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수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1514 ~ 1547)으로, 호는 금호(錦湖). 1536년인 중종 21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1545년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서를 지내고 사가독서의 특전을 누렸다. 그 후에 부제학까지 올랐지만 명종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윤원형에게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그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대윤파 윤임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 된 뒤에 사사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평범한 문신같아 보이지만 의외로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일화를 많이 남긴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일화

어느날, 임형수의 친구가 신선을 만나보고 싶다고 탄식했다. 그 후 그 친구는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신선을 만났고 신선이 주는 사슴고기와 술까지 마시고 돌아왔다며 임형수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임형수 왈 "그 신선은 나였네."

깜짝 놀란 친구가 그럼 사슴고기와 술은 뭐였냐고 묻자 다시 임형수 왈
"그건 육포와 내 오줌일세."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 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주고 였다. 두주불사의 주량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

임형수가 제주 목사로 가던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났다. 배에 탄 사람중 승려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했고 그 밖에 사람들도 각자 신령에게 빌자 뻘줌했던 임형수는 갑자기

"이중탕! 이중탕!" 이라고 외쳤다.
배가 풍랑을 헤치고 겨우 제주도에 도착한 후 배에 탄 사람중 한 사람이 임형수에게 왜 이중탕을 외쳤느냐고 묻자 그가 말하길
"배가 아플때는 이중탕이 특효라서 말이지."[1]

임형수가 윤원형에게 미움을 사 마침내 사사 명령을 받고 금부도사가 그의 고향집에 도착해 사약이 든 약사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임형수는 "조정에서 스스로 죽으라고 하였으니 하필 거북한 약을 먹을 것도 없지 않는가. 차라리 목졸라 죽도록 허락해달라"라고 하여 금부도사가 허락했다.[2] 그러자 임형수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구멍을 뚫고 나졸로 하여금 밖에서 잡아 당기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기척이 없어서 나졸이 들어가보니 베개 하나가 벽에 붙어있고 임형수는 한쪽 구석에 편히 누워있다가 무릎을 치고 웃었다.[3]
사약을 먹기 전에 그는 전 어린 아들인 임구를 보면서 생전 글일랑 읽지 말고, 과거도 보지 마라 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생을 마감한 것도 있어 평생 글을 익히지 않다가 아버지의 누명이 풀리면서 무과에 급제해 현감으로 임명되었는데, 글을 배우지 않았으니 관직 생활이 평탄할리가 없었다. 어느 때는 감영에서 詩賦(시와 글)을 권장하라고 문서를 보냈는데, 주워들은 글솜씨로 賦(구실 부)자를 賊(도적 적)자로 잘못 보고 도적이 나타났다면서 집결나팔을 불어 병졸들을 집결시키는 난리를 피우다가 해산나팔을 불어 해산시키는 소동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무과에 급제한 실력답게 양손으로 말 다리를 잡아 들어올려 편자를 박는 엄청난 용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뭐라고? 한 때 이웃 현감이 이 때 방문해 여기는 현감이 말편자를 박는 일을 하냐고 묻자 그는 부끄러워서 말을 들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었다.
1547년 9월 21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4]

위에 언급한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마치고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하였다. 또한 어떤 이가 집안에 들어가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형수는 나는 마땅히 천지(天地)의 신기(神祗)가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 가서 죽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이 양반, 용케도 34년을 살아남았다

3 그 외

임형수는 젊은 시절의 퇴계 이황과 친하게 지냈다. 샌님 스타일인 이황에 비해 선비답지 않게 대범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 어느날 임형수는 이황에게 남자의 멋지고 장한 일을 알려주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서며, 긴 바람이 일어나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활을 힘껏 잡아 당겨 쏘아 죽이고, 말에서 내려 칼을 빼서 이놈을 잡고, 고목을 베어 불을 놓고 기다란 꼬챙이에다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지글 지글 끓으면서 뚝뚝 떨어지는데, 걸상에 걸터앉아 저며 먹으며, 곧은 대접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고,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취한 얼굴 위를 비단처럼 펄펄 스친다네."

후에 이황은 임형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기남아라, 참으로 기남아라" 라고 하며 호탕한 그를 그리워 했다 전한다.

야담집 '기문총화'에는 주인의 원수를 갚은 말 이야기가 있다. 임형수를 모함하여 세상을 떠나게 한 정언각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바로 임형수가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질 때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리자 말이 마구 날뛰면서 걷어차서 크게 다친 뒤 얼마 못 가 숨을 거둔 소식을[5] 모든 사람들이 통쾌해하고 하늘이 아는 것이라고 여겼다.

문무를 겸비했고, 특히 시문에 능해 조선 중기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령 어우야담의 작가 유몽인은 자신의 저서에 임형수가 남긴 시를 몇 장에 걸쳐 할애하고 있으며, 모두까기 인형이였던 교산 허균도 극찬한 적이 있다.

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라는 의미)

취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물소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지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에 이르니 칼과 창이 우는 구나.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

  1. 이 얘기는 흔히 임형수가 의원으로 바뀌기도 하며, 그 외 사항은 전과 동일.
  2. 유분록에는 16사발을 먹였는데 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목을 메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 양반편에도 이 장면이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
  4.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임형수
  5. 정말로 임형수가 탄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에서 떨어지다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려 걷어차여 사망한 것은 실록에도 나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