군이 승기를 잡게 된 결정적 요인은 조총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의 경우 처음 일본에서 끌고 온 병력 18,700명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상륙 후 거친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에서 입은 고니시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18,000명 안팎의 병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조선군의 경우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8,000명 설과 16,000명 설이 팽팽히 맞섰으나 최근들어 16,000명 설이 힘을 받고 있다. 신립이 서울을 출발 할때 데리고 있던 직속 병력과 류성룡에게 인계받은 무사, 장정들을 합쳐 8,000여 명,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모집한 병력이 8,000여 명으로 도합 16,000명이라는 것. 사료들을 교차검증하면 나오는 결론으로서, 요즘엔 이쪽이 대세인 듯.
결국 일본군 측과 병력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으며 조선군의 경우 병력 중 절반이 기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액면상으로는 조선군이 우세한 모양새였다.
3 전투 이전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명을 받고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 김여물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싸우기를 권했지만 신립은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평원에서 싸워야 한다며 탄금대 남쪽 달천평야 일대를 전장으로 삼을 결심을 굳힌다. 이에 조선군은 달천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달천평야는 기마대가 기동력을 발휘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논이 많았고 강변 인근에는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의 습지에 가까운 질척질척한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28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단월강 북단에 있는 단월역(현재 건국대 글로컬 캠퍼스 인근)에 진입한다. 고니시는 즉시 군을 나누어 자신의 본대는 중앙을 맡아 계속 진군하였고, 소 요시토시의 좌군은 달천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마츠라 시게노부의 우군은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시킨다. 또한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이끄는 병력은 별동대를 맡아 뒤를 따르고 있었다.
4 전투경과
전투 돌입시의 포진. 조선군 기마대는 고니시의 본대를 포위하려는 형태로 반월진을 갖췄으나 고니시는 좌군과 우군을 양쪽으로 은밀히 넓게 벌려 놓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대에서 선봉 병력을 전진 시키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에 신립은 기마대 1천을 돌격시켰다. 기병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한 일본군 선봉은 곧 후퇴하였고 고니시는 단월역 방면으로 다소 물러났다. 이때까지도 조선군은 강변과 산자락에 매복한 소 요시토시의 좌군과 마츠라 시게노부의 우군을 인식하지 못했다. 바로 정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대 7천[3]이 적군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조선군 기마대는 고니시의 본대를 포위 섬멸하려는 형태로 다시금 2차 돌격을 감행한다.
소 요시토시의 좌군과 마츠라 시게노부의 우군이 양쪽에서 접근해 조선군 기마대를 조이며 조총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돌격 때와는 달리 이때 조선군은 상당히 고전을 한다. 지면의 상태가 좋지 못해 말의 기동력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피해는 더욱 컸다. 조선군 기마대는 곧 후퇴하였고, 신립은 진을 뒤로 물려 다시금 돌격을 준비한다. 이렇게 전투가 한창일 때, 아리마 등이 이끄는 별동대가 방비가 허술한 충주성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린다. 신립이 당황해서 충주성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결국 고니시의 본대를 향해 3차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군의 장창대형과 조총사격, 노다치 사무라이들의 맹공 등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당시 조선 측의 자료에 의하면, 신립의 기병은 중기병 돌격을 의미하는 치돌(馳突)이 아닌 치사(馳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치사란 궁기병의 돌격 사격을 의미한다. 원래 조선의 기병 편제에서는 충격 기병 역할을 하는 창기병이 고루 편제되어 있었지만 세조가 무반의 인사고과를 활에 치중시키게 되면서 기병들도 자연스레 경장 궁기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였다. 왜란 직후에 편찬된 무예제보에서는 "말 위에서 창을 쓰는 것은 비록 무과 시험장에선 쓰이지만 그 방도가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아 창과 칼이 버려진 무기가 된 지 이미 오래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신립의 주력 기병 또한 앞의 사례와 기록을 볼 때 궁기병으로 추정되는데, 3차에 치뤄진 기병의 돌격은 궁기병의 돌격 사격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궁기병의 마상 궁시의 유효 사거리가 짧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기병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일본군 조총병대와 화살과 총탄을 일대일로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 궁기병으로 유명했던 몽골군도 전력의 5분의 2는 중기병으로 편제했던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으로, 이러한 병과의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는 사르후 전투에서 조총병 중심의 조선군이 일본군의 입장에서 그것도 궁기병 중심의 후금군을 상대로 하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똑같은 문제로 패하게 된다.
5 조선 정규군의 토붕와해
그와중에 조용히 지나가는 가토군
승기를 잡은 고니시는 좌군, 우군과 함께 포위 진형을 유지 하며 무서운 기세로 밀고 올라오면서, 대군은 와해되었고 전투는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신립은 충주천 북쪽의 탄금대로 몰려 김여물과 함께 남은 전력을 이끌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만회하긴 역부족. 이일을 비롯한 일부 병력이 간신히 빠져 나갔지만 신립은 손수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왜군 수십 명을 죽이고 자결했다.
전투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신립 군은 전멸하였다.[5] 반면 고니시 군의 경우, 전투 직후 곧바로 한양을 향해 쾌속진군을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손실이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으로서는 (비록 패전이라 할지라도) 고니시 뿐 아니라 왜군 전체의 예봉을 꺾어, 한양 방어의 시간을 벌겠다는 최소한의 전략적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한 참담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패해도 너무 쉽게 패했다는 것(...).
한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가토 기요마사의 군 또한 근처에 있었는데 전투 현장을 우회해서 지나갔는지 아니면 뒤에서 관망했는지는 불확실 하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가토는 고니시가 전투하는 것을 보고 고니시 군대의 용맹에 감탄을 보냈다고 하며 자신도 전장의 명예를 원해 고니시에게 전장 참여를 요청했지만 고니시가 거절했다고 한다.
6 전투의 영향
탄금대 전투의 패배와 명장으로 칭송받던 신립의 죽음은 조선 조정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일본군의 진격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았으나 제승방략으로 대표되는 당시 방위체제의 근본적인 헛점이 제대로 찔린 결과 중차대한 전투가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공포에 휩싸인 조정은 한양을 포기하고 몽진을 결정한다.
7 이런저런 이야기들
탄금대에서 신립 지휘하에 참전한 병력은 8천 ~ 1만 6천 사이로 추정되며, 이는 시간에 맞춰 모인 충청도 병력과 신립이 끌고 내려간 경군의 총합 추정치이다. 원래 신립의 관직상 경군을 끌고 내려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때에는 특례로써 병력의 상당수를 차출할 수 있었다. 수정실록에 따르면 경군 8천여,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한성 주변에서 8천여[6]를 모집했다가 이를 넘겼다고 하고 있고, 정만록에는 경군 1만여를 차출해 신립에게 붙여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선조실록에는 이런 명시적인 기록이 없으며 징비록에도 정작 전투시에는 충주에서 8천여를 모았다고 하고 있고 나중 선조가 전쟁 지도 과정을 반성할 때도 신립군을 극히 소수로 다수의 적에게 무모하게 싸웠다고 하고 있어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다.
조선에 중앙군이 이 정도가 있었을 리가 있느냐 하는 사람도 있으나, 류성룡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중앙군이 2만 이상의 기병으로 이루어져있다고 기록한 것이 선조실록에 남아있으며, 또한 저 병력 파견 기록들을 보면 '도성의 무사' 나 '경군'으로 판별해 말하고 있어 신뢰도가 낮은 기록은 아니다. 즉, 충분히 한판 해볼 만한 병력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질이 문제겠지만, 기병 비율이 높고 정예병이 포함되어 있었던 걸로 보이며 완벽한 배수진이 아니었던 탄금대에서 적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반나절간 버텼던 걸 생각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조경남이 전쟁 중 자신이 접한 모든 기록과 증언을 모아 저술한 난중잡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정실록에는 신립이 이일의 패배소식에 "적의 기세가 강하니 후퇴해 한양에서 지키도록 하소서."라는 장계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는데 탄금대 전투 생존자인 신흠의 상촌집을 비롯해 거의 모든 조선측 사료에서 신립은 전투의지 만만에 적을 얕보고 있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해당 기록이 실린 난중잡록에서조차 탄금대 전투 직전의 신립 묘사는 왜군의 기세가 강하다며 경계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기사를 믿는다면 신립은 기세 좋게 자원해서 대군을 이끌고 왔다가 알아서 꼬리를 내렸으며 적의 기세가 강함을 알고도 적은 수로 적을 막을수 있는 조령을 포기한 채 제대로 된 농성전이 불가능한 한양에 방어진을 치자고 제안한 엄청나게 무능한 인간이 된다.[7]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8]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한 보고가 이르고 신립(申砬) 또한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7.1 왜 조령이 아니라 탄금대인가?
신립이 왜 하필 결전지로 지형이 험해서 방어에 유리한 조령이 아니라, 탄금대를 택했는가는 임진왜란 이후로 끊임없이 제기되던 떡밥이다.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신립이 직접 말한 것을 포함해서 논란이 다분하며, 옹호론과 반박론이 서로 치고받고 있는 상황이다.
7.1.1 기병 활용한 결전 채택설
- 일본군은 보병이고 조선군은 기병이므로 산악지대가 아닌 평지에서 싸워야 한다.
신립이 직접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립이 전장으로 선택한 탄금대는 논 등의 장애물이 많아서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는 데 제약이 많은 곳이었다. 이 말대로라면 신립은 탄금대를 전장으로 택하면서도 주변 지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기병에 중점을 두었던 이유는 이해할수 있는 부분인데, 신립은 도성에서 모아서 내려간 기병 중심의 8000병력을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병을 활용할 수 없는 조령보다는 기병을 활용할 공간이 나오는 벌판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탄금대가 어떠한 벌판인지 잘 몰랐다는 것. 어쨌든 신립은 고니시의 병력을 서둘러 격파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위해서는 주축인 기병술을 활용해야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조선의 기병은 충격력이 강한 창기병이 아니라 궁기병이 주력을 차지해 범용성은 높지만 돌격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선 전기에는 창기병과 궁기병의 비율이 1:1까지도 갔었지만 세조 때를 기점으로 궁술이 다른 무예보다 훨씬 강조되고 유지가 까다로운 창기병이 감소하여 조선군 기병 전체의 충격력이 약화됐다. 또한 실전에서의 운용이나 훈련내용을 보면 창기병 역시 여진족과의 비정규전에서 1대1로 싸우는 상황만을 상정한 것으로 보이며 정규전에서 돌격으로 보병대열을 무너뜨리는 개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이러한 궁기병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보병이 궁기병을 격파하기에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물가 등으로 몰아서 기동할 공간을 빼앗는 것이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대제가 궁기병 중심의 마자르족을 격파할 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명한 사요 강 전투가 이것과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천하의 몽골군도 배수진을 친 상태에서 헝가리군과 교전한 결과, 몽골군 특유의 기동전이 봉쇄되어 하마터면 패배할 뻔 했다.[9] 따라서 궁기병을 데리고 배수진을 친 것은 스스로의 공간을 없앤 치명적인 패착이라고 할 만하다. 가장 반박이 강한 주장이다.
7.1.2 배수진 활용설
- 조선군은 훈련도가 낮아서 배수진을 치지 않으면 열심히 싸우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이것도 신립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발언도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게,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은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 적병과 마주칠 경우의 공포감에 더 쉽게 무너지며 오히려 산악지형과 같이 지형의 이점이 있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더 잘 싸울 수 있고, 장거리 투사무기에 우위를 가지는 조선군이 백병전에 강점을 가지는 왜군에 대응하기 좋은 지형은 평야가 아닌 산악지형임이 당연하고 실제 전훈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에서 권율과 황진, 정담 등이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한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선 숫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던 조선군이 고갯길을 활용해 적을 저지해냈다. 물론 낮은 숙련도와 사기문제는 남아있어 권율이 총지휘관 신분에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도망치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병사들의 목을 치며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러나 같은 병사들이 용인 전투에서 보인 모습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우위는 분명하다. 즉, 훈련도가 낮으니까 불리한 진영인 배수진에 몰아넣어서 정신력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서 낮은 훈련도를 보충하는 게 올바른 병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립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저자에서 강제징병을 하고 원래는 체찰사 류성룡이 끌고 가기로 되어있던 군대까지 넘겨받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서울에서 8천(수정실록)~1만(정만록)가량 모아 남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도성의 무사' , 즉 왕실의 친위대인 갑사까지 이 부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즉, 적보다 수도 적었고 지역농민이 구성원이었던 권율보다 군대의 질이 낮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7.1.3 불가피 설
- 일본군의 고속진격에 병력이 채 집결하지 않아 조령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신빙성이 없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26일, 일본군이 조령을 통과해 탄금대에 돌입한 것은 28일로 이틀 정도의 여유가 존재한다. 탄금대 전투의 시간대가 조선 측 기록에서 조금씩 다르긴하나 탄금대 전투를 직접 지켜본 신흠의 상촌집과 일본측 기록의 교차검증하면 왜군의 조령 돌파와 탄금대 전투는 모두 28일에 일어났다. 조선군은 이날 아침 조령을 통과하는 일본군의 무기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파악한 다음 탄금대에 진을 첬다고 한다. 일본 측의 기록을 따르면 새벽에 출발해서 오전에 조령을 통과, 오후에 탄금대로 돌입한다.
여기에 경상좌방어사 변기가 신립이 오기 전에 조령에 배치되어 방어준비를 하다가 신립의 명에 따라 철수했음을 생각하면 조령을 방어할 시간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측 기록을 따라가면 이일과 김여물같은 휘하 장수들이 조령에 진을 치자는 건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병력의 저질화와 관련된다는 견해도 있다. 낮은 훈련도로는 조령에 진을 친다 하더라고 제때에 맞춰서 고속으로 진격하는 적을 상대할 정도의 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신립은 기병으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했을 뿐 신립 본인이 이런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병력이 준비할 틈이 없었다해도 미리 전개되어있던 변기의 병력을 철수시킬 이유는 없다. 험한 지형에 의지해 조금이라도 적에게 타격을 주거나 진격을 지체시킨다면 조선군에게 실이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전라도쪽 병력이 신립에게 합류하기 위해 이동중에 탄금대 전투가 끝나 돌아갔음을 감안하면 시간을 끈다고 신립에게 불리할 게 없었다.
7.1.4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
- 일본군의 진격로가 나누어져 있는 데다가 조령 이외의 진격로가 쉽게 뚫릴 수 있으므로, 방어작전에 시간을 끌지 않고 결전으로 고니시군을 격파한 후 일본군의 다른 부대들을 막으러 가야 했다.
일본군의 진격로는 조령 한 군데가 아닌 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진격로와 3군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진격로가 달랐으며[10], 3도순변사인 신립의 지위는 단순한 야전사령관이 아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전군을 통솔하는 위치였고, 신립의 임무가 수군이고 육군이고 모두 총동원해서 고착방어가 아닌 섬멸이므로 다른 일본군부대가 우회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립이 조령에 붙들려 있으면 다른 일본군 부대에 의해 서울까지 그대로 뚫리고 본인도 포위돼서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11][12]
현재로선 이 설이 가장 신립의 행동을 설명하는 타당한 이유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신립은 기존에 조령에 배치된 병력까지 모두 끌어모아 결전을 시도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립군은 일본군과 한양 사이에 존재하는 조선의 유일한 야전군이며, 일본군의 급속 진격에 헝클어진 남도 일대의 지상군을 수습할 권한과 역량이 있는 유일한 지휘부이다. 유일한 야전군이란 점이 중요하다. 신립이 어느 한쪽 길에서 방어전을 편다고 해도 다른 길로 한성에 일본군이 들이닥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단기결전 시도 자체는 타당성을 지닌다.
전략전술의 한국사(이상훈 교수 저)에서는 탄금대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해석한다. 현재의 탄금대는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충주 시내와 육지로 이어져 있지만 식민지 시대에만 해도 충주 시가지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육계도[13]였으며, 퇴적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을 임란 당시에는 한쪽 길로만 진입이 가능한 지역이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탄금대 자체는 일본군이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충주는 달랐다. 일본군이 한양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간 중간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점령해 나아가야 했는데, 충주도 그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다. 충주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소백산맥 이북의 진군이 어려워지므로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게 견제할 수 있는 요혜지로 의미가 있다는 것.
이상훈 교수의 주장은 "탄금대는 삼면이 강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동쪽의 진입로만 막으면 됐고, 봄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어 조선의 원거리 발사 무기에 유리했"으며, "또 가파른 조령에서는 조선의 주력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고, 왜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돼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탄금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파할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넘길 수 있지만 규모도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고(최대 1만 6천) 기병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가는 조선군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고니시군과 신립군의 전력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일본군이 우월한 전력이었다는 주장은 전투의 결과에서 유추한 결과론적 입장에 가깝다.[14] 이일 등 일본군과 교전경험이 있는 장수들은 신립의 작전이 무모하다고 지적했으나 탄금대 전투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사단규모 부대의 야전을 치른 적이 없다.
다만 가장 합리적인 이유이긴 한데 문제는 정작 신립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기록이 없다. 이 주장이 성립되려면 신립이 왜군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당시 조선의 조정과 장수들이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매우 불확실하다. 조선 측 어느 기록을 봐도 신립이나 다른 장수들이 당장 눈 앞에 있는 고니시 군 이외에는 신경 쓴 흔적이 없다. 신립에게 이 같은 복안이 있다면 반대 주장에 대해서 상기의 이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게 마땅하지만 딱히 반박이 없다.
어차피 구로다군의 북상루트도 멀지 않았고 고니시와 가토는 같은 날 공통적으로 조령을 통과했다. 조령의 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도 방어가 가능하니 적의 우회가 걱정된다면 병력을 분산시켜 다른 길목을 막는 방법도 있다. 추풍령까진 무리지만 죽령 정도는 충분히 방어군 배치가 가능했고 휘하엔 군사적 식견이 뛰어난 김여물과 왜군과 야전을 벌여본 이일도 있었다.
7.1.5 조령 무용론
-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우회로가 많은 조령은 무용이다.
위의 전선 유지설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이론. 유사역사학자 이희진이 주장하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조령에만 길이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충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특히 죽령이나 계립령(하늘재)는 그리 멀지도 않는 거리에 있었는데 계립령은 비록 고갯길이라고는 하나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며 그 비중이 축소되었다곤 하나 왜군이 모를리 없는 곳. 게다가 고니시가 위치한 문경새재는 여러 곳으로 통하는 나들목 같은 곳으로 여차하면 이화령-과산으로 충주를 거치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단순히 조령만 막기에는 큰 위험부담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신립이 조령을 막고 일본군이 조령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일본군이 다른 위회로로 우회해버리면 조령은 포위가 되는 형국이 된다.[15] 방어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 만약 조령을 방어기지로 삼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포위되어도 구원해 줄 예비군, 둘째는 충분한 물자였다. 하지만 이 패배로 그런 예비군은 사실상 날아가 버렸고 신립의 입장에선 유일한 야전군인 자신이 혹여 포위라도 되면 더 이상 남아있는 조선군은 없게 되고 한양까지 위급해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군대를 나누어 각 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물자가 부족한 마당에 쪼개어진 군대가 연속해서 격파될 위험이 있다. 결국 신립은 포위의 위험성이 있는 조령보다는 포위섬멸이 가능한 단천평야를 택했고 이 도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게 이희진의 주장이다.
허나 이 주장에 대한 논박은 이미 여러 차례 나왔다. 조령, 죽령, 하늘재, 이화령 같은 이곳 고개길들에 대한 현장답사를 제대로 한 건지 의심스런 주장이다. 이 주변 샛길들은 모두 일렬로 행군하지 않으면 통과도 힘든 첩첩산중 외길이다. 신립군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8천이다. 이틀이나 여유가 있었고 조령을 비롯한 고갯길들은 모두 적은 병력으로 방어가 가능한 만큼 추풍령까진 무리라도 거리상 가까운 죽령이나 계립령(하늘재) 정도는 방어병력 배치가 가능했다. 또한 문경 새재를 지나도 충주까진 계속 산길이 이어진다. 그 산길 다 버리고(원래있던 변기의 병력까지 빼버리고) 탄금대에 진을 쳤다. 또한 왜군의 우회가능성에 그렇게 신경을 쓴 사람이 왜군이 근접했다고 보고한 군관을 죽여버렸을까? 고니시와 가토는 비슷한 시각에 조령을 통과했으며 전라도 지방병은 신립군이 너무 빨리 궤멸되는 바람에 합류도 못했다. 조금만 버티면 예비병력은 알아서 충원되게 되어 있었다.[16][17]
7.1.6 신립의 자질부족설
- 그냥 신립이 오만하고 무능해 오판했던거다.
북방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고 조선최고의 무장으로 우대받은 신립이지만 실상 지휘관으로서 능력은 죽을 때까지 검증된 바 없다. 일단 명성에 비해 기록도 적고 제승방략과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여지는 신립의 전공은 철저히 신립 개인의 무예와 용맹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의 지휘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은 없다. 신립의 무명을 있게 한 1583년 니탕개의 난 토벌 기록조차 그렇다.
1583년 초 안원보 전투에선 도망병 1명을 참수하고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재정비하긴 했으나 여진족의 약탈자체를 막진 못했다. 이해 봄에 벌어진 경원진 전투에선 백마를 탄 적장을 한 방에 사살해 적을 물러가게 했으나 그외에는 죽을 힘을 대해 싸웠다는 대목뿐이다. 신립이 가장 빛났던 전투는 역시 봄에 벌어진 훈융진 전투인데 여진 기병 1만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추장 1명을 사살하고 후퇴하는 여진족을 추적해 7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기록상 신립이 천하의 명궁에 기마술이 대단했다는 건 알 수 있어도 전술적인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름에 치뤄진 종성진 전투에선 여진기병 주력이 이미 철수한 상황에서 구원병으로 도착해 적 2명을 참수한 게 전부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강물에 뛰어들기 전까지 김여물과 함께 적 수십 명을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싸움은 엄청 잘했던 거 같지만 전략전술적 역량은 전혀 검증된 바 없다. 니탕개의 난 때 준동한 여진족은 규모는 상당했지만 어디까지나 약탈을 위해 움직였다. 최대 1~2만 정도로 뭉쳐 소규모로 분산 배치된 조선군 방어진지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약탈을 하지 못해도 조선군 지원병력이 도착하거나 조선군의 저항이 완강하면 큰 고민없이 물러났다. 즉, 내부통일을 이뤄 국가단위로 성장한 누르하치 시절과 비교하면 수준히 현격히 낮았다.
무예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기록도 없는데 성격은 또 굉장히 거칠고 오만했다.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선조수정실록에선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왜군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미친 소리라며 죽여버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식 보고절차도 없이 동네방네 왜군이 온다 퍼뜨리던 농민을 하루 기다려 처형한 이 일은 어쨌든 그 농민이 장담한 하루의 시간 동안은 기다려 주었고 당시 이일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엄격한 전근대 군법을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지만 신립에게 죽은 군관은 정식으로 보고절차를 거쳤음이 분명하기에 어떻게 변호할 여지가 없다. 또한 그는 왜군을 대놓고 얕잡아 보았고 군 경력으로 선배이자 상주에서 왜군의 전술과 규모를 파악했던 이일의 조언을 대놓고 무시했다. 이일이 북도 제승방략을 정리한 인물이자 신립처럼 여진기병과의 전투에서 무명을 쌓은 인물이란 점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결코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니었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을 체계화하며 군사이론가로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왜란 당시에도 왜군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거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맞았다. 이에 반해 신립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지원을 받아 병력도 비교적 충실했고 조령이란 험지를 방어거점으로 활용할 시간이 이틀이나 주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일에게서 왜군의 전투방식에 대한 정보까진 전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이점을 무시했다. 험준한 조령을 포기하고 기병을 운용하기 힘든 탄금대를 회전 장소로 골랐고 이일과 김여물의 조언도 무시했다. 전투 직전 왜군의 동향에 대해 보고한 장교를 보고 내용이 마음에 안든다고 죽여버린데서 알 수 있듯 신립은 용맹하긴하나 이성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군대가 한양과 왜군 사이의 유일한 야전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얼마나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는지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종합해보면 신립은 일신의 무예 외에 제대로 된 지휘능력을 보여줬다는 기록은 신립을 호의적으로 적은 사료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인격면에선 안하무인에 부하들에겐 막되먹은 상관이었다. 여기에 왕의 사돈(당시까지 계승이 유력하던 신성군의 장인) + 상방검이 더해지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고 하면 왜군을 깔보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와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된 신립에 대한 비판은 실전을 모르는 유생들의 입놀림이 아니었다. 당시는 철도, 고속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남에서 도보로 서울로 이동하거나 서울에서 영남으로 이동할 때 자연스럽게 조령의 험준한 고갯길을 직접 체험해야 했다. 이 험한 고갯길을 넘어가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탄금대보다 조령 고갯길이 방어하기 훨씬 좋은 지형이라는 건 몸으로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위에서 충주가 요충지라 했는데 신립은 충주성조차 버렸다.[18]
8 여담
-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고위 장수 1명이 생포되었는데 스스로 죽기를 원하여 죽게 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일은 달아났고 신립과 김여물은 투신했으므로 이종장이나 이희립일 가능성이 높다.
- 이형석 장군의 《임진전란사》에서는 신립이 기병돌격을 세 차례 하여 여러 번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단지 여러 차례 돌격을 시도하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점만이 여러 1차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할 만한 글.
- 신립의 행동이 너무나 이해가 안 된 탓에 조선시대에는 "신립이 귀신에 홀렸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임진록의 어떤 판본에서는 신립이 이전에 죽인 자의 원혼이 양민으로 가장하여 신립에게 거짓 정보를 고한 탓에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어느 야담(野談)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립을 사모하던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르고 분신자살한 후 원혼이 되어 따라다니는 것을, 장인인 권율이 유리병에 봉인해 호신부(護身符)로 지니고 다니라고 주었다. 그러나 결전 직전의 작전회의 중 이 유리병의 마개가 뽑히며 '탄금대로, 탄금대로'란 원혼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리는 것을 신립이 하늘의 뜻으로 오해하여,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쳐 장렬히 전사했다는 이야기다.(이우혁의 왜란종결자도 이 쪽이다). 조령을 지키는 관문인 문경새재가 있는 경상북도 문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토착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종전 이후 나온 소설 달천몽유록에선 많은 군졸을 개죽음시킨 졸장 신립을 명장이랍시고 기린다며 귀신들이 한탄하는 묘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 징비록(드라마)의 방영 여파인지 탄금대 전투에 시비를 거는 국까들이 많아지고 징비록 갤에서도 난리를 피고 있다.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탄금대 전투 문서가 반달당하기까지 했다. 링크나 정황으로 봐서 반달의 장본인은 책사풍후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가열차게 시비를 거는 역갤러라면 특히 책사풍후가 두드러지기 때문.
당시 디시인사이드에서 아무도 관심없는 탄금대 전투 만화만 줄창 올려대기도 했었다. 조회수는 글쎄;; 댓글은 0
- 정유재란 당시에 일어난 직산 전투와는 적잖은 공통점이 있는 전투로, 당시 임진,정유란 초기 단계에 각각 부산진 전투와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임진왜란), 남원성 전투(정유재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압도적인 기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가진 전투라는 점, 평야 지대에서 (아군이)다수의 기병대를 운용하여 벌인 일대 회전이라는 점 등이 같다 하겠다. 차이점이라면 아군으로서 전투의 주체가 각각 신립 이하의 조선군과 해생 이하의 명나라 군대라는 점과 무엇보다 신립은 왜군의 북상 저지라는 목적달성에 실패하였고, 해생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9 대중매체
전쟁 초, 조선군 최정예 부대의 괴멸과 함께 보병과 기병, 조총과 활이라는 세기의 대결답게 중요하게 다룬다.
9.1 불멸의 이순신
(조령이 텅 비었다는 보고를 듣고) "그런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 소 요시토시(바로 다음 장면) "조령은, 버린다" - 신립
그 바보 멍청이가 바로 여기 있었다 조선군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57화에 약 10분에 걸쳐서 다루어진다. 김여물을 포함하여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마군이 보병보다 더 큰 우위에 있음을 상기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치를 것을 결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부하 장수에게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형을 내린다. 그래도 밤새 혼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곤장맞은 그 부하 장수에게 와서 병사의 절반이 오합지졸이란 점과 함께 배수의 진을 치는 이유에 대해 변명한다 말한다.
그 직후 6분에 걸친 전투 장면이 나오는데, 돌격하는 일본군 선봉대를 활로 무찌른 후 100보 앞까지만 진격하란 명을 받고 돌격하는 두 번째 일본군 부대를 향해 기병대가 나선다. 그러나 기병들은 곧 늪을 만났고 말들이 늪에 빠지면서 기병은 조총의 표적이 되어 허무하게 리타이어... 이를 본 신립은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나 이들 역시 조총사격으로 괴멸당한다.
신립은 생포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강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으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며, 신립을 생포하라고 명을 내린 고니시가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의 명장을 사무라이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고 ㅎㄷㄷ한 대사를 내밷는다. 마지막에 자살하는 장면은 굉장히 비장미가 넘치게 다루어졌다는 게 위안(....)
9.2 징비록(드라마)
징비록(드라마)에서 14화의 말미와 15화에 걸쳐 다룬다. 14화 말미에서 상주에서 패한 이일은 신립에 합류하며 조령에서 충주로 진을 옮긴 이유를 묻는다. 이에 신립은 처음엔 조령에서 진을 쳤으나 상주의 패전소식을 접하고 충주로 진을 옮겼다고 한다.
이런 결정에 대해서 이일이 조총의 위력을 말했지만 신립은 활이 가지고 있는 사거리의 우위와 조총의 장전 시간을 지적하며 승산이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이에 이일은 장전시간을 상회하는 일본군의 전술 운용을 언급하면서 조령으로 다시 진을 옮기자고 권유한다. 이에 신립의 부장인 김여물도 이일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신립은 거기에 추가적으로 남하하면서 모은 지방군의 열악한 훈련 상태, 다시 조령으로 진군할 시의 시간적 문제, 적이 조령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한양으로 반드시 거치는 길목인 탄금대에서의 야전결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가히 설명충 스피드왜건의 수준이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군과 일본군은 탄금대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에 맞서는 고니시는 이제야 제대로 된 전투를 한다며 좋아하면서 병력을 나눠 중앙과 좌우에서 협공을 하기로 한다. 한편, 신립은 이를 예상하며 말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 조총 사격으로 날라오는 총탄을 최대한 피하며 전진한 뒤 조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화살을 쏘아 적의 전열을 더욱 분산시켜 공격을 한다는 계획과 함께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조선전체의 사기 향상을 위해 한 바탕 결전이 필요하다며 탄금대를 전장으로 정한 이유를 추가로 말하고 패전을 할지라도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한강방어선 정비의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한다.[19]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고 고니시군이 돌격하기 시작하자 기병들과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고니시군을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측면에 대기하던 요시토시군의 조총사격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장면은 조선군이 전멸하고 신립과 김여물만 남아 강변 절벽으로 몰린 장면이다. 뜬금 전멸 수십 명의 일본군들을 베어버리던 신립은 자신을 지켜보는 고니시를 향해 정정당당하게 장수들끼리 싸우자고 하지만 고니시는 아무 말 없이 비웃기만 하며 조총대에 사격을 명한다. 결국 신립과 김여물은 조총이 발사되기 직전 절벽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평가를 하자면 불멸의 이순신 이후 10년 만에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대하드라마로서의 이름값이 아까운 총체적 난국 열심히 연기했을 배우들만 고생이다 임진왜란의 전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투인데도, 퀄리티나 고증이나 모두 엉망이다.
징비록에서의 전투묘사는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매우 빈약하였다. 들판에 모인 양측 병사들의 규모는 잘 묘사되었는데, 비장한 돌격을 시작하고, 다음 장면이 곧바로 전멸 장면이니(…). 사실 2회 앞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의 연출[20]이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탄금대 전투에 시청자들이 거는 기대가 은근히 컸기에, 실망감이 더 커진 면도 있다. 물론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반의 반도 안 되는 예산(110여 억 원)이 제일 큰 한계였지만[21], 각 전투별 퀄리티 배분을 못 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역사왜곡 문제에 있다. 전투 직후의 전장을 비추면서, 나레이션을 통해 탄금대 전투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고니시 군의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는 설명을 넣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고니시("이기긴 했으나 손실이 너무 컸어.")와 가토(고니시 군의 손실을 비웃는다)의 대사를 통해 이를 확인해 주기까지 한다. 무비판적으로 시청할 경우 낚이기 쉬운 연출이다.
나레이션을 통해 고니시의 군이 탄금대 전투를 통해 많은 손실이 있었기에 한양까지 진군한 후 주저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고대~현대를 막론하고 부대원의 30% 이상이 사상자가 되어 버리면 그 부대는 전멸이다.[22] 하물며 나레이션대로 사상자가 태반에 이르렀다면 고니시 군은 충주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고니시와 가토의 한양쟁탈 속도전 같은 정치적 배경 이전에, 물리적으로 더 이상의 진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의 고니시 군은 탄금대 전투 직후 쾌속진군을 개시하였고, 이는 탄금대 전투에서의 손실이 경미하거나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고니시 군의 병력이 처음의 절반 이하인 8000여 명으로 줄어드는 건 그 다음 해인 1593년,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쫓겨 난 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신립이 적의 병력이 우리보다 더 우세하니 병력을 나눌 것이고 그게 우리한테 유리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실제 역사상의 전투에서는 적이 병력을 나눈 것을 몰랐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신립이 대패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적 본대를 상대하던 중 갑툭튀한 일본 좌우군의 조총 연사다. 징비록의 신립은 적이 철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고 적의 본대가 나뉘었을 거라고 돌아가는 모든 전황을 상세히 다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발리는 격. 또한 탄금대에서 네 차례에 걸쳐 일본군의 돌격을 모두 격퇴했다는 내용도 실제 기록상으로는 없다.
여담이지만 14화의 막바지에 고니시의 일본군 제 1군과 신립의 조선군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거의 풀버전으로 나온다.
10 전설
곤지암과 관련된 곤지암의 회자되는 전설로는 나중에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 오죽했으면 신립이 귀신에 홀려서 탄금대에 진을 쳤다는 전설까지 있다(...).
- ↑ 조총 자체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군도 사용한 무기이지만, 전국시대를 거치며 정교하게 정립된 왜군의 조총 운용법은 조선군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 프로이스에 따르면 부산과 동래에서 100명 전사, 400명 부상으로 5백 가량이 줄어 있었다.
- ↑ 장수가 쓴 고깔모자와 깃발의 문장을 보면 가토군인데, 내용을 보다시피 가토는 전투에 참여치 않고 구경만 하고 지나갔다.
- ↑ 전멸의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이것이 절대로 전원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군에서는 부대가 전투능력을 상실했을 때, 전멸이라고 표현한다.
- ↑ 근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징비록에는 서울에서 비장 80명을 선발해 신립에게 넘겼고, 신립이 충주에서 모은 병력이 8천이라고 되어 있으며 8천 명은 수정실록의 내용이다. 서애집의 자문에서도 이일이 데려간 군관이 50, 신립이 데려간 군관이 80이라고 되어 있으니 의문의 여지도 없는 편. 심지어 니탕개의 난에서도 선조실록은 용사 80명을 보냈다고 하고 수정실록은 8천 명을 보냈다고 하니 두 기록 사이에 차이가 크다. 과연 80(八十)이 8천(八千)의 오기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부분. 오히려 수정실록의 기록이 오독일지도 모른다.
- ↑ 농담아니라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기가 통제사가 되면 부산으로 출병하겠다며 큰소리 쳐놓고 나중에는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 원균과 똑같은 소리다.
- ↑ 김명원(金命元)을 말한다.
- ↑ 흔히 몽골군의 유럽 원정이 낙승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요 강 전투는 몽골군의 전열이 분쇄될 뻔 하여 바투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야했고 바투의 참모진과 친위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다만 결과적으로 사요 강 전투는 수부타이가 별동대로 도강에 성공하여 헝가리군의 배후를 찌르면서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 ↑ 중간 목적지는 서울이였으나 상륙 날짜와 여기로 가는 루트는 저마다 달랐다. 구로다 군의 상륙지는 김해였다.
- ↑ 게다가 이 시기의 조령은 방어시설이 제대로 완비되지 않은 상태라 식량이나 식수같은 장기전에 대비하기위해 꼭 필요한 수단들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 ↑ 이렇게 한 곳이 빨리 뚫렸을 경우의 약점은 6.25 전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강원도 방면의 국군이 북한군을 비교적 수월하게 막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서쪽 지역의 상황이 개막장이라 강원도 방면에 있던 부대들은 포위+전멸을 막기 위해 남쪽으로 후퇴한다. 그래도 UN군이 파견되기까지의 시간은 벌어주었다.
- ↑ 모래 둔덕으로 육지와 연결된 섬.
- ↑ 일본군이 조총부대인 걸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일본군 내에서 조총의 비율은 결코 높지 않았고, 제국주의시대 수준의 병종적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병기적 우위는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 시대 조총은 활보다 훈련기간이 짧아서 애용되었을 뿐이지 딱히 활에 비해 우월한점이 있는것도 아니았다. 하나 있다면 갑옷을 활보다 잘 뚫는다는 건데, 조선군이 딱히 서양 기사들처럼 중장갑으로 떡칠한 병력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집단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장점 역시 임진왜란에선 별 소용없었다.
- ↑ 이렇게 패한 전례가 있긴하다. 밀양 부사 박진이 황산잔도를 방어할때 왜군은 병력을 분산해 한쪽이 박진군과 정면에서 싸우고 다른쪽은 산을 우회해 박진군의 후방을 쳐 와해시켰다.
- ↑ 다만 전라도 지방병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신립이 알았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 ↑ 전선 유지설을 주장한 이상훈 교수의 경우, 신립의 탄금대 선택은 옳았으나 고니시군을 빨리 퇴치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탄금대를 버리고 나와 포위 섬멸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 ↑ 다만 충주성 역시 쉽게 포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탄금대보다 최적이 아니라는 시각은 엄존한다. 이상훈 교수의 경우 충주성의 경우 포위될 수 있는 반면, 탄금대는 후방의 수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원군 + 근왕군이 올 수 있으므로 장기간 주둔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 ↑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를 이야기다. 정예병력의 다수를 이끌고 내려간 중앙군의 장수가 승리를 위한 작전계획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패전부터 염두에 둔 작전계획을 제시한 게 첫째 문제이고, 둘째는 문경새제를 막더라도 다른 곳이 뚫리면 한양이 위험하기에 결전에 임해 적의 격파를 해야 한다고 했던(일종의 각개격파의 개념에 가깝다) 전의 이야기와 상충되는 이야기이다.
- ↑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선의 병사들까지 세심하게 다룬 디테일, 조총사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조선군을 비추는 긴박한 앵글과 저속촬영 기법, 그리고 정발 장군 이하 부산진성 관민들의 눈물겨운 처절한 저항까지 고루 비춘 에피소드였다.
- ↑ 다만 불멸 역시 육전보단 해전 묘사에 더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육지에서의 전투는 해상에서의 전투에 비해 좀 설렁설렁 넘기는 분위기가 있었고 스케일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연히 예산도 해전에 비해서는 좀 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징비록은 방영시간 50분에 50부작으로 방영시간 1시간에 100부가 넘었던 불멸의 절반 분량밖에 안 된다.
- ↑ 단순히 30%가 줄어든 이상으로, 부대의 인적/물적 손실 정비를 위해 나머지 70%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부대정비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부대는 당연히 행군/전투 등 모든 전술행동이 불가능한 전력 외 이탈 부대가 되며, 그래서 '전멸'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