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미록

1 개요

瑣尾錄. 조선시대 평범한 선비였던[1] 오희문(吳希文)이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동안 피난길에 올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9년 3개월간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 피란일기. 총 7책.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피란일기로 꼽히며,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시기 3대 사찬 사서로도 꼽힌다. 대한민국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구성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선조 24년, 1591년 11월 27일부터 전쟁의 폐해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사회가 안정되어 가던 1601년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간 피난하면서 겪었던 갖은 어려움을 거의 매일매일 기록한 일기이다.

내용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여러 일기로 나누고 있다. 자세한 구성은 다음과 같다.

  • 1) 임진남행일록 : 신묘년(1591) 11월 ~ 임진년(1592) 6월
  • 2) 임진일록 : 임진년(1592) 7월 ~ 동년해 12월
  • 3) 계사일록 : 계사년(1593) 1월 ~ 동년해 12월
  • 4) 갑오일록 : 갑오년(1594) 1월 ~ 동년해 12월
  • 5) 을미일록 : 을미년(1595) 1월 ~ 동년해 12월
  • 6) 병신일록 : 병신년(1596) 1월 ~ 동년해 12월
  • 7) 정유일록 : 정유년(1597) 1월 ~ 동년해 12월
  • 8) 무술일록 : 무술년(1598) 1월 ~ 동년해 12월
  • 9) 기해일록 : 기해년(1599) 1월 ~ 동년해 12월
  • 10) 경자일록 : 경자년(1600) 1월 ~동년해 12월
  • 11) 신축일록 : 신축년(1601) 1월 ~ 동년해 12월

구체적인 작성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은 임진남행일록은 후에 작성된 것으로 즉, 선조 24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이듬해 1592년 6월 28일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들은 거의 모두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예외적으로 1593년 1월 14일부터 동년 3월말까지 45일간은 저자인 오희문이 전염병으로 앓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日錄)들은 거의 모두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방대한 양의 일기이다.

3 내용

저자인 오희문은 외거노비의 신공을 받으러 한양을 떠나 1592년 7월 1일에 전라도 장수현에서 머물고 있다가 밀려오는 왜군을 피하여 장수아속(長水衙屬)과 함께 영취산(靈鷲山)의 석천사로 피난하게 되었으며, 이후 십여 년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1601년 2월 27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일기를 썼다.

이에 따라 오희문과 그의 가족이 전라도 장수와 충청도 홍주,임천, 아산 및 강원도 평강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사건들이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쟁이 발발했던 때에 그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노모를 모시러 전라도 영암과 태안에 다녀오면서 그가 보고 느꼈던 전쟁 중 사회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저자의 처남과 사위 및 아들(오윤겸) 등을 비롯한 친지들이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방문하여 들은 각 지방 고을의 현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쇄미록은 피란일기인 동시에 일상생활일기로 전쟁상황 묘사를 제외한 일상생활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 또한 많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제사를 지낸 방법,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 그외 각종 교환경제, 물품수수 등의 모습, 각종 오락과 여가생활 등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다.

오희문은 고통스러운 피란 와중에도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각별히 지냈는데, 쇄미록에 나오는 각 해 마다 제사를 지낸 횟수는 1595년 17회, 1596년 22회, 1597년 20회, 1598년 28회, 1599년 24회, 1600년 24회 등이다. 주로 삭망례(朔望禮), 천신례(薦新禮), 기타 기제와 다례, 시제(時祭) 등을 지냈으며, 형편이 힘들어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어 반갱(飯羹)만으로 예를 올리기도 했고,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제물을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제사를 지내려 한 이유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어줄 사람이 당시 오희문 외에는 없었고, 종손까지 죽어서 달리 제사 지낼 사람도 없었으며, 겨우 종손의 아우가 살아남아 있었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를 염려하였기 때문으로, 1600년에 오충일의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를 멈추게 된다. 이에 따라 쇄미록에는 1500년대 후기 우리나라의 제사 예식과 준비과정, 차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남겨졌다. 또한 집안 노비들이 전란의 혼란을 틈타 달아난 일을 기록하며 분노하면서도 피란 중에 죽은 노비들은 없는 살림을 털어서라도 장례를 치뤄주려고 노력하는 등 조선 중기 노비제도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쇄미록에는 피란기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여러 여가생활 모습도 남겨져 있다. 주로 중정도와 바둑, 장기와 쌍륙 등이었다. 갑오일록 1월 5일자 일기에는 "‘정경도를 던져 승부 내기해서 종일 놀았다"는 내용이 있으며, 임진일록 11월 19일자 일기에는 "마을의 여러 소년들이 다 모여서 종정도를 노는데 맨 끝에 있는 자는 먹으로 두 눈을 그려서 웃음의 자료로 삼았다"라는 내용도 있다. 계사일록 8월 7일에는 "이른 아침에 아우와 함께 절에 올라가서 제공(諸公)과 함께 두부를 먹고 혹 바둑도 두고 혹 종정도를 놀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라고 나와 있으며, 계사일록 7월 22에는 "저녁때까지 요월당에 있는데 마을의 젊은이와 어른이 다 모여서 혹은 바둑을 두고, 혹은 종정도도 놀고, 혹은 장기도 두고, 쌍륙도 놀아 즐기면서 긴 해를 보냈다" 라고 기록하였다.

반면 전쟁기의 끔찍한 기록들도 많이 남겨져 있는데 걸식자나 굶어 죽은 사람에 대한 내용,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기록, 전란으로 인한 피란민들의 고통스러운 삶, 군사 징발과 군량 조달로 인한 백성들의 몰락, 처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한 아버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면서 우는 아이, 유행병과 배고픔으로 인해 떼죽음당한 사람들, 왜군의 잔인한 살인·방화·약탈·강간 행위들, 명군의 무지한 약탈과 행패 등의 내용이 많이 나와 당시의 처참한 상황 또한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1500년대 말 우리나라의 문화와 여러 일상 생활에 대한 내용, 그리고 유래 없는 국난에 일반 백성들이 겪었던 비참한 생활 등을 직접 목격자가 세세히 글로 남긴 1차 사료이다.

4 번역

2014년 10월 16일에 한국고전번역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이민수가 번역을 완료하여 두 권의 책으로 나왔다.네이버 책 : 쇄미록 세트

5 바깥고리

6 보물 제1096호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사태, 군대징발, 군량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1. 본인은 평범한 선비였지만 아들 오윤겸은 이후 재상의 자리에 올라 명재상으로 칭송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