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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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웹툰)

2 정비석[1]의 장편소설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전쟁 후의 대학교수 부인의 불륜과 가정 귀환을 통한 퇴폐한 사회 풍조와 주변 인물들을 통한 미망인의 재기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미망인에 대한 묘사와 불륜 관련 문제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어려운 전쟁 후 상황에서도 4만부가 단시간에 팔려나갔다.

2012년에 흔히 보는 막장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이고 불륜이라고 해봤자 댄스홀에 다니는 정도로 끝나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2] 나름 선정적인 주제로 사회에 화제가 되었으며 당시 어떤 서울대학교 교수는 이 작품을 일컬어 중공군 2개 사단에 필적할 만큼 사회에 위험한 요소라고 공언했다.[3]

문제는 이 작품의 이야기가 어떤 높으신 분의 실제 가정사를 빗대었다는 소문에 휩싸였고 그런 이유로 정비석 작가 자신은 개인적으로 테러 협박도 당했고 아예 당시 이승만은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특무대에 연행시키게 명령을 내렸으며 특무대 경찰관들은 그에게 김일성의 지시로 남한을 음란, 퇴폐하게 만들어 적화를 기도하지 않았느냐며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과 대만, 북한에서까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나마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이 책도 금서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정비석은 르포 형식으로 가정으로 돌아와서 모범적으로 사는 자유부인의 후일담 류의 작품도 발표했었다.

인기가 높았기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이것 역시 컬쳐쇼크였다.

3 1956년 영화

1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대한민국 최초의 막장 영화.

물론 막장 드라마와 수위를 비교하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1950년대의 사회 인식은 현대와 달리 가부장적인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명망 있는 대학 교수의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딴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내용 하나만으로도 컬쳐쇼크였다. 거기다 글로만 읽는 원작과는 달리 실제로 인물이 나와서 행동을 보여주는 영화로 나왔으니 원작보다 파급력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말 부분이 권선징악적으로 바뀌었다.

당시 서울관객 11만(지금 보자면 망한 수치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대박)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았다.100% 한자로 된 제작 및 배우 이름들로 된 오프닝은 당시 어려운 시대를 짐작하게 한다. 단순히 파격적인 내용으로 사회를 들썩이게 한 것만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 나간 편집, 연출 감각으로 50년대 한국 영화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영화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비난이 쏟아졌고, 작가인 정비석이 친북행위라고 잡혀들어가 고문당하면서 영화도 볼 수 없었지만 이승만 정권 몰락과 같이 종종 재상영이 되곤 했다. 이후 자유부인 81이라든지 자유부인 2같은 영화도 나온바 있다.

등록문화재 3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 던진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 등재 이유.
  1. 1911~1991. 자유부인으로 알려졌지만 그 밖에 성황당같은 단편 소설도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발표한 친일 작품으로 인해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 문인단체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기에 더 친일파로서 악명을 떨칠 수 없었고 밝혀진 친일 작품 수는 소설 3편을 포함하여 총 9편이다.
  2. 6.25 전쟁 직후 피폐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고위층의 행각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3. 이 교수가 훗날 법무부장관을 지내는 황산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