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과

田柴科

1 개요

고려시대에 실시되었던 토지제도. 직역하면 '밭과 땔감을 나눠주는 규정'이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보면 당시의 공무원들에게 주었던 월급과 비슷한 개념이다. 조선시대의 과전법과 달리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다.[1]

물론 일반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서 경작하는 민전도 있었으며, 민전은 자유롭게 매매, 증여, 상속이 가능했다.

2 설명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통일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치하하기 위해 새로운 토지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역분전(役分田)이다. 이 때는 관품에 상관없이 공과 인품, 그리고 충성도를 반영하여 수여되었으며 한동안 존속하다가 전시과 제도가 나타나면서 사라진다.

최초의 전시과는 경종(고려) 1년 (976)에 실시된 시정 전시과이다. 이 제도 하에서는 전/현직 관리를 구분하지 않고 토지가 전부 지급되었으며, 관리를 문반, 무반, 잡업 세 종류로 나누고 각각 자삼, 단삼, 비삼, 녹삼 네 가지의 단계로 구분하였다. 이는 선대 왕이었던 광종이 관리의 공복을 정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인 과전은 세습할 수 없었고, 지급받은 관리가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해야 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관품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고 있어 역분전의 성격이 남아 있는 제도였다. 개차반은 못 받는단 소리 이거때매 진짜 헷갈리는 사람있을듯 맞잖아?

헌데 토지 지급량이 워낙 많았고, 지급받은 관리가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아 지급해야 할 토지가 부족해졌다. 이 때문에 목종 1년 (998)에 개정이 이루어져, 이를 개정 전시과로 칭한다. 개정 전의 전시과와 마찬가지로 전/현직 관리에게 전부 토지가 지급되었으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었고,[2] 인품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직이 없는 산관보다 관직에 나가 있는 직관을 우대했으며, 무신보다 문신이 더 우대를 받았다. 예를 들어 같은 정 3품의 품계를 가진 무반의 최고직 상장군과 문반의 어사대부를 보면, 상장군이 전시과에서 5번째 등위에 있는 반면, 어사대부는 4번째 등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17관품에 들지 않는 관등외 관리들에게 17결의 토지를 지급하는 한외과가 있었다. 무신보다 문신이 더 우대를 받았다는 점에서 무신정변의 불씨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무신들의 지위가 상승하고, 또 다시 토지부족 사태를 겪게 되자 전시과 제도를 문종 30년 (1076)에 다시 고치게 되는데 이를 경정 전시과[3]라 하며 이로써 전시과 제도가 완성된다. 이전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있는데,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게 되었고 그 양도 현격히 줄었다. [4] 또한 무신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었으며, 한외과를 폐지하고 기존의 관등외 관리들을 전시과 안으로 통합시켰다. 지방의 향리에게는 역의 대가로서 외역전을 지급해 주었으며, 승려와 풍수지리를 보는 이들에게 별사전을 지급하고 하급 관리의 유족에게 생계유지로 주는 구분전, 하급 관리의 자제로서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이들에게는 한인전을 지급했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음전이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지급, 세습되기 시작하면서 문벌 귀족들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문벌귀족사회가 붕괴되고 무신들이 정권을 잡자 전시과 제도는 붕괴되었고,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재개되지 못했다. 무신들부터 대농장을 경영한 데다가 그 뒤를 이은 권문세족들도 토지 겸병과 병작 반수제, 지주전호제의 삼박자로 산천을 경계로 삼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토지를 소유했다.[5]

고려의 전시과와 이후 조선의 토지 수조제, 대한민국을 보면 의외로 공통점이 많은데, 기존 토지의 겸병이나 다른 부패 행위 혹은 국민 선택 미스 등에 따른 변질로 인한 신진 관료들의 수입 감소, 이에 따른 부정부패 및 예외계층의 증가, 뒤이은 수입 감소 밎 재정위기로 인한 악순환의 지속이 바로 그것이다.

3 지급된 토지의 종류

  • 과전 : 문무관리에게 역의 대가로 지급한 토지. 수조권만 받는 토지로 지급받은 관리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말 조선초 과전법과 구별
  • 구분전 : 하급관리, 또는 군인의 유가족에게 생계유지를 위해 지급한 토지. 유족연구분(금)
  • 한인전 : 6품 이하의 하급관리 자제들 중 관직에 나가지 못한 자들에게 지급해 준 토지. 지급 결수는 17결. 한가한 사람(백수)에게 지급
  • 공음전 :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해 준 토지. 세습이 가능한 영업전에 속하며 2분의 1세를 징수했다.
  • 공전 : 국가가 수조권을 갖는 토지로, 경작하는 농민들은 4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관청의 비용 충당을 위한 공해전, 왕실경비를 충당하는 내장전, 왕자와 왕족에게 지급되었던 궁원전, 학교 경비 충당을 위한 학전, 국경지대 군대의 경비 충당을 위한 둔전이 있었다.
  • 사원전 : 절에 지급하는 토지로 면세를 받았다.
  • 외역전 : 지방의 향리들에게 지급하던 토지로 향직이 세습되므로 사실상 세습되는 토지였다.
  • 군인전 : 중앙군인 2군 6위에 근무하는 직업군인에게 지급한 토지. 자손이 군역을 세습할 경우에만 세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에 반납하고 구분전을 지급했다.
  • 별사전 : 승려나 지관 개인에게 지급된 토지.
  1. 이는 경정 전시과에 가면 경기 지방의 토지로 한정된다.
  2. 1품은 전지 100결, 시지 70결을 지급받았으며 16품 이하의 하급 관리들에게는 시지가 아예 지급되지 않았다.
  3. 한자가 更이다 보니 책에 따라서는 갱정 전시과라고 실려 있다.
  4. 1품 지급량이 전지 100결에 시지 50결이며, 15품 이하로는 시지가 지급되지 않았다.
  5. 경국대전에서는 이 3가지를 금지했는데 그만큼 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조선 초를 지나 직전법 등을 필두로 중기에 접어들어서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토지가 줄어들자, 양반들은 똑같은 행태를 보이게 된다.