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 1951.12.1~1987.9.21)
목차
1 개요
자코의 생전 공연 실황
"나는 인간이 목소리를 내듯 베이스를 연주합니다. 내 연주는 내 이야기 같은 거죠. 마치 가수처럼."
세계 최고의 일렉트릭 베이시스트
하지만 지나친 자만과 약물로 재능을 낭비한 비운의 천재
베이스 기타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취미생이어도, 또는 다른 악기에 종사하는 사람이어도 이 사람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자코 파스토리우스. 그는 베이스뿐만 아니라 재즈 역사계의 큰 획을 긋고 장렬히 떠나간 인물이다.
대략 자코를 기점으로 해서 밴드 뒤에서 묵묵히 리듬 멜로디를 받혀주던 베이스가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동시대의 아티스트로는 스탠리 클락, 제프 벌린, 마크 이건 등이 있다.
그의 이후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베이시스트들 중 자코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베이스 기타의 역사를 새로 쓴 인물. 말 그대로 베이스의 길을 새로이 만든 인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뛰어난 베이시스트들에게 존경하는 베이스 연주자를 꼽으라 하면 십중팔구 나오는 이름이다. 요약하자면, 일렉트릭 베이스의 지미 헨드릭스.[1] 그만큼 일렉트릭 베이스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며 그의 위상은 베이시스트뿐만 아니라 모든 뮤지션들에게까지 이른다.
혹자는 신이 세상에 자코를 보내고 베이스가 뭔지 인간들에게 가르쳐준 후 서둘러 거둬갔다.라 카더라.
일렉트릭 베이스가 멜로디컬한 악기도 될 수 있다고 인식시켜준 동시에 프렛리스 베이스의 대표자이기도 하다.[2] 자코의 플레이로 인해 프렛리스 베이스의 표현력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음악이 궁금하다면 그의 솔로 앨범을 들어보자.
2 생애
2.1 어린 시절
1951년 자코는 펜실베니아주의 작은 마을 Norristown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7살때 가족들과 함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1963년 12살이던 자코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밴드 소닉센스를 결성하여 음악 생활을 시작한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베이스를 연주하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악기는 드럼.[3] 그러나 13세때 미식 축구를 하다 손목 골절상을 당해 드럼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게 자코는 정착할 악기를 쭈욱 찾아보다가 기타, 건반은 후딱 배웠다고. 과연 음악계의 엄친아
그러던 중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울림소리에 꽂혀 콘트라베이스로 전향하다가, 마지막에는 베이스기타로 정착하였다.[4] 놀랍게도 13살의 어린 나이로 일주일 간의 연습 끝에 베이스를 문제없이 연주할 수 있었다고!
2.2 웨더 리포트의 멤버로
그는 10대의 나이로 포트 로더데일에 있는 여러 밴드에서 베이스와 편곡을 하였다. 그러다 1968년에는 플로리다에서 베스트 플레이어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21살이었던 1972년에는 다양한 밴드를 전전하며 세션으로 참가하고,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코는 마침내 시야를 넓혀 리틀 비버, 폴 블레리, 팻 메시니 등 뮤지션들의 음반 작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1975년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밴드 웨더 리포트의 멤버가 되었다.
사실 자코가 웨더 리포트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이야기가 좀 길다. 어느 날 웨더 리포트는 어느 음악 대학에 초청 받아서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는 당시 유명하디 유명하던 자코가 베이스 강사로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조가 자코를 만나러 갔지만, 그들의 첫번째 대화는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끝나고 말았다[5][6]. 시간이 흘러, 당시 웨더 리포트의 원래 베이시스트였던 미로슬라브 비토우스가 팀을 떠나는 바람에 리더였던 조 자비눌이 그의 역할을 대신할 베이시스트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예전에 잠깐 만났었던 자코를 떠올리고, 그와 함께 웨더 리포트를 꾸려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76년에는 자신의 첫 솔로 앨범 "Jaco Pastorius"[7]를 발매함으로써 데뷔를 알렸다. 그리고 같은 멤버인 자비눌과 웨인 쇼터밴드와 함께 "Metheny" 앨범을 레코딩하였다. 이때쯤 자코는 스테이지에서의 카리스마와 레코딩에서의 열광적인 모습으로 범세계적으로 언론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 프렛이 붙어 있지 않은(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8] 그는 언제나 도입부부터 놀랄 만한 멜로디와 리드미컬한 자유를 주어 '베이스'라는 악기의 가능성들을 보여줄 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Joni Mitchel의 1977년 걸작 'Hejira'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리드하는 많은 레코드에서 들을 수 있다.
2.3 밴드의 리더, 그러나 마약 중독
하지만 자코는 1981년에 돌연 웨더 리포트와 결별하고 자신의 밴드 워드 오브 마우스(Word of Mouth)를 결성한다. 그리고 1982년 Warner Bros에서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 "Word of Mouth"를 세상에 내놓았다. [9] 그리고 같은 해에 밴드를 이끌고 순회 공연을 다녔다. 이때 25살의 천재 드러머 브라이언 멜빈이 합류하는 등 잘 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1984년 부터 술과 마약에 빠지면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10] 결국 자코는 정신 불안 증세로 하얀 집 정신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하였다. 이때 자코는 정신이라도 차렸는지 브라이언 멜빈과 함께 명반 "Standard Zone"을 레코딩한다. 하지만 이게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될 줄이야.
2.4 죽음
1987년 9월 11일 자코는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의 공연을 보고 자신이 10대 때 연주했던 플로리다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의 한 클럽(Midnight Bottle Club)에 들어 간다. 그 곳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다가 우연히 클럽 밴드의 공연을 보게 된다. 이 때 자코는 밴드의 베이스를 욕하면서 자신이 쳐보겠다고 행패를 부린다. "그것도 연주라고 하는 거냐? 형이 치는 거 보여줄까?" 그러다 클럽 밴드와 시비가 붙었고, 결국 패싸움으로 번져 클럽 문지기인 Luc Havan[11]에게 떡이 되도록 맞았다. 이 여파로 자코는 얼굴 부분 두개골에 다수의 골절상 및 우측 안구 파열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결국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열흘 후인 1987년 9월 21일 뇌출혈로 사망하며 짧은 생애를 마쳤다. 향년 35세.
2.5 인간관계
팻 메스니와 조니 미첼 등의 거장들과의 활동, 그리고 잘나가는 밴드 웨더 리포트, 사람들의 열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12] 그는 언제나 공연이 끝나고 술을 마시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연습을 하나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나보고 더 늘었다더군!""안녕하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제 이름은 자코 파스토리우스 입니다. 세계 최고의 베이스 연주자이죠!"
이런 말들을 단골처럼 내뱉어대니, 동료 연주자들이 그를 좋게 보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서양 문화에서는 우리나라(및 동양권) 처럼 겸손을 큰 미덕으로 여기는 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은 문화상 자신의 생각이나 개성을 드러내는 데 관대한 편이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베이스 연주자라고 해도 딱히 손색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해도 이해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는 자코의 지병인 양극성장애로인해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기혼이었다. 슬하에 친아들 펠릭스 파스토리우스가 있는데, 그도 아버지를 이어 베이시스트로 활약 중이다.[13]
아들 펠릭스 파스토리우스의 베이스 시연 역시 베이스 실력도 부전자전
2.5.1 마커스 밀러와의 관계
자코에 관한 마커스 밀러의 회상 # 자코 사후 마커스 밀러는 어느 인터뷰 중 자코와 자신을 비교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그의 연주를 들으며 음표 하나하나까지 모두 분석했고 따라하고자 했다며 선배 베이시스트에게 존경을 표했다. 자코와 마커스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
2.6 트리비아
흔히 해외 베이스 커뮤니티에 가서 다현 베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자코는 4현밖에 안썼다!! 4현만 있어도 니들보다 잘친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파일:Jaco acoustic.jpg
???
자코는 하이C 셋팅의 5현 어쿠스틱 베이스도 썼다.
- ↑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삶을 살아서 자주 비교된다. 한 악기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마약으로 인해 삶이 망가졌으며, 어이없는 사인으로 요절했다는 공통점이 그것.
- ↑ 다만 프렛리스 베이스의 창시자는 자코가 아니며 그 이전에도 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는 있었고, 연주자도 있었다.
- ↑ 그의 아버지가 드러머였기 때문에 그 영향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웨더 리포트의 명작 헤비 웨더의 수록곡 중 최대의 히트곡인 Birdland에서도 드럼까지 연주해서 녹음하였다.
- ↑ 플로리다 주는 습도가 높아 악기 관리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고 아름다운콘트라베이스 대신 관리가 다소 쉬운 베이스기타로 바꿨다고. - ↑ 당시 웨더 리포트가 어떤 밴드였냐면(재즈가 대중 음악이 될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윤도현 밴드 같은 존재였다.
- ↑ 이 일화는 만화가이자 재즈 평론가이신 남무성 작가님의 Jazz It Up이라는 만화에서 다뤄지는데, 루머라는 이야기도 많다.
- ↑ 1. 개요에 있는 흑백 이미지가 앨범자켓이다.
- ↑ 그의 베이스가 프렛리스가 된 이유는 연습하다가 베이스에서 나는 버징 소리가 짜증 나서 박혀있던 프렛을 그대로 발톱깎이로 뽑아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의 사이코적인 행보의 인트로에 불과했다.
- ↑ 흥미롭게도 미국에선 실패했지만 일본에서는 흥행하였다.
- ↑ 원래 양극성장애가 있어서 치료를 받았지만 곧 관두고, 술과 마약에 찌들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 ↑ 자코가 사망한 후 2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22개월의 징역형과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복역 4개월이 지난 후 좋은 수감 태도로 가석방된다.
- ↑ 마커스 밀러와 팻 메스니는 그런 그의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인물들이다.
- ↑ 그의 아들은 밴드 Yellow Jackets 소속. 2014년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 때 내한한 적이 있다.
- ↑ 사실 4현 베이스가 베이스의 시작이고, 기본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다현 베이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쟤 봐라 겉멋만 들어가지고" "자코는 4현만 써도 너보다 잘침" 이라 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당장 그렇게 핀잔주는 사람치고 연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