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春吉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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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고구려의 관리. 기록에 의하면 청주인으로 후고구려의 순군부에서 이직(吏職)의 자리에 있던 자였다. 그랬다가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 태조 1년 9월, 같은 청주출신인 배총규와 계천(오늘날의 전남 장흥) 출신인 강길, 아차귀, 매곡(오늘날의 충남 회인) 출신인 경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복지겸에 의해 이 반란이 발각되어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같은 청주인인 순군낭중 현율이 경종의 매형이 매 곡성주 공직이기 때문에 이들을 죽이면 공직과 청주 쪽이 동요할지도 모른다면서 살려줄것을 왕건에게 청했으나, 염상의 강력한 반대로 이들은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명확치는 않지만 왕건에게 불만을 품은 탓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궁예는 904년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청주인 1,000가구를 철원으로 이주 시켰는데, 이는 궁예가 청주세력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기 위해서 였다는 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그런데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면서 패서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자 청주세력의 위기감이 반란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해석이다.
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태조 왕건에서는 故 조재훈이 연기했는데, 아지태와 같은 청주사람으로 궁예가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을 때부터 군부에 출사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나온다. 아지태가 궁예의 장인인 강장자와 함께 역모를 꾸몄을 때 협조를 했지만, 역모가 발각된 뒤엔 왕건의 선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자신을 찾아온 승려 도우[1]의 꾐에 빠져 왕건을 여러 차례 궁지로 몰지만, 결국 왕건은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왕건은 임춘길을 다시 한 번 용서했으나 청주에서 일어난 선장형제의 반란에[2] 내통했다가 들키면서 이번엔 가차없이 처형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